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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언

프로필
○ 생년월일 : 57년 3월 6일생
○ 출 생 : 서울 종로구 삼청동 157-13
○ 가족관계 : 부인과 1남 1녀

학력
○ 서대문 창서초등학교(1962~1969)
○ 배문중학교(1969~1972)
○ 경기고등학교(1972~1975)
○ 서울대 상대 무역학과 경제학학사 (1976~1980)
○ 미국 죠지타운대 공공정책대학원 정책학석사(1991~1993)
○ 국민대학교 대학원 행정학박사(2004년 졸업)
○ 한국방송통신대 영문과3학년(재)

경력
○ 행정고시 24회 합격(1980)
○ 정무장관실(1981)/체육부(1984)
○ 국무총리 제2행정조정관실 경제행정담당(1985)
○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비서관(1988)
○ 국무총리 제3행정조정관실 교통행정담당(1991)
○ 국무총리 정무비서실 정무,정보비서관(1994)
○ 국무총리 공보비서관(1999)
○ 서울시 정무부시장(2002.7~2003.10)
○ 제17대 국회의원 (2004.4~2008.4)
○ 서울 프로축구단 추진위원장
○ 국제 디지털대학교 초빙교수(2003.3~2004.8)
○ 강남대 대우교수(05.8.~06.8.31)
○ 재경 광주 ․ 전남향우회 회관건립추진위원회 위원 (05.1.1)
○ 제17대 대통령 한나라당 이명박후보 전략기획총괄팀장(2007.12)
○ 제17대 대통령 당선자 보좌역
○ 한나라당 국민소통위원회 위원장 (08.11~2010.8)
○ 2010.6.2 지방선거기획위원장(2010.2월)
○ 2010.6.2 지방선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스마트전략위원장
○ 한나라당 최고위원(10.7~11.5)
○ 저축은행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2011.6)
○ 여의도연구소 소장(2011.7~2011.11.8)
○ 국회정보위원회 위원(2010.10~)
○ 국회교육과학기술위원회 (2008.4~)
○ 국회기획재정위원회
○ 국회국방위원회
○ 국회기후변화특위위원(08.9~)
○ 국회 기후변화포럼 공동대표(09.2~14.6.25)
○ 한나라당 문화예술체육특별위원회 위원장(2010.9~)

국회
○ 제17,18,19대 국회의원(3선)
○ 국회 기후변화포럼 상임고문(14.6.25)
○ 한일의원연맹 경제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
○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15.7.24)

학계
○ 명지대 객원교수(2006.9.1~2015.1.31)

저서
○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 (2001. 5)
○ 최고의 정당 최악의 정당 (2006. 12)
○ 한국의보수, 비탈에 서다 (2011.10.10)

음반
○ 1집 - 정두언과 함께 떠나는 추억의 팝송여행 (2003. 10)
○ 2집 - 두 바퀴로 가는 행복 (2005. 9)
○ 3집 베스트앨범 (2006. 12)
○ 당신은 아름다워요 뮤직비디오 시사회 (07/9/10)
○ 4집 앨범 쇼케이스(09.9.30)
○ 4집 희망 -트로트앨범 (09.10월)
○ 5집 팝앨범
[정두언 회고록 연재를 마치며] 정권은 왜 매번

[정두언 회고록 연재를 마치며] 정권은 왜 매번 실패하는가

이 글을 통해 고백하는데, 나는 새누리당 국회의원이면서도 대선 투표에서 박근혜를 찍지 않았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나는 박근혜 후보의 검증 책임까지 맡고 있었기에 그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집권을 하면 나라가 어찌될까 심각하게 걱정을 했다. 오죽하면 그 당시 '박근혜와 최태민과의 관계가 드러나면 온 국민이 경악할 것이고, 박근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며칠 동안 밥도 못 먹을 것'이라고 얘기했겠는가. 불행히도 이 정권은 내 예상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흘러왔다. 그러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2016년 12월 23일 05시 18분 KST
[정두언 회고록] 24. 체포동의안 부결, 법정구속 그리고

[정두언 회고록] 24. 체포동의안 부결, 법정구속 그리고 무죄

감옥에서는 오후 5시에 밥을 먹고 5시 반부터 TV가 나왔다. 7시에 뉴스를 보고, 드라마 1편, 불후의 명곡을 보면 9시에 TV가 끊겼다. 일상이 그랬다. 그런 뒤 점호를 하고 공식적으로는 자는 시간이다. 하지만 보통 9시에 점호가 끝나면 이부자리 펴놓고 책을 보곤 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간은 평화의 시간이다. 평온 그 자체다. 출소하기 전날 밤 9시가 됐는데 감옥 동료 두 명이 나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이불을 깔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눈치를 보는 것이다. 내가 자정이 넘으면 출소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불을 깔라고 했다.
2016년 12월 20일 11시 06분 KST
[정두언 회고록] 23. 외고 개혁이 절반의 성공으로 끝난

[정두언 회고록] 23. 외고 개혁이 절반의 성공으로 끝난 이유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은 교총에서 반대하고 나선 점이다. 교총 회장이 TV토론에서 외고개혁에 반대하는 쪽 패널로 나왔다. 교총은 일반 교사들이 주축인데 그들을 대표하는 교총회장이 반대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조·중·동은 교총회장 말을 인용해 마치 전 교육계가 반대하는 것처럼 1면에 기사를 올리곤 했다. 당시 교총회장이 서울시 교육감에 출마한다고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이주호에게 얘기해서 교사들 자료를 달라고 했다. 교사들을 상대로 1000만원 가량의 비용을 들여서 여론조사를 했더니, 교사들은 외고개혁에 대해서 90% 이상이 찬성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일반인보다도 찬성비율이 더 높았다.
2016년 12월 16일 09시 31분 KST
[정두언 회고록] 22. MB정부의 경제정책이 실패한

[정두언 회고록] 22. MB정부의 경제정책이 실패한 이유

기업 하는 사람이 경제를 안다는 것은 결국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이명박이 경제를 안다? 지나고 보니 우스꽝스러운 얘기였다. 기업을 아는 것이지 경제를 아는 것이 아니다. 기업과 경제를 동일시하는 것은 지극히 초보적인 생각이다. 기업가 출신들은 친기업 정책을 쓰지 친국민 정책을 쓰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정책을 전환하면 거기에 맞는 사람을 써야 한다. 안 맞는 사람에게 그렇게 해보라고 하면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것이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이다.
2016년 12월 13일 11시 40분 KST
[정두언 회고록] 21. 자원외교, 무엇이

[정두언 회고록] 21. 자원외교, 무엇이 문제였나

외교 상식에서 자원외교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촌스러움의 극치다. 외교에 자원이라는 말 자체를 붙이는 게 넌센스이다. '나 자원외교 합니다'라고 얘기하고 자원외교 하는 게 어디 있나. 상대로 하여금 값을 올리게 하는 행위다. 예를 들면 '나, 너희 금 사러 간다. 그것도 대통령 형이 간다. 그리고 우리 실적 올려야 하는 것 알지?' 이런 식이다. 세상에 이런 외교가 어디 있나. 그쪽 나라 입장에서 보면 '아, 호구가 나타나는구나. 우리가 어떻게 말아 먹을까' 하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MOU를 맺고, 양로원이고 뭐고 다 짓도록 해놓은 다음 국유화 해버린다.
2016년 12월 09일 09시 59분 KST
[정두언 회고록] 20. 나는 왜 2010년 전당대회에 출사표를

[정두언 회고록] 20. 나는 왜 2010년 전당대회에 출사표를 던졌나

박형준 정무수석은 "형, 더 이상 청와대를 공격할 필요도 없어요, 박영준을 정리하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더 이상 국정농단에 대한 문제제기 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알았다. 그렇게 한다면 내가 더 뭘 하겠냐"라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박영준은 지경부차관으로 영전을 했다. 박형준 수석이 내게 허언을 했을 리는 없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낮의 대통령과 밤의 대통령이 따로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퍼져있을 때였다. 전당대회 기간 중에 국정농단 사건이 터졌다. 민주당은 박영준, 이영호 등 선진연대 핵심 인물들이 호텔에서 비밀 리에 상시 모임을 갖고 국정을 농단했다고 주장했다.
2016년 12월 06일 11시 10분 KST
[정두언 회고록] 19. 세종시 수정안은 왜

[정두언 회고록] 19. 세종시 수정안은 왜 실패했는가?

세종시 문제로 MB정권은 완전히 결딴이 났다. 수정안이 부결되면서 권력이 사실상 박근혜에게 넘어간 것이다. 정치적으로 의미가 굉장히 컸다. 박근혜가 완승을 한 것이다. 사실 박근혜는 세종시 문제와 관련해 MB를 꺾은 뒤 권력을 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박근혜는 처음에 아무런 입장표명을 안 하다가 갑자기 세게 치고 나왔다. 박근혜도 'MB가 무슨 대안이 있기 때문에 저럴 것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숨을 죽이고 한 달 가까이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김무성이 수정안에 찬성하고 나왔다. 거기에 별 호응이 없자, 박근혜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2016년 12월 02일 11시 25분 KST
[정두언 회고록] 18. 노무현 서거를 불러온 권력내부의

[정두언 회고록] 18. 노무현 서거를 불러온 권력내부의 음모

MB정부는 촛불사태 이후 국민통합이 아니라 상대방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갔다. 촛불사태를 겪고 난 뒤 저 사람들은 화해할 수 없는 세력이다, 그 핵심이 노사모이고 친노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사실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는 본질적으로 대통령 비자금의 영역을 건드린 것이다. YS나 DJ는 상대방의 비자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MB 정부는 수세에 몰리니까 상대방을 치기 위해 비자금 영역을 건드렸다. 그것을 기획한 인물이 B청장이다.
2016년 11월 29일 11시 58분 KST
[정두언 회고록] 17.권력사유화 파동의

[정두언 회고록] 17.권력사유화 파동의 전말

권력의 사찰은 참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나와 정태근처럼 한번 완전히 망가뜨리기 위해 사찰하기도 하고, 박형준처럼 MB 주변으로 못 들어오게 하기 위해 정보를 조작하기도 했다. 이진복처럼 일파들의 민원을 들어주기 위해 엉뚱한 사람을 조사하기도 했다. 다양한 목적으로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사찰을 한 것이다. 게다가 인사나 이권 민원을 잘 안 들어주는 사람들도 사찰했다. 그야말로 권력을 개인 물건처럼 남용한 것이다.
2016년 11월 25일 13시 25분 KST
[정두언 회고록] 16. MB정부 민간인 사찰의 겉과

[정두언 회고록] 16. MB정부 민간인 사찰의 겉과 속

이명박 정권에서 진행한 사찰의 목적은 지금까지 좌파세력을 발본색원하기 위해서라고 해명해 왔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했다. 물론 좌파를 발본색원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것도 넌센스다. 권력을 잡았으면 화합을 해서 다 끌고 가야지, 좌파를 발본색원 하겠다며 사찰을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냉전적 사고에 바탕을 둔 구태의연한 발상이다. 그러나 그것도 시늉에 불과했으며 사실은 다른 짓을 하기 위한 구실이었다. 자신들이 국정을 마음대로 농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찰을 활용했던 것이다.
2016년 11월 22일 07시 29분 KST
[정두언 회고록] 15. MB정부 인사실패의

[정두언 회고록] 15. MB정부 인사실패의 교훈

보통 일류는 공통적으로 자존심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자기 인사 문제로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그러지 않는다. 반면 삼류는 자기가 삼류인지 알기 때문에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뇌물도 갖다 바치고, 아부도 하고 그런다. 그러다 보면 대개 인사에서 삼류가 등용되기 쉽다. 그러다 결국 조직 전체가 다 삼류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MB의 정부 인사의 컨셉은 MB가 한 번이라도 겪었고, 또 MB 말을 잘 듣는 사람이라야 했다.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을 쓴 경우는 대개 주변 친인척이나 지기 등이 추천한 경우이다. 이런 식이다 보니 이도 저도 관계없는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훌륭해도 못 쓴다.
2016년 11월 11일 11시 39분 KST
[정두언 회고록] 14. 제18대 총선 한나라당 공천 작업의

[정두언 회고록] 14. 제18대 총선 한나라당 공천 작업의 내막

이재오와 이방호는 자신들의 앞날에 김무성이 매우 껄끄러운 존재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MB는 내게도 맹형규와 김무성은 날리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이방호는 그 당시 강창희 핑계를 대면서, 강창희와 서로 주고받기를 하다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해명을 했다. 여하튼 2008년 공천에서 재량권을 가장 많이 행사한 사람이 이방호였다. 다시 말해 그 당시 이방호가 부산 경남 지역에서 패권을 유지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본 큰 축이 김무성과 권철현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라인에 있는 사람들은 다 날라갔다.
2016년 11월 08일 07시 31분 KST
[정두언 회고록] 13. 한반도 대운하의 포기, 4대강 살리기로의

[정두언 회고록] 13. 한반도 대운하의 포기, 4대강 살리기로의 전환

사람은 한번 성공한 것을 또 써먹으려고 하는데, 두 번째까지 성공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처절한 실패를 맛보는 경우가 많다. MB도 청계천(물)으로 성공한 후 대운하(물)로 다시 더 큰 성공을 해보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청계천과 대운하는 규모도 다르고 성격도 달랐다. 예를 들어 서울시가 우리나라의 반이면, 청계천을 성공했으니 대운하는 난이도로 볼 때 청계천의 두 배 정도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운하의 난이도를 정치적으로 보면 청계천의 두 배가 아니라 100배 정도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MB는 이 문제를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 같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2016년 11월 04일 11시 21분 KST
[정두언 회고록] 12. 남북관계를 절단 낸 비밀

[정두언 회고록] 12. 남북관계를 절단 낸 비밀 접촉

그 동안 전임 정부들이 만들어놓은 수많은 대북 라인 가운데는 살려야 할 라인, 죽여야 할 라인 등이 있었을 것이다. 장단점을 검토하고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시각에서 대처했어야 하는데 이런 과정도 없이 한순간에 대북라인이 무너졌다. 대북 라인에 종사했던 귀중한 자산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국가적인 손실이다. 통일 문제, 대북 문제, 남북 협력 문제 등을 도모할 수 있는 기초적인 인적 자산들이 사라졌다. 이로 인해 이후 MB 정부의 대북정책은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쓸데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MB 대통령의 취임식에 북측에서 온 특사가 참석했다면 MB 정부 5년의 남북관계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2016년 11월 01일 11시 43분 KST
[정두언 회고록] 11. 인수위 시절의 어두운

[정두언 회고록] 11. 인수위 시절의 어두운 비화들

인수위가 출범하면서 당선인 비서실 쪽에서 인사 작업을 한 사람은 나와 김원용, 박영준 세 명이었다. 그런데 한 일주일 정도 지나니 나는 내심 겁이 나기 시작했다. 막상 인사 작업이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다 보니 '인사를 이렇게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자면 내가 잘 아는 인물이 청와대 수석비서관으로 거론됐다. 나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뻔히 알기 때문에 황당했다. 이런 인물이 무슨 청와대 수석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인사를 하면 큰일 나겠는데' 하는 걱정이 앞을 가렸다.
2016년 10월 28일 12시 33분 KST
[정두언 회고록] 10. 백해무익한 정권

[정두언 회고록] 10. 백해무익한 정권 인수위

선거 캠프에는 주로 뚜렷한 자기 일이 없고, 전문성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자기 일에 바쁜 사람들이 캠프에 올 여유가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캠프에 있다가 다 인수위에 들어와 유세를 피우고, 공무원들은 그 사람들 눈치 보느라 찍 소리도 못하는 게 현실이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힘이 센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가. 사람들은 대통령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대통령 당선자다. 모든 민원, 청탁, 인사, 관심이 대통령 당선자에게 몰린다. 그러니까 과시하고 싶어진다. 이것을 보여주는 과정이 인수위 과정이다. 거기 모여 있는 사람들도 '나도 이제 측근이다, 실세다' 하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발산하는 장이 되어버린다. 그런 것을 왜 만드는가.
2016년 10월 25일 10시 39분 KST
[정두언 회고록] 9. 대선캠프의

[정두언 회고록] 9. 대선캠프의 변질

이상득은 임태희를 후보 비서실장으로 앉힌 뒤 원로자문그룹이라는 '6인회'를 내세워 현안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사실 '6인회'는 실권이 있는 모임은 아니었다. 모양 갖추기에 불과했다. 이상득이 혼자 개입하기 뭐하니까 모양새를 갖춰서 슬쩍 물타기 하고 들어와서 관여를 하려고 만든 것이다. 김덕룡이나 박희태가 역할을 했다면 얼마나 했겠나. 이를테면 내가 선대위 안을 짤 때도 이상득, MB에게 승인을 받은 후 6인 회의를 소집해서 마치 거기서 결정한 것처럼 하는 식이었다.
2016년 10월 21일 06시 57분 KST
[정두언 회고록] 8. 왜 모든 정권은 비슷한 몰락 과정을

[정두언 회고록] 8. 왜 모든 정권은 비슷한 몰락 과정을 거치는가

실세 주변에 사람이 몰리게 마련이다. 그리고 견제 받지 않는 권력실세 주변에서 그를 호가호위하는 사람들이 매번 되풀이 되는 낙하산 인사와 국정농단의 주역들이 된다. 역대 대선마다 이런 문제가 되풀이 되면서 낙하산 인사로 이어지고, 각종 이권 청탁으로 이어졌다. 노태우-박철언, 김영삼-김현철, 김대중-세 아들, 노무현-노건평, 이명박-이상득으로 이어지는 역대 정권 권력실세의 계보와 그 운명이 이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2016년 10월 18일 10시 29분 KST
[정두언 회고록] 7. 대선승부의 최대 걸림돌 'BBK

[정두언 회고록] 7. 대선승부의 최대 걸림돌 'BBK 사건'

대선 막바지에 MB 스스로 BBK가 자기 회사라고 말했다는 소위 '광운대 동영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이 나타나 여기저기 접촉을 하고 다녔다. 내게는 시민단체에 있는 지인을 통해서 '누가 그런 것(광운대 동영상)을 가지고 있는데 팔겠다고 한다'며 연락이 왔다. 나는 박재성을 불러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고 그들을 만나도록 했다. 일당은 3인조로 파악됐다. 우리는 생각했다. '이들이 분명 정동영 후보 쪽에도 갔을 텐데 그들은 왜 사지 않았을까? 샀다면 왜 공개를 안 할까?'
2016년 10월 14일 11시 16분 KST
[정두언 회고록] 6.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제

[정두언 회고록] 6.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제 "이런 사람은 안 된다" 기자회견

하이라이트는 조순제였다. 조순제는 최태민의 의붓아들로 최태민의 마지막 부인이 데려온 아들이다. 과거에 문공부장관 비서관도 지낸 조순제는 박희태, 최병렬과 동년배 지기라고 알려져 있다. 똑똑한 사람이었다. 최태민은 공식적으로 아들이 하나도 없었다. 다 딸이었다. 데리고 있는 아들이라고는 의붓아들 조순제 밖에 없다. 청문회장에서 강훈 변호사가 박근혜에게 물었다. "박근혜 후보는 조순제씨를 아십니까?" 박근혜가 "모릅니다."라고 했다. TV를 보고 있던 나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설마 박근혜가 조순제를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2016년 10월 11일 10시 11분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