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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02일 06시 44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0월 02일 14시 12분 KST

진짜 어른과의 연애 『남자의 일생』

츠쿠미는 미모의 대기업 회사원이다. 편견이나 구김살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지나치게 꼼꼼하고 착실한 생활방식이 그녀의 매력을 깎아 먹을 지경이다. 그녀의 유일한 약점은 지나간 사랑에 대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다는 것 하나뿐. 츠쿠미를 좋아하는 남자는 많지만 그녀가 지난 사랑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주고 기다려줄 수 있는 남자는 흔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에다는 기다렸고, 그녀의 상처에 대해 이것저것 묻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과거가 아닌 현재를 믿는 사람이며, 사랑이 미련보다 힘이 세다는 걸 믿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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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일생』 | 니시 케이코


연애할 땐 안 보이던, 이별 직후엔 짐작도 못했던 애인의 단점이 시간이 지나 문득 '그래, 그런 놈이어서 날 그렇게 대했던 거야'하는 식으로 상기될 때가 있다. 그때부터 여자들은 얼마쯤 자신의 취향을 내려놓고, '안정적인 남자'를 찾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꿈꾸던 매력적인 연애를 포기했음에도, 안정적인 남자를 원하면서부터 연애가 부쩍 힘들어지는 것을 느낀다. 특별한 사랑을 포기하면 선택지가 더 넓어질 줄 알았는데 어쩐지 따져보아야 할 것들만 잔뜩 많아진 느낌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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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안정적'이라는 말은, 탄탄한 직업에 경제력 있는, 모나지 않은 성격의 남자들을 통칭하는 의미다. 특히, 뜨거운 연애만을 좇다 실패를 거듭해 온, 그래서 이제는 좀 편한 남자와의 연애를 꿈꾸는 여자들에겐 이 '안정적'이라는 말이 어떤 식으로든 더욱 절실하다. 남자의 허벅지 근육이나 립서비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시들해지고, 그렇다고 세속적인 조건 백날 따져봤자 나이든 기분만 들고, 이렇게 연애는 점점 더 힘들어진다. 먹고 사는데 문제없는 남자라는 조건이 안정적인 연애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도 역시 문제. 니시 케이코의 『남자의 일생』은 불행한 연애에 지친 30대 중반의 츠쿠미가 안정적인 남자에게 사랑받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츠쿠미의 우울한 연애감정이 아니라, 츠쿠미가 결국 사랑해버리는 50대의 미중년 카이에다 쥰의 일생이다. 그의 일생이 그가 사랑하는 방식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방식이 우리에게 어떤 위로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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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질 짜는 그녀에게 던지는 카이에다의 말은 위로가 아닌 일갈



"건강하면 됐어. 건강하면, 나머진 어떻게든 되거든"


어렸을 땐 어른들이 "말 안 해도 다 안다"며 서로를 위로하거나 "왜 있잖아, 그런 거..." 라는 말로 맥락을 잘라먹고도 대화를 잘 이어가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그리고 몇 마디 말로 생략된 이야기들이 너무나 궁금했다. 하지만 물어보진 않았던 것 같다. 때론 그렇게 생략된 말들이 어떤 불행한 일을 덮어두는 얇은 막이라는 걸 어린 나 역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제법 나이를 먹은 지금도 어른들의 그런 '짐작과 생략'의 대화방식을 익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슬퍼하는 누군가의 앞에서, 그의 슬픔을 짐작하고 말을 아끼는 대화법 같은 거. 그런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는 정말 말로만 쉽다. 어쩌면 말하지 않아도 아는 건, 결국 그냥 모른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어른들이 '짐작'했던 건 슬픔을 유발한 사건의 구체성이 아니라 슬퍼하는 사람의 마음 정도가 아니었을까. 어쨌든 누구나 비슷한 일을 겪으며 살아가니까 말이다.

만화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딴 여자들에게 자꾸만 한눈을 파는 남자와 결혼한 츠쿠미의 친구 미사키가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다른 남자를 만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친구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츠쿠미는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런 사정을 알 턱이 없는 남주 카이에다가 츠쿠미에게 무심코 미사키의 안부를 묻는다. "미사키는 건강해?"라고. 그리고는 다음처럼 덧붙인다. "건강하면 됐어. 건강하면, 나머진 어떻게든 되거든." 놀라운 건 이렇게 조금 맥락 없어 보이는 그의 말이 츠쿠미에게 위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마 불행에 처한 미사키도 이 말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위로받았을 것이다. 그게 어떤 불행이든 건강한 몸으로 견뎌낼 수만 있다면, 어쨌든 불행에 맞서 우리는 잘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츠쿠미가 죽고 싶다고 말하자 치우기 쉽게 죽으라며 70L 쓰레기봉투를 던지던 카이에다는 불행의 정체를 잘 알고 있는 어른이다. 그는 츠쿠미의 말에서 어디까지가 진짜 감정이고 어디서부터가 어리광인지를 안다. 카이에다는 츠쿠미가 자기 불행을 충분히 감당하리라는 것도, 그녀가 불행 앞에서 여전히 건강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진짜 어른이기 때문이다. 그의 삶에서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그는 많은 생각들 가운데 그의 생활과 마음을 가장 안정적으로 붙들어주는 생각을 고르며 살아왔을 것이고, 그런 경험들이 그를 어른으로 만든 것이다. 물이 마시고 싶다는 간단한 요청에 "상표는 뭐? 국산? 외국 거? 츠쿠미, 에비앙 마시지? 마침 저기 자판기에..."라며 호들갑을 떠는 남자가 결코 어른은 아니니까. 자기감정을 대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츠쿠미가 카이에다에게 안정감을 느끼는 것은 그가 무거운 것은 무겁게 가벼운 것은 가볍게 대할 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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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해줘라..."


츠쿠미는 미모의 대기업 회사원이다. 편견이나 구김살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지나치게 꼼꼼하고 착실한 생활방식이 그녀의 매력을 깎아 먹을 지경이다. 그녀의 유일한 약점은 지나간 사랑에 대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다는 것 하나뿐. 츠쿠미를 좋아하는 남자는 많지만 그녀가 지난 사랑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주고 기다려줄 수 있는 남자는 흔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에다는 기다렸고, 그녀의 상처에 대해 이것저것 묻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과거가 아닌 현재를 믿는 사람이며, 사랑이 미련보다 힘이 세다는 걸 믿기 때문일 것이다.

카이에다는 우연을 운명으로 바꿀 줄 아는 남자다. 장례식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운명으로 이끌었다. 카이에다는 신뢰를 주는 남자다. 츠쿠미보다 그녀의 친구와 가족들에게 먼저 괜찮은 남자임을 인정받았다. 카이에다는 조용히 공부하는 남자고 또 요리도 잘하는 남자다. 그리고 무심한 듯 모든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그렇게 침묵하다가도 필요할 땐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여자를 힘껏 안아주기도 한다. 카이에다는 츠쿠미에게 거의 한눈에 반했고 그녀를 사랑한다.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보면 곧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 그가 추구하는 행복의 형식이 있다.


『남자의 일생』은 전 3권으로 막을 내린다. 4권은 츠쿠미와 카이에다가 사랑을 확인한 이후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4권이 옴니버스 방식으로 구성되었음에도 여전히 재밌는 까닭은, 소외되었던 등장인물들 각각의 삶을 한 번씩 되짚어 주고, 베일에 쌓여있던 카이에다의 과거를 상당 부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4권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츠쿠미가 카이에다를 사랑할수록 질투와 불안의 감정을 느끼는 에피소드다. 물론 이 감정은 대체로 발랄한 분위기를 통해 다루어지지만, 츠쿠미가 자기 불안을 떨칠 수 있도록 매사 솔직한 태도를 유지하는 카이에다의 모습에 『남자의 일생』의 주제라 할 만한 것이 담겨 있다.

카이에다에게는, 츠쿠미가 겪은 옛사랑에 비해서도 훨씬 더 깊고 고통스러운, 지나간 사랑의 기억이 있다. 그 사랑이 끝났을 때 그는 이런 식으로 자기 절망을 표현했다. "이젠 이것으로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도 된다"고. 심상치 않은 가정환경을 자기만의 삶의 방식으로 극복했고, 사랑의 다양한 형태를 경험하며 그만큼 다양한 이별을 이겨내 온 것이다. 카이에다는 행복이란 게 결코 화려한 것이 아님을 잘 안다. 거실에 누워 츠쿠미의 발목을 손에 쥐는 것, 츠쿠미의 눈을 보며 그녀가 궁금해 하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그녀를 의심하지 않고 의심받지도 않으며 서로를 불안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 그런 안정감을 주고받는 가운데 그는 충분히 행복하다고 느낀다.

아마도 마지막이 될 친아들과의 만남에서 카이에다의 아버지는 카이에다의 결혼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는 짧게 "잘 해줘라..."라는 말을 남긴다. 카이에다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적다. 그에게 매 순간은 흔들려선 안 될 소중한 시간이다. 거짓말할 시간도 변명할 시간도 없으며 작은 일로 호들갑을 떨거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도 그의 선택지엔 없는 것 같다. 연락 없이 카이에다가 귀가하지 않아도 츠쿠미는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가 사랑하는 방식을 알고 그 방식을 믿으며 그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의 곁에 있고, 있어야 할 곳에서 서로를 잘 대하는 게 사랑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안다. 진짜 어른과 연애하는 동안에 츠쿠미도 진짜 어른이 되어 간다.


글. 김잔디/에이코믹스 필진


* 이 글은 에이코믹스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