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수

문학평론가, 강출판사 대표. 평론집 <소설의 고독>
남아 있는 시간에 대한 두

남아 있는 시간에 대한 두 질문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남아 있는 나날'. 작가는 점증하는 자기기만의 아이러니를 화자의 어조에 섬세하게 새겨 넣고 있는데, 회고의 리듬을 여로를 따라 하루 단위로 설계하고 엿새로 나누어 배치한 것도 대체로 성공적인 서사전략이 아니었나 싶다. 엿새는 두번의 아침과 두번의 오후, 세번의 저녁으로 나뉘면서 모두 일곱개의 챕터로 구성된다. 마치 세상의 일주일처럼.
2017년 11월 09일 18시 24분 KST
문학과 역사의 감옥 | 황석영 자전 『수인』을

문학과 역사의 감옥 | 황석영 자전 『수인』을 읽고

80년대 초반 광주의 진실을 두고 전두환 독재정권과의 전면적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때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 중의 하나가 작가 황석영의 그것이었던 것도 그러고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테다. 전태일이 점화한 70년대 노동운동과 민주화투쟁의 새로운 국면에서 황석영이 「객지」 「한씨 연대기」 「삼포 가는 길」 「돼지꿈」 등 일련의 작품으로 그려내고 포착한 민중 현실의 생생한 모습과 포괄적 인간 진실의 힘은 문학의 울타리를 넘어 저항과 변혁의 은밀한 심지가 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80년대 초 그 급박한 시절에 그는 어디에 있었는가. 황석영의 자전 『수인』은 내게는 꼭 그 질문에 대한 응답처럼도 보인다.
2017년 07월 07일 16시 43분 KST
변화하는

변화하는 문예지

인터넷과 SNS가 정보와 지식의 매체로서만이 아니라 생활의 조건이자 인간관계의 양식(樣式)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문예지가 그에 걸맞은 소통의 형식과 언어를 개발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겠다. 이제 성정치를 누락하거나 외면하고 한국문학의 인간탐구를 이어나갈 수도 없다. 그 누구보다 먼저 작가, 시인들이 이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문예지의 출현이나 문예지의 혁신은 그런 면에서 불가피하다.
2017년 02월 23일 13시 42분 KST
진공의 고요와 뜨거움 | 황정은 중편 「웃는 남자」를

진공의 고요와 뜨거움 | 황정은 중편 「웃는 남자」를 읽고

홍상수 감독의 신작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민정의 대사, "혹시 저 아세요?"는 처음에는 웃음을 나중에는 섬뜩함을 남기는 방식으로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방황하던 주인공 영수는 결국 민정을 처음 만나는 사이로 수긍하며 민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리에서 다시 사랑을 시작하려고 한다. 사실, 익숙한 틀이나 패턴으로 타인을 규정한 뒤 그것을 우리의 앎으로 뒤바꾸는 일은 너무 흔하다. 대개는 그러고 살지 싶다.
2016년 12월 19일 15시 21분 KST
밥 딜런이 보내온

밥 딜런이 보내온 질문

어떻든 우리 시대가 비유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실제에서 음유시인을 갖고 있었고, 그로부터 깊은 위로를 얻어왔다는 노벨위원회의 소식은 놀랍고도 반갑다. 모든 상이 그러하듯 문학상도 축제와 자기 격려의 한 방식이다. 노벨문학상이 발견한 축제의 음률은 적어도 최근 "세상에서 생각된" 최선의 것인 듯하다. 밥 딜런은 웅얼거리고 속삭인다. 생각해보면, 웅얼거림과 속삭임은 문학에 대한 오래된 정의 중 하나이다.
2016년 10월 20일 14시 29분 KST
역사의 짐 | 거제도 포로수용소와

역사의 짐 | 거제도 포로수용소와 한국문학

증언되고 재현되지 못한 역사의 시간이 있는 한 그 연속의 계기는 끝없이 상상되고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허니 바케쓰'(honey bucket, 수용소에서 똥통을 부르던 말)에 수시로 사람들의 잘린 팔, 다리, 머리가 담겨 버려진 역사의 시간이 남아 있는 한,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존자의 다음과 같은 질문 역시 계속될 필요가 있다. "지금도 나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우리가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과연 우리는 그 행동을 책임져야 하는가."
2016년 08월 18일 16시 29분 KST
다시 읽는 『채식주의자』 | 한강의 수상을

다시 읽는 『채식주의자』 | 한강의 수상을 축하하며

한강의 영예는 무엇보다 작가 개인의 영예여야 마땅하다. 작가에 따르면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는 1997년에 발표한 단편 「내 여자의 열매」로부터 자라나왔다고 한다. "한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식물이 되고, 함께 살던 남자는 그녀를 화분에 심는 이야기였다. 언젠가 그 변주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했다."('작가의 말') 이야기와 상상력의 숙성 과정을 거쳐 세편의 연작소설로 출간된 게 2007년이니 십년이 걸린 셈이다. 작품을 쓰는 동안에는 손가락 관절과 손목 통증으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수 없는 상황이어서 손으로 글을 써 타이핑을 부탁하거나 볼펜을 거꾸로 잡고 자판을 눌렀다는 고백도 나온다.
2016년 05월 26일 12시 00분 KST
이야기로 환원되지 않는 시간들 | 차이 밍량의 「하류」를

이야기로 환원되지 않는 시간들 | 차이 밍량의 「하류」를 보고

어떻게 해도 복기가 잘 안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이렇게 말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흔들렸고, 그 여진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많이 남아 있다. 그건 범박하게 말해 이 영화가 포착해낸 삶의 강렬하고 특별한 리얼리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리얼리티는 흔히 말하듯 핍진성의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하류」의 화면에 흐르고 있는 것들은 우리가 살았으되 살지 않은 시간이며, 우리도 모르게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 시간이다. 혹은 가능태의 시간이다.
2016년 03월 31일 17시 26분 KST
나는 모르고 있었다 | 송경동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를

나는 모르고 있었다 | 송경동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를 읽고

언제부터였을까. 광화문광장이나 청계천광장에서 농성 중인 해고노동자들을 지나치며 그저 그러려니 무감해진 게. 트위터에 연신 올라오는 고공농성자들의 간절한 통신을 이상한 불편함으로 건너뛰기도 한 게. '내' 열망과 상처는 여러 갈래일 테지만, 저 '노동과 투쟁'의 이야기는 어쩌면 하나의 틀, '교조'일지도 모르겠다고 내 멋대로 단정하기 시작한 게. 이런저런 근사한 말과 글로 울타리를 만들기 시작한 게.
2016년 02월 25일 15시 34분 KST
2016년 새해 신춘문예 단상: 문학이란

2016년 새해 신춘문예 단상: 문학이란 何오?

신춘(新春)은 '새봄'을 뜻하지만, 흔히는 새해, 신년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1월이면 겨울의 한가운데인데도 그렇게 부르는 것은 조금이라도 봄을 당겨 밝고 따뜻하게 새해를 맞고 싶은 소망 때문인지 모른다. 한자의 형상도 그렇지만 음성자질 쪽에서도 신춘이란 말은 화사한 느낌을 준다. 예전, 정초의 신문이나 잡지에서 '신춘정담' 같은 꼭지는 빠지지 않았다. 지금은 왠지 구식투가 된 듯하다. 그러나 '신춘문예'만은 여전히 '신춘'의 화사한 위세를 잃지 않고 오늘까지도 하나의 고유명으로 당당하다.
2016년 01월 07일 20시 10분 KST
세상의 시간, 세상의 풍경 | 허우 샤오시엔

세상의 시간, 세상의 풍경 | 허우 샤오시엔 이야기

「밀레니엄 맘보」가 메워질 수 없는 고독과 그리움의 이야기인 동시에, 미래가 닫혀버린 비키와 하오하오의 세대, 그 대책 없는 세대에 대한 장형(長兄)의 책임과 부끄러움, 근심과 사랑의 시선으로 찍은 영화라는 것을 이번에 다시 보며 알았다. 그러니까 "그건 십년 전인 2001년의 일이었다. 그해 유바리엔 눈이 아주 많이 내렸다." 2015년에 무협의 형식으로 도착한 「자객 섭은낭」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한 장면 한 장면이 최선이었다.
2015년 12월 04일 14시 02분 KST
'창비스러움에 대하여'에 대한

'창비스러움에 대하여'에 대한 반박

'창비 부설 세교연구소 임원급의 문학비평가'가 저입니다. 저는 세교연구소 회원이고, 지금은 2년째 세교연구소 이사를 맡고 있으며, 문학비평을 하고 있으니 저를 형용하고 있는 사실들은 틀린 게 없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대목은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저는 계간지 <창비>에 글을 쓰기도 하지만, 외부 필자로서 청탁에 응해 그렇게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구구한 설명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저 저는 한 사람의 문학평론가입니다. 청탁을 받아 글을 쓸지언정, '오더'를 받아 글을 쓰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저 자신의 '인격'으로, '자존심'으로 지켜지고 보호받아야 할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2015년 10월 27일 14시 20분 KST
소설 읽는

소설 읽는 시간

필립 로스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소설은 그저 독자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할 뿐이라고 답하며 자기 소설의 사회적 영향력을 냉소에 부친다. 그러나 질문이 거듭되자 그는 결국 오랫동안 여투어두었을 진심의 일단을 내비친다. 자신은 독자를 '다른 작가들이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소설 속에 푹 빠지게 한 뒤(사실 이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독자를 소설 읽기 전의 세상으로 다시 돌려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독자인 우리가 잠시 그의 소설 속에 머문 뒤 다시 돌아가는 '읽기 전의 세상'은 어떤 곳인가.
2015년 10월 01일 15시 10분 KST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챙겨본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챙겨본 생각들

기실 노년의 시간에도 얼마든지 인생이나 세상의 진실에 대한 열정을 유지할 수 있으며, 영화를 보든 문학작품을 읽든 그것이 반드시 '후회나 아쉬움으로 자신을 학대하는' 경로로 이어질 일도 아닐 테다. 그러나 나 자신 그런 동력이 떨어질 수 있는 시간에 대한 불안에 휩싸일 때도 있고, 그럴 때 좋은 영화나 좋은 문학작품을 접하는 일은 뭔가 쓰라리고 외면하고픈 자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느낌은 가진 바 있다. 예술가에게 만년의 양식(樣式)이란 게 있을 수 있다면, 일개 독자나 관객에게도 그에 맞는 합당한 양식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2015년 07월 17일 16시 34분 KST
인생의 제시간과 서성임 | 최정례의 시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를

인생의 제시간과 서성임 | 최정례의 시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를 읽고

짜장면 배달부의 고뇌는 많은 이들의 삶에서 반복된다. "부르기 전에 도착할 수도 없고, 부름을 받고 달려가면 이미 늦었다." 우리는 기다림을 말하는 데 익숙하다. 그것은 살아가는 일의 어떠함을 전하는 오래된 지혜의 차원일 수도 있고, 역사의 정의를 믿고 나누고자 하는 화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기다림이라기보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경일 때가 많다. '제시간'은 대개 우리의 것이 아니다.
2015년 05월 29일 17시 58분 KST
'세월호'와 문학의

'세월호'와 문학의 자리

세월호참사가 국가의 무능과 무책임에 대한 절망적인 확인을 넘어, 그 국가가 부추겨온 물신과 증오의 세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쪽으로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기 부끄러운 지경에 이르렀다. 사후 수습 과정에서 정부가 어떤 어려움을 감수하면서도 지켜냈어야 할 도덕의 최저선은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위로와 보호여야 했다. 적어도 보상을 둘러싼 이야기가 유가족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일은 철저하게 차단했어야 했다.
2015년 04월 16일 10시 27분 KST
이야기가 사라져가는

이야기가 사라져가는 시절

노모의 입에서 맥락 없는 웅얼거림만이 남게 되었을 때도, "엄마!"란 말과 "밥 좀 줘" 하는 말에는 반응을 보이셨다는 삽화는 슬프다. 어떤 망각의 위세도 지울 수 없는 삶의 근원적 지점이 '엄마'와 '밥' 두 단어일 수밖에 없는 한 세대 한국 여성의 시간이 거기 있다. 그런데 노모의 기억이 이제 그녀의 어린 시절, 그러니까 열살, 다섯살, 세살 무렵으로 돌아갔다면 어째야 하나. 아들이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어머니 역시 어린 시절 들은 이야기일 테고, 그것은 그렇게 물려받고 물려준 세계일 것이다.
2015년 03월 13일 18시 07분 KST
세상의 다른 법칙 |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을

세상의 다른 법칙 |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을 보고

다르덴 형제는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사람들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그것이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아닌, 다른 법칙도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바로 그것이다."
2015년 01월 22일 15시 36분 KST
'통증의 형식'과 '공감의

'통증의 형식'과 '공감의 형식'

아픔과 슬픔이 많은 한해였다. 믿을 수 없는 바다 앞으로 직접 달려간 이들도 많았고, 광장은 애도와 나눔, 분노와 탄식의 마음으로 넘쳐났다. 그러지 못한 이들이라고 해서 마음이 달랐으랴. 혹한의 추위 속에 70미터 공장 굴뚝 위로 올라간 쌍용차 해고노동자 이창근, 김정욱 씨를 생각하며 잠시라도 따뜻한 잠자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테다. 그러나 사정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도 우리는 안다.
2014년 12월 25일 13시 13분 KST
울음에 대하여 | 「공산토월」과 작가회의

울음에 대하여 | 「공산토월」과 작가회의 40년

「공산토월」이 발표된 것은 1973년이었다. 이 울음은 아마도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깊고 강렬한 거절과 부정의 울음이자, 가장 넓고 세심한 껴안음의 울음이 아니었나 한다. 「공산토월」 발표 이듬해인 1974년 11월 18일 오전 10시, 서울 광화문, 지금의 교보빌딩 자리 의사회관 건물 앞에 이문구 고은 염무웅 박태순 황석영 등 30여명의 문인이 모여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01인 선언'을 발표한다.
2014년 12월 04일 14시 26분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