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ile image

木村幹

1966년생. 일본 교토대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및 박사(법학). 한국국제교류재단 연구펠로, 하버드대학 객원연구원, 고려대학교 객원연구원 등을 거쳐 고베대 대학원 국제협력연구과 교수.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연구위원. 전공은 비규정치학, 한반도 지역 연구. 저서로 "조선/한국의 내셔널리즘과 소국의식"(산처럼, 2007), "한국의 권위주의적 체제 성립"(J&C, 2013) 등이 있음.
누가 어려운 시대를 살아간 젊은이를 단죄할 수

누가 어려운 시대를 살아간 젊은이를 단죄할 수 있을까

형의 행방을 찾았던 "동생"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자세히 알게 된 것은 광복부터 무려 40년이 지난 1985년. 그러나 "동생"이 마주한 것은 더욱 어려운 현실이었다. 물론, 그 중 하나는 제2차대전 이전 한반도 "청구권"에 관한 모든 문제는 1965년에 체결된 한일조약으로 모두 해결됐다는, 일본 정부의 완고한 자세였다. 그러나 냉담한 태도를 보인 것은 일본 정부만이 아니었다. 70년에 걸쳐 형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하며 활동해온 "동생"이 유일하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친일파 인정"일 뿐이었다. "동생"은 말한다. "적어도 특공 전사라는 인정을 일본 정부가 취소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나마 형의 부담이 가벼워진다고 한다.
2015년 06월 22일 13시 34분 KST
'한·일 정상회담과 위안부 문제 분리'는 대담한

'한·일 정상회담과 위안부 문제 분리'는 대담한 제안이지만

한일관계를 "정상적인" 상황으로 되돌리기 위하여 위안부문제를 일단 정상회담에서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은 큰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를 위해 한일 기본조약의 부속 협정에 규정된 중재위원회를 설치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자는 제안은 다른 문제일지도 모른다. 중재위원회 설치 제안은 중재위원회 그 자체의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를 두고 양국간의 새로운 분쟁을 초래한다. 또 일단 중재위원회 설치가 제안되면 위안부문제 이외의 문제도 거의 확실하게 논의 대상으로 책상 위에 오르게 된다.
2015년 03월 25일 08시 18분 KST
지금 '아베 담화'가

지금 '아베 담화'가 필요한가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무라야마 담화를 둘러싼 혼란 속에서 역사인식 문제 해결에 관한 몇가지 중요한 옵션을 잃어버렸다는 점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에 한국정부도 명확한 찬성의 뜻을 나타냈던 위안부 문제를 "아시아 여성기금"으로 해결하겠다는 선택이다. 무라야마 담화를 둘러싼 혼란과 역사인식 문제가 분출함에 따라 한국정부는 당초 밝힌 "아시아 여성기금"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아시아 여성기금" 해법이 소멸됨에 따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일 간의 위안부문제 해결은 극히 어렵게 됐다. 양식 있어 보이는 "담화"가 그 후 논란을 오히려 크게 만들어간 것은 고노 담화도 마찬가지였다.
2015년 01월 29일 14시 15분 KST
'제국의 위안부' 출판 금지는 바람직한

'제국의 위안부' 출판 금지는 바람직한 일인가

위안부 할머니 9명이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의 출판 금지 소송을 제기할 방침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물론, 위안부 할머니들의 불만을 알 수 없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이 모든 위안부들이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또 일본 정부와 일본군에 의한 "협의의 강제 연행"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논쟁적인 부분이 많이 남아 있으며, 그 실상과 해결 방법에 대해 다양한 접근을 통한 분석과 토론을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법 및 사회의 "상식"을 이용해 특정 논의를 봉쇄하려는 것은 위안부 문제의 해결과 규명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그 운동의 신뢰성을 스스로 크게 다치게 한다.
2014년 06월 23일 06시 28분 KST
'강제 연행 여부'는 지금도 중요한

'강제 연행 여부'는 지금도 중요한 논점인가

중요한 것은 한국 최대의 위안부 지원 단체와 그 관계자가 대표적인 위안부 사례로 일부러 애니메이션까지 만들어 세계에 소개하려고 하는 사례가, 많은 일본인이 상상하는 군인이나 정부 관계자가 직접 억지로 끌고간 '강제 연행'이 아니라는 점이다.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는 사람들에게 동원 과정의 '강제성' 입증은 옵션에 지나지 않았다.
2014년 05월 06일 08시 00분 KST
'고노 담화'는 어디서 '연합국 전후 처리'를 포함하는 문제로

'고노 담화'는 어디서 '연합국 전후 처리'를 포함하는 문제로 바뀌었을까?

가토 담화가 나온 1992년 7월부터 고노 담화가 나온 1993년 8월 사이에 위안부 문제는 언제부터인가 대상과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미 위안부 문제가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 의한 군사 점령 등을 경험한 다른 국가들로부터도 관심을 끄는 문제가 되었으며, 그 일부에서는 소송도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2014년 04월 15일 06시 29분 KST
위안부 문제는

위안부 문제는 "일단 사과만 해 놓으면 되겠지"부터 시작됐다

'고노 담화'가 나오게 된 경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전년, 1992년 1월 11일자 "위안소에 군 개입을 나타내는 자료 발견"이라는 아사히신문 보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일본 정부를 고민하게 한 이유는, 이 보도가 한일 정상회담 불과 5일 전에 나왔기 때문이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갑자기 그 동안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전제가 무너짐에 따라 당시 일본 정부는 일종의 패닉에 빠졌다.
2014년 04월 08일 05시 53분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