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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2월 10일 09시 54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2월 11일 14시 12분 KST

따뜻한 혁신의 탄생

혁신. 요즘엔 길거리 돌멩이보다 흔한 단어가 됐지만, 여전히 가슴 뛰는 말이다. 현재 지구상에서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그를 떠올린다. 마누 프라카시. 미국 스탠퍼드대학 교수이자 생명공학자다. 그가 내놓은 혁신은 애플의 스티브 잡스나 전기자동차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말하는 혁신과 다르다. 프라카시의 혁신엔 복잡한 설계나 첨단 디지털 기술은 없다. 세심한 관찰, 사람을 향한 배려,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존중이 혁신을 만들어낸다. '따뜻한 혁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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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려 현미경 '폴드스코프'

'폴드스코프'가 그랬다. 프라카시는 아프리카 주민들이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에 속절없이 당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누구나 손쉽게 말라리아균을 확인할 수 있는 현미경을 만들었다. 플라스틱이나 금속 대신 현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종이'를 재료로 선택했다. 누구나 종이접기하듯 만들 수 있는 현미경, 폴드스코프는 그렇게 2012년 탄생했다. 제작비는 단돈 1달러(약 1천원) 남짓이다. 폴드스코프는 최근 크라우드펀딩 '킥스타터'에서 모금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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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 프라카시는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이 단돈 200원으로 말라리아균을 분리할 수 있는 원심분리기를 개발했다. '혁신'은 기계의 차가움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 제공

두 번째 혁신의 불씨는 2013년에 지펴졌다. 프라카시는 우간다 지역 의료센터를 방문 중이었다. 우연히 그곳 주민이 문이 닫히지 않게 괴어둔 물건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원심분리기였다. 방문지 곳곳에서 수백만원의 장비들이 고장 나도 수리를 못해 방치돼 있었다. 그는 두 번째 숙제를 찾았다. 프라카시 교수는 손쉽게 쓸 수 있는 의료용 원심분리기를 만들기로 했다. 혈액을 넣고 빠른 속도로 돌리면 원심력으로 혈액 속 성분을 분리해주는 기기 말이다. 기존 원심분리기의 가격은 수백만원이었다.

어떻게 값싸고, 성능 좋고, 현지에서도 쉽게 쓰는 원심분리기를 만들 수 있을까. 연구팀은 처음엔 장난감 '요요'를 활용했다. 그런데 돌리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고, 회전 속도도 느렸다. 1년 넘게 요요에 매달렸지만 연구는 진척되지 않았다. 그러다 한 팀원이 실팽이를 떠올렸다. 가운데 구멍이 2개 뚫린 동그란 물건에 실을 꿰고 실 양쪽을 잡고 늦췄다 당기면, 윙윙 소리를 내며 빠르게 돌아가는 장난감 팽이 말이다. 프라카시 교수팀은 실팽이를 응용해 혈액 성분을 분리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페이퍼퓨지'다.

페이퍼퓨지는 겉보기엔 장난감 실팽이와 똑같다. 원반과 실, 손잡이가 전부다. 원반에 혈액을 담은 작은 튜브가 달려 있다. 원반 구멍으로 끈을 관통시키고, 양쪽 손잡이를 당겼다 늦추길 되풀이한다. 그러면 가운데 원반이 회전하며 혈액 속 성분을 분리해낸다. 회전 속도는 최대 분당 12만5천 회(rpm)다. 일반 실험실에서 쓰는 원심분리기 '스탯스핀MP'의 최대 속도는 2만rpm이다. 연구진은 페이퍼퓨지를 이용해 15분 만에 혈액에서 말라리아균을 분리해냈다. 페이퍼퓨지의 무게는 2g. 전원 공급이 필요 없고, 작고 가벼워 운반도 편리하다. 조작도 쉽다. 페이퍼퓨지에 쓰인 원반은 폴리머 필름을 이용한 합성종이로 만들었다. 폴드스코프를 만들 때 쓴 것과 같은 재질이다. 잘 찢어지지 않고 방수도 된다. 제작비는 단돈 2센트(약 200원)이다. 상업용 원심분리기의 1만5천 분의 1 가격이다.

폴드스코프와 페이퍼퓨지는 같은 자양분을 먹고 자랐다. 공존과 공감이다. "지구상에는 전기나 기간시설, 도로 없이 사는 사람이 수십억 명에 이른다. 그들도 당신과 똑같은 건강 문제를 안고 있다." 프라카시 교수팀은 지난 1월, 페이퍼퓨지 연구논문을 <네이처>에 공개했다. 페이퍼퓨지는 이제 걸음마를 뗐지만, 벌써부터 다음 혁신이 기다려진다.


*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된 글입니다.


페이퍼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