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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희

예술가

예술가
이번에야말로 인생이 끝난 줄 trigubova via Getty Images

이번에야말로 인생이 끝난 줄 알았어요

“인생 망쳤네.” 언니가 고등학교를 그만두었을 때, 아빠의 주변 사람들은 말했다. 나에겐 고등학교에 꼭 가라고 하면서. 나는 의아했다. 그들의 염려와 다르게 학교를 그만둔 언니는 집에서 영화 보고 잠자고, 검정고시 시험을
2018년 10월 29일 11시 19분 KST
어느 대학의 무기정학 jakkaje808 via Getty Images

어느 대학의 무기정학 사유

ㅅ은 지난 5월, 대학교에서 폴리아모리(비독점 다자연애) 관계라는 이유 등으로 무기정학을 당했다. 기독교 재단인 한동대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다. 대학 측은 폴리아모리라는 ‘문란한’ 관계 방식이 기독교 설립 이념과 대학의
2018년 06월 11일 11시 58분 KST
다리

다리 밑에서

새로 이사한 집 위에는 마포대교가 있고, 아래에는 한강이 있다. 나의 방은 반지하인데, 반지하에서 사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4년 전에는 반지하의 창문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와 자동차의 불빛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지만 지금 지내는 곳은 창문에서 쇠창살과 회색 담장만 보인다.
2018년 01월 29일 11시 27분 KST
내가 만난

내가 만난 유아인들

나는 많은 유아인'들'을 만났다. '너에게 배우고 싶다', '너의 글이 너무 좋아'라며 접근한 의미 중독자들. 남성 인간 주체의 주체뽕, 예술뽕, 해탈뽕은 고질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페미니즘에 끌렸을까.
2017년 12월 04일 12시 25분 KST
무질서한

무질서한 우리

우리는 서로를 비혼·비출산 가족, 연인, 도반, 짝꿍 등으로 그때그때 이름 붙이지만 어느 것으로도 가두지 않는다. 서로가 원하는 거리에서 원할 때 함께 있고, 따로 있는다. 매일매일 달라지는 몸의 바이오리듬처럼, 관계도 가깝다가 뜨거웠다가 차가웠다가 멀어졌다가를 반복하는 불규칙한 리듬이다.
2017년 11월 06일 14시 38분 KST
선정성 이유로 '붉은선' 책을 거부하는

선정성 이유로 '붉은선' 책을 거부하는 도서관

누구나 나의 책을 읽었으면 좋겠지만, 마음의 준비가 안된 사람들은 안 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의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처럼 가닿을 사람에게는 꼭 닿고싶다. 이 책은 아홉살 때부터 길거리 성추행을 당하고 열세살에 자위를 하고 열네살에 야동을 보고 열다섯살에 첫경험을 했던 내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다. 집에 돌아가기 싫어서 도서관을 어슬렁가리던 나에게 말이다.
2017년 10월 26일 18시 25분 KST
나는 당신을

나는 당신을 모른다

내가 동양인, 황인종, 한국인, 여성, 20대, 비영어권 인간이라는 것은 이 소통의 공간에서 중요하지 않다. 코즈모폴리턴, 절대적 환대와 세계시민의 가능성은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우리에겐 더 많은 언어능력이 아니라, 더 많은 무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을 모른다는 무지.
2017년 10월 10일 18시 10분 KST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 싶다

하루 종일 인터넷을 붙잡고 있다. 예술인복지재단 창작지원준비금 신청을 하려고 오전 10시부터 눈 뜨자마자 컴퓨터 앞에서 지금까지 씨름 중이다. 사이트는 폭주해서 다운되고, 전화를 해도 통화 중이고, 메일을 보내도 답장이 없다. 그 돈이라도 받으려고 아등바등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나와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상상된다. 오늘을 위해 일주일간 건강보험증도 발급받고, 겨우 건강보험 납부확인서도 받아내고, 소득이 없다는 사실증명 등 서류도 준비했는데...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 싶다.
2017년 09월 15일 16시 04분 KST
커리의

커리의 얼굴

나와 다른 방식으로 듣고, 보고, 느끼는 존재가 옆에 있다. 이 존재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모든 타자가 그렇듯. 커리에게 나는 어떤 움직임일까. 인터넷에서 '강아지가 좋아하는 음악'을 검색해봤다. 레게음악이 좋다고 한다. 아침마다 레게음악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았다. 커리가 정말 좋아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커리는 취향이 없을까? '인간이 좋아하는 음악'이 덩어리로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커리가 좋아하는 선율과 리듬이 있을 거다.
2017년 09월 11일 14시 58분 KST
얼굴 없는

얼굴 없는 사람들

'성판매 여성 안녕들 하십니까' 페이스북 페이지는 성노동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공간이다. 얼굴 없는 사람이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고맙고 반가운 곳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 페이스북 코리아는 이곳을 음란물 페이지로 규정했다. 많은 사람의 항의로 다행히 규제는 풀렸다. 창녀의 추억 따위가 남성 작가의 문학작품으로 나오고, 영화마다 화려한 배경으로 창녀가 등장하는 땅에서 창녀가 자기 목소리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건 음란물이 된다. 성노동자는 스크린 속의 미학이거나 환상 속 악마, 팜파탈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2017년 08월 14일 11시 58분 KST
걸어다니는

걸어다니는 캔버스

"어쩌려고 했어요?" 인도에서 만난 한국 남자가 내 어깨의 타투를 보고 말했다. "왜요? 이게 뭐 어때서요?" "여기서는 괜찮은데 한국 가면 어쩌시려고요." 그의 무례한 걱정만큼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하는 타투는 편견을 몰고 다닐 수 있는 일이다. 타투는 내 의미를 각인하는 것인데 어떤 시선에서는 낙인으로 돌아온다. 타투가 범죄자의 낙인이거나 종교의 부적이던 역사는 길다. 나에게 타투는 낙인이라서 부적이다. 편견이 많은 사람을 막아주는 방패랄까. 타투 덕분에 '여자가 타투를 하면 싸 보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인연이 닿지 않아서 좋다.
2017년 07월 17일 11시 33분 KST
불법이 된 풀잎, 괴물이 된

불법이 된 풀잎, 괴물이 된 사람들

인도에서도 대마초는 불법이지만 캐나다, 네덜란드, 미국 몇개 주 등 대마초를 허락한 나라도 많다. 세계적으로 대마초를 비범죄화, 합법화하기 위한 토론이 활발하다. 국내에서는 몇 해 전 유명 영화배우, 감독 등이 '대마 합법화 및 문화적 권리 확대를 위한 문화예술인 모임'을 만들고 위헌 소송을 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얼떨결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나는 대마초가 합법인 나라에서 대마초를 피워도 불법이 된다.
2017년 06월 19일 12시 09분 KST
나에겐 당신을 찬성할 자격이

나에겐 당신을 찬성할 자격이 없습니다

"합법화를 통해 동성애가 보호되면 가장 큰 문제점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많은 국민의 양심과 표현, 종교와 학문의 자유가 억압되는 데 있다." ㅎ대학 학보에 실린 동성애 합법화 반대 칼럼에 있는 문장이다. 같은 주제의 기사가 두 번씩 연이어 게재되었고, 학생들에게 비판을 받자 학보사는 "특정 인물에 대한 비난, 욕설, 범죄의 소지가 있는 글을 제외한 모든 글을 싣습니다"라고 해명했다. 동성애자는 특정 '인물'도 아닌 걸까. 학보사 기자는 동성애를 차별하는 거냐고 묻는 '사상검증'은 옳지 않으니 '검열'할 수 없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사는 표현의 자유라며 동성애를 반대하는 신념을 밝혔다.
2017년 05월 22일 12시 09분 KST
추락

추락

우울증은 어떤 병일까. 누군가는 만들어진 질병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지나가는 감기나 극복해야 할 병이라고 말한다. 여성학자 모린 머독은 우울증을 자발적으로 소외되는 시간이라고 했다. 빛나는 위쪽, 목표로 향하는 남성 중심의 경기장에서 이탈해 나무와 진흙을 만나는 시간. 내게도 그런 시간이었다. 우울증은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그림을 그리게 해주고, 타인의 슬픔 속에 머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광장을 맨발로 걸어 다니게 하고, 꿈에서 진흙을 밟게 도와주었다. 길을 잃으려고 땅속으로 하강했던 것이다. 길을 찾으려고.
2017년 04월 24일 10시 56분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