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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1월 12일 04시 47분 KST

"일에 잡아먹힌 타임푸어...억울해서 TV 보고 게임이라도 해"

2년차 직장인 김지명(가명·28)씨의 컴퓨터는 아침마다 파란빛을 내며 번쩍인다. 새벽까지 게임을 붙들고 있다가 제대로 컴퓨터를 끄지도 못한 채 잠들기 때문이다.

경기도의 한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그는 만성적 야근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달 그는 평균 자정까지 회사에 남아 야근을 해야 했다. 인사평가로 업무량이 늘었지만, 상사는 “주말까지 이것 좀 마무리해줘”라는 식으로 업무를 그에게 몰아줬기 때문이다.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면 새벽 0시30분. 혼자 사는 김씨가 밀린 집안일을 하고 씻고 잘 준비를 마치면 어느덧 1시를 훌쩍 넘겼다. 다음날 출근을 위해 잠에 들어도 부족할 시간이지만, 김씨는 이 상황이 “억울했다”. 노곤한 몸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1시간가량 온라인게임 ‘오버워치’를 붙잡는 이유다. 막상 게임을 시작해도 눈꺼풀이 감기기 일쑤다. 하지만 마우스를 놓을 수 없었다고 김씨는 말했다. “자고 일어나면 바로 출근이니까요. 일이 나인지, 내가 일인지 헷갈리는 게 무서워요.” 새벽녘 알람 소리에 눈을 떴을 때 문득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왔다. “왜 이러고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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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열에 일곱 “나는 타임푸어”

김씨는 전형적인 ‘타임푸어’(시간빈민)다. 타임푸어는 직장 업무, 가사일 등 노동시장 안팎에서의 노동량에 과부하가 걸려 시간에 대한 본인의 통제 수준이 낮은 상태를 뜻하는 용어다.

광고업체에 다니는 최수연(가명·26)씨는 담당 기업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운영하고 홍보 콘텐츠를 기획한다. 소규모(15명)로 일하다 보니 여러 회사의 홍보 업무를 맡는다. 화장실 가는 시간도 부족해 잔뇨감에 시달린다는 그에게 초과근무는 어느덧 일상이 됐다. “정시퇴근한 게 지난 7개월 동안 딱 두 번뿐이었어요.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새벽 3시에 퇴근한 날도 잦았으니까요.” 보통 밤 11~12시께 귀가한다는 최씨는 “뭐라도 해보려고” 애쓴다. “침대에 누우면 하루가 너무 아쉬운 거예요. 일이 나를 먹어버린다는 생각이 드니까 텔레비전이라도 30분간 틀어놓다가 잠드는 거죠.” 경기도의 한 제조업체에서 회계업무를 담당하는 장진영(가명·33)씨의 삶도 다르지 않다. 장씨는 지난해 3개월 가까이 매일 야근에 시달렸다. 장씨가 석달 30여만원에 헬스장 등록을 하고도 10번밖에 못 나간 이유다. “삶에 안정감을 주는 ‘정기적인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새벽 1시 취침 전까지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찾아보는 것이 장씨가 생각하는 ‘내 시간’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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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20·30대 직장인 1162명을 대상으로 5일간 온라인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 10명 중 7명(70.9%)이 자신을 ‘타임푸어’라고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간이 부족하면 자연스레 대인관계·취미활동부터 포기하게 된다. 이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은 ‘타임푸어이기 때문에 포기한 것(복수응답)’으로 ‘체력·건강관리’(49.6%) △대인관계(46%) △자기계발(37.5%) △충분한 휴식(37.3%) 등을 꼽았다.

노혜진 케이시대(KC·옛 그리스도대학교) 교수(융합산업학부)는 “시간에서도 위계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지위가 낮은 사람의 경우 자신의 시간을 주도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며 “시간은 소득과 함께 인간의 삶의 질을 여실히 보여주는 데이터이기 때문에, 시간에 대한 통제력 부족은 삶의 질 저하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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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타임푸어’들 탈출 꿈꾼다

일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이들은 ‘워라밸’(‘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의 줄임말. 일과 삶의 균형)을 꿈꾼다. 그러나 임금체계를 바꿀 수도, 상사의 업무지시를 어길 수도 없는 이들에게 선택지는 탈출, 즉 ‘퇴사’뿐이다.

중국 국적의 왕아무개(30)씨는 지난해 여름 3년 동안 다니던 디자인회사를 그만뒀다. 대학생 시절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방문했다가 ‘열정적으로 일에 몰두하는’ 한국인들의 문화에 감탄한 것이 계기가 돼 2012년 한국에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새벽 2~3시 택시를 타고 귀가하는 초장기 노동에 시달리다 퇴사를 택했다. 왕씨는 “고정 수입이 없어 불안하긴 하지만, 아르바이트하면서 디자인·한국어 공부를 하는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20·30대를 중심으로 퇴사는 일종의 ‘트렌드’가 됐다. 2016년 12월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신입사원 채용실태 조사’를 보면, 대졸 신입사원 4명 중 1명(27.7%)이 1년 내 회사를 그만뒀다. 간호사 하수연(가명·28)씨도 지난달 30일 병원에 사표를 던졌다. 새벽 6시부터 매일 오후 6시까지 평균 12시간 근무했다는 하씨는 지난겨울 출근을 앞둔 일요일 저녁 문득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산사태로 집이 무너졌으면 좋겠다.” 우울감에 시달리던 하씨는 결국 병원을 관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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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사회>의 저자인 최태섭 문화평론가는 “청년 세대들은 취미와 적성을 찾아서 능동적으로 일하고 싶다는 노동관이 높은데, 실제 일터는 전혀 다른 분위기”라며 “정년을 보장받는 등 직장이 보장할 수 있는 메리트가 갈수록 줄어들면서 직장에 헌신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게 된 셈”이라고 말했다. 정병욱 변호사(과로사예방센터)는 “과로로 인한 우울감, 건강악화 등을 줄여나가려면 장시간 노동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 법정 근로시간 단축 등을 계기로 장시간 노동을 당연시하는 인식부터 변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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