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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2월 12일 13시 43분 KST

위안스카이는 엉뚱하게 권력을 잡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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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쉽지 않다. 일단 잡기가 쉽지 않고, 유지하기는 더욱 어렵다. 권력을 손에서 놓은 후 높은 평가를 받기는 더더욱 어렵다. 역사 속에서도 이런 일은 흔했다. 대표적인 것이 중국 신해혁명 후 상황이다. 만주족 왕조였던 청나라를 무너뜨린 것이 1911년 10월 10일 후베이 성 우한에서 시작된 신해혁명이다. 중화민국의 시작이었다. 청은 무너져 내렸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런데 권력은 정작 엉뚱한 인물이 잡았다. 구한말 우리 역사에 깊숙이 개입했던 위안스카이가 그 주인공이다. 공화 혁명과 아무 관계 없던 이가 권력을 잡은 것이다. 그는 어떻게 권력을 쥐게 되었으며, 그 권력은 순조롭게 유지되었을까? 2017년 대선을 치르게 될 우리가 권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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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안스카이는 공화 혁명 진압 책임자였다.

yuan shihkai

“청의 조정은 새로 육성한 신식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막으려 했다. 군부의 최고 실력자인 위안스카이가 총리대신을 겸하고 혁명군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전투는 치열하지 않았다. 혁명군이나 진압군 모두 국가의 분열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혁명군 내부에는 ‘만주족 왕조를 타도하고 공화 정부를 수립한다면, 위안스카이를 대총통으로 추대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 1912년 1월 1일, 이들은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 정부를 선포했다. 위안스카이는 황제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조건으로 대총통 자리를 쑨원에게 이양받았다.” (책 ‘처음 읽는 중국사’, 중국역사교사모임 저)

혁명이 성공했다고 해서 반드시 혁명 주체가 그 과실을 가져가는 것만은 아니다. 중국 신해혁명이 그랬다. 반민주적이고, 반공화주의적이었던 위안스카이에게 그 과실이 돌아갔다. 국가 분열을 막고 적당히 타협을 통해 빠른 시일 내에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혁명 주체들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하지만 훗날 위안스카이 때문에 상당히 애를 먹게 된다.

2. 대총통 위안스카이는 공화제를 흔들었다.

yuan shihkai

“1912년 3월,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서 임시 대총동에 취임했다. 자신의 심복을 총리대신으로 삼았으나, 10명으로 구성된 내각에는 혁명파 동맹회원도 4명 포함되어 있었다. …. 1913년 2월에는 여러 정당이 참가한 선거가 치러졌다. …. 위안스카이는 처음부터 혁명파와 권력을 나눈다거나, 민주 정치를 할 생각이 없었다. 선거에서 승리한 정당 지도자를 암살하고 당을 해체했으며, 국회와 지방 의회를 해산해 버렸다. 그러고는 스스로 황제가 되려 했다.” (책 ‘처음 읽는 중국사’, 중국역사교사모임 저)

애초에 위안스카이는 민주정치를 할 생각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권력욕을 충족시킬 방법만 찾아 나섰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민주정을 꾸려나가려니 많이 답답함을 느꼈다. 때가 되었다고 여기자 바로 실행에 옮겼다. 황실을 무너뜨린 혁명 끝에 대총통 자리에 앉는 자가 다시 황제가 되겠다고 나선 것이다. 강한 반발에 부딪치자 위안스카이는 무리수를 둔다. 일본과 손을 잡는다.

3.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yuan shihkai

“1915년 1월, 황제가 되려는 위안스카이에게 일본이 손을 내밀었다. 일본은 위안스카이를 지원하는 대신 옛 독일이 차지했던 지역을 넘겨 달라는 내용의 이른바 21개조 요구를 내밀었다. 그것은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내용이었다. 위안스카이는 결국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반대 세력을 억누르고 황제가 되겠다고 나섰다. 유교적 전통을 강조하며 한껏 황제의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황제가 되려는 계획은 성공할 수 없었다. 공화제를 실현하려던 이들은 물론이고 독재를 뒷받침했던 그의 부하들조차 반대했기 때문이다. …. 결국 위안스카이는 황제가 되려는 것을 포기하고 낙심 끝에 세상을 떠났다.” (책 ‘처음 읽는 중국사’, 중국역사교사모임 저)

위안스카이는 대의명분이 없었다. 권력욕만 앞섰지, 국가를 어떻게 다스리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다. 운이 좋아서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짧게 밖에 권력을 누리지 못한 이유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며 무리를 해서 일본과 손을 잡았다. 자연스럽게 반대 세력은 점차 강력해지고, 지지 기반은 약해졌다. 끝내 위안스카이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