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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8월 30일 07시 01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8월 30일 14시 12분 KST

굿바이 '뽀샵'

이희욱의 휴머놀로지

(...) 무심히 그 손가락으로 유리창에 선을 긋자, 거기에 웬 여인의 한쪽 눈이 뚜렷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놀라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 알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건너편 좌석의 여인이 비친 것이었다. 바깥엔 어둠이 내려 있고, 기차 안은 불이 켜져 있다. 그래서 창유리가 거울이 된다.

소설 <설국>의 주인공은 터널을 지나며 낯설고 서정적인 눈의 나라로 들어선다. 몽환적인 소설 배경만큼이나 그 표현 또한 매혹적이기 그지없다. 창문 수증기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닦아내자 거짓말처럼 둥실 떠오른 여인의 눈. 창문에 비친, 반대편에 앉은 여인의 잔영을 이토록 세심하게 묘사한 글이 또 있었던가.

하지만 사진을 찍는 이에겐 잔영이 성가신 훼방꾼일 따름이다. 불현듯 마주한 멋진 풍광을 오롯이 담아내려는데 유리창이 앞을 막아선다면? 편광필터를 써보고, 각도를 요리조리 바꾸고, 렌즈를 유리창에 딱 붙이고 셔터를 눌러도 소용없다. 사진 한 귀퉁이엔 어김없이 유령 같은 잔영이 희미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일일이 '뽀샵'으로 지워줘야 할까. 구글과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과학자들이 이 유령을 말끔히 지워주는 '퇴마사'로 나섰다.

티앤팬 주, 마이클 루빈스타인, 쓰 리우, 윌리엄 프리먼은 사진 속 픽셀을 분석해 잡티를 제거하는 기존 방식은 원본 훼손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그 대신 시퀀스(장면)를 분리하기로 했다. 마치 짧은 동영상을 찍듯 5프레임짜리 사진을 찍은 뒤, 각 프레임을 분리해 방해물이 되는 장면만 걷어내보자는 얘기다. 발상 자체는 새롭지 않다. 하지만 이들이 실험에서 보여준 결과는 이전과 사뭇 달랐다. 이들은 여러 차례 실험에서 유리창에 비친 잔상을 거의 완벽하게 분리해 지웠다. 심지어 유리창에 가려 흐릿했던 배경도 이들이 만든 알고리즘을 통과하자 더욱 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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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에 비친 잔상만 제거해주는 건 아니다. 피사체를 가로막고 서 있는 철조망이나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도 감쪽같이 지워준다. 특별한 도구나 장비를 쓴 것도 아니다. 흔히 쓰는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은 뒤 이들이 고안한 알고리즘만 적용했을 뿐이다. 동물원 우리 속 호랑이 사진도 쇠창살을 걷어내자 마치 눈 앞에서 찍은 듯 생생하게 포효했다. 영화 속 과학수사대의 범죄 현장 복원 장면이 무색할 정도다. 이들은 연구 결과를 8월9~13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시그래프 2015'에서 공개했다.

불가능해 보이던 사진의 영역에 도전한 사례는 여럿이다. 리트로가 2011년 6월 처음 선보인 사진 기술도 혁명에 가까웠다. 리트로의 '라이트필드 포토그래피' 기술은 사진 속 초점을 자유자재로 바꾸게 해준다. 원리는 간단하다. 일반 카메라 렌즈는 피사체에서 반사되는 빛의 일부만 받아 사진을 찍는다. 이 과정에서 렌즈 굴곡에 의해 걸러진 빛은 흐리게 표현되고, 받아들인 빛은 또렷한 물체로 찍힌다. 라이트필드 기술은 피사체가 반사하는 빛을 전부 받아들여 이미지로 저장한다. 그런 다음 나중에 원하는 대상만 또렷하게 표현할 수 있게 돕는다. 사진부터 찍고, 초점은 나중에 맞추는 셈이다. 라이트필드 기술은 심지어 평평한 사진을 3D 입체사진으로 바꿔주기도 한다. 리트로 갤러리를 방문하면 예제 사진들을 대상으로 직접 초점을 자유롭게 바꿔볼 수 있다.

리트로는 라이트필드 기술을 적용한 디지털카메라를 2014년 4월부터 판매 중이다. 가격은 1299달러, 우리돈 150만원이 조금 넘는다. 아쉽게도 아직은 미국 지역만 배송해준다.

'폰카'가 1천만 화소를 가볍게 넘기는 시대다. '대포'를 어깨에 줄줄이 멘 아마추어 동호회를 만나는 일도 어렵잖다. 장비는 발전하고, 기술은 정교해졌다. 누구나 큰 힘 들이지 않고 그럴듯한 사진을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게 됐다. 힘들게 찍은 사진이 '핀트'가 나가 마음 상할 일도 없어질 모양이다. 머잖아 '뽀샵'에도 작별을 고할 날이 오리니.

*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