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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저주받은 삶'이란 없다 | '존재의 정원'이 있을

'저주받은 삶'이란 없다 | '존재의 정원'이 있을 뿐

토마스 크바스토프 (Thomas Quasthoff)의 목소리. 그의 목소리는 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생명성의 치열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끊임없이 비상하고자 하는 그의 절절한 '존재에의 갈망'을 담고 있다. 그는 성악가로서 '연기(perform)' 하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는 그의 존재 자체를 매 음절마다 소중한 생명의 선물처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치명적인 육체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2016년 09월 12일 10시 23분 KST
'나향욱 사건'의 근원적 문제들 | 공무원과 언론인들의 '회식'

'나향욱 사건'의 근원적 문제들 | 공무원과 언론인들의 '회식' 문화

내가 우선 알고 싶은 것은 공무원과 기자들 간의 이 '식사' 자리가 애초에 왜 필요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얼마나 자주 소위 고위급 공무원들은 언론사의 기자들과 이러한 식사를 함께해 왔으며, 그리고 '누가' 이 식사비용을 냈을까.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사회 곳곳에서 무비판적으로 행하여 지고 있는 이러한 무수한 '식사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개-돼지' 방식의 이야기들이 오고 갔을까. 아마 '나향욱' 씨는 유독 자신의 이야기만이 '운 나쁘게' 밝혀져서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2016년 07월 13일 16시 43분 KST
왜 '질문'은 해답보다

왜 '질문'은 해답보다 중요한가

"그리스도인들은 비키니를 입어도 될까?" "동성애를 지지하는가 반대하는가?" 이러한 질문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첫째, 이러한 질문은 '예'와 '아니오'만을 전제함으로써 이 질문 자체가 지닌 특정한 가치관을 스스로 타당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둘째, 이러한 형태의 질문 방식은 '예'와 '아니오'라는 흑백 논리적 해답을 유도함으로써, 이 현실세계의 '복합성'을 상충적인 이분법적 방식으로 단순화시켜버린다.
2016년 07월 03일 13시 24분 KST
'찬란한 전통'의 걸림돌 | 영국의 EU탈퇴를

'찬란한 전통'의 걸림돌 | 영국의 EU탈퇴를 보면서

영국의 EU 탈퇴 소식은 나를 우려하게 한다. 정치 공학적 분석이전에 철학적으로 보자면, 영국의 EU 탈퇴는 '타자에 대한 환대와 타자들과의 공존' 이라는 이 현대세계의 긴급한 과제를 역행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영국과 같은 위치에 있는 나라들이 특히 난민 문제나 이민자문제 등에 어떠한 실천적 개입을 하는가가 이 국제사회에서 시사하는 바는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이제 '유럽공동체'가 아니라, 다른 나라/사람들과는 다른 '영국공동체'를 더 우선적 정체성으로 내세우겠다는 것은, 타자들에 대한 노골적인 배타성을, '영국성'을 지켜내기 위한 것으로 정당화될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슬람, 여성, 성소수자등과 같은 '타자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노골화하는 미국대선 주자인 도널드 트럼프의 '차별의 정치'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이 미국 안에서도 더욱 힘을 받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게 된다.
2016년 06월 25일 10시 39분 KST
'정상-비정상' 레토릭의 위험한 덫 | 혐오의 몸짓을

'정상-비정상' 레토릭의 위험한 덫 | 혐오의 몸짓을 거두라

성서에 근거하여 성소수자들을 혐오하고 박해하는 기독교인들이 진정 '성서대로' 살고 싶다면, 우선적으로 그들이 따라야 하는 것은 타자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용서, 그리고 환대이다. 이러한 가치야 말로 성서가 담고 있는 시대를 초월한 '절대적 진리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도, 그 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도 또는 여성평등을 반대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도 모두 '성서'에 근거하여 자신의 주장을 전개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떠한 가치를 성서 속에서 찾고자 하는가에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성서 구절을 찾아낼 수 있다. 성서는 억압적 전통과 해방적 전통을 동시에 담고 있다. 따라서 해방적 가치를 지닌 '절대적 진리'와, 시대문화적 제한성속에서 전개된 억압적 가치를 지닌 '상대적 진리'를 구분해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과제이다.
2016년 06월 11일 13시 09분 KST
구의역 사건의 초점 | '19세 청년'이

구의역 사건의 초점 | '19세 청년'이 아니다

이렇게 구조적 부당성에 의한 죽음에 생물학적 나이가 전혀 개입되어서는 안된다. 그 죽음으로 내몰린 사람이 20세이든 70세이든, 또는 그 사람의 성별이나 성품이 어떠한 것이든 그 죽음이 연계된 다층적 문제점들과는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나이, 성별, 계층, 국적, 또는 성품 등에 따라서 '더 소중한 생명' 이거나 '덜 소중한 생명'이라는 의식적/무의식적 '생명의 위계주의'는 경계해야 할 가치체계이다. 어떠한 연령의 사람이든 사실상 모두 '꽃다운' 소중한 생명인 것이다.
2016년 06월 03일 10시 07분 KST
한국 신문에 바란다 | '정체성의 표지'의 양가적

한국 신문에 바란다 | '정체성의 표지'의 양가적 기능

'여기자' '여선생' '여목사' '여류작가' '여성학자' 등의 표지를 신문 등 다양한 매체에서도 버젓이 쓰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다. 또 다른 한국 특유의 것이 있다. 그것은 신문기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 옆 괄호에 '나이'를 넣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들은 '나이'만이 아니라 '여'라는 표지가 덧붙여진다. 앞에 '여자'라는 표지를 붙임으로써 아무런 표지가 없는 이들, 즉 남성은 그 사회적 중심성을 드러낸다.
2016년 05월 23일 14시 24분 KST
'여성혐오'의 다층적 얼굴들 | 역삼동 공용화장실

'여성혐오'의 다층적 얼굴들 | 역삼동 공용화장실 살인사건

내가 이번 살인사건의 논의에서 우려하는 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묻지마 살인'인가 '여성혐오살인'인가에 대한 양자택일적 논의방식의 한계이다.이 양자택일이 위험한 이유는 이 두 축 사이의 얽히고설킨 복합적 관계성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한다. 둘째, '여성혐오'에 대한 지극히 제한적인 몰이해를 대중화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성혐오'가 마치 살인이나 노골적인 물리적 폭력을 통해서만 실행되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여성혐오'는 노골적이고 야만적인 얼굴만이 아니라, 매우 친절하고 부드러운 은밀한 방식으로도 작동되고 있다. 여성을 매우 우대해주는 것 같은 소위 '신사도'의 근원적인 인식의 출발점은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즉,열등한 존재로서의 여성이해) 은밀한, 그러나 강력한 '여성혐오'이다.
2016년 05월 21일 21시 48분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