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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2월 05일 12시 40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2월 05일 12시 41분 KST

이솝우화를 삐딱하게 읽어보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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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한 번쯤은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읽거나 들어본 적이 있다. ‘토끼와 거북이’, ‘해와 바람의 내기’ 같은 우화들은 만약 이야기가 아니라 뼈였다면 사골 국물이 우려져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많이 읽혀졌고 또 지금도 읽혀지고 있다. 그렇지만 어른이 되어서까지 우화를 읽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런 이야기들이 뻔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건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우리가 인기 드라마를 보며 창작자의 의도와는 다른 인물에 확 꽂혀 주인공을 미워하기도 하는 것처럼, 우화를 읽으면서도 얼마든지 딴지를 걸고 새로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걸 얻을 수 있는 대표적인 이솝 우화 세 편을 골라 '삐딱하게' 읽어보았다.

aesop fable

1. 개미와 베짱이

the ants and grasshopper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유명한 우화다. 흔히 '근면'과 '성실'이 '생존'을 보장한다는 의미로 많이 인용되었지만, 가만 보면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엿보인다. 여름과 겨울이 평등하게 다뤄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화 속에서 여름은 '일'의 가치가 드러나지 않은 가짜 계절, 겨울은 일의 가치가 완전히 드러난 진실의 계절로 나뉘어 겨울이 여름보다 우월한 시간처럼 그려진다. 그렇지만 생각해보자. 우화는 여름에 시작해 겨울에 끝나지만, 거꾸로 겨울에 시작해 여름에 끝나는 이야기였다면 개미와 베짱이 중 승자는 누구였을까? 우리는 어쩌면 개미와 베짱이의 일화에서 '근면, 성실'이 아닌 '살아남으면 그만, 이 바닥엔 룰이 없다.'는 교훈을 새로 끄집어내야 할지도 모른다.

"...만일 혹독한 겨울을 어렵게 어렵게 구걸하며 살아낸 매미가 이듬해 여름에 다시 즐겁게 노래한다면? 여름에 모은 식량으로 겨울을 난 개미가 이듬해 여름에 다시 죽도록 고생스럽게 일을 하고, 매미가 그런 개미를 다시 비웃는다면?...이야기는 개미와 매미, 일과 놀이, 여름과 겨울 사이의 끝나지 않는 공방이 된다..." (책 '우화의 서사학', 김태환 저)

2. 해와 바람

sun and wind

흔히 이 우화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교훈과 함께 널리 알려져 있지만, 뭔가 이상하다. 애초에 해와 바람 중 누가 더 힘이 센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나그네의 외투 벗기기'여야만 하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같은 바람이나 해끼리였다면 모르겠지만, 아예 본질이 다른 둘을 합당하게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을 리가 없다. 더구나 '외투 벗기기'로 정확히 어떤 능력을 겨루고자 했는지도 확실치 않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바람은 마치 한식 대첩에 멋 모르고 출전한 제과제빵사 신세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자신과 상대방 중 누가 더 능력이 있는가는 자신이 어떤 포지션과 어떤 타이밍에서 무슨 목적을 두고 겨루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실패에 쉽게 좌절하지 말고, 내 능력이 빛날 수 있는 홈 그라운드가 어딘지를 찾자!’가 본 우화의 교훈이 될 수 있는 이유다.

"...따라서 능력의 성격을 충분히 정확하게 한정하지 않은 채 누가 강자인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한 때 사람들은 복싱의 세계 챔피언 무하다드 알리와 프로레슬링의 세계 챔피언 안토니오 이노키 중 누가 더 강자인지 궁금해했다...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은 복싱을 떠난 알리의 강함이나 레슬링을 떠난 이노키의 강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바람의 실패는 표면적으로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한 데 잇지만, 실은 척도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바람의 실패가 이처럼 이중적이라면, 이에 대응하는 해의 성공도 이중적이다. 해...의 성공은 바람이 나그네 외투 벗기기 시합을 받아들이게 한 데 있다." (책 '우화의 서사학', 김태환 저)

3. 시골쥐와 서울쥐

mouse

시골쥐가 서울쥐의 부유함이 부러워 서울로 놀러 갔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두려움과 의심 없이' 살 수 있는 시골로 돌아갔다는 이 우화는 흔히 시골쥐의 승리, 서울쥐의 패배로 기억되기 쉽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정말 시골쥐가 이겼다 말할 수 있으려면 서울쥐가 같이 시골로 내려갔다는 결론이 나야 하기 때문이다. 시골쥐의 주장에 진정으로 설득 당했다면 응당 그래야 마땅하지만 서울쥐는 그대로 서울에 남는다. 이유는 서로 원하는 게 달랐기 때문이다. 서울쥐는 '두려움과 의심이 없는 곳'보다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곳'을 더 원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서울쥐에겐 시골보단 서울이 더 좋은 선택일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답은 모두 다르다. 즉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는 태도를 우리는 배워야 한다. 서울에 살고 있다고 시골에 와서 으스대지 말고, 서울이 싫다고 서울을 경멸하지 않는 태도 말이다. 어쩌면 다시 쿨하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시골쥐와 서울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가르치는 우화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세계는 근본적으로 다의적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우리가 세계를 향해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 다르게 응답하기 때문이다. 시골쥐는 서울의 삶은 풍요로운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서울로 따라간다. 이 질문에 대해 서울은 그렇다는 대답을 준다. 서울은 풍요로운 곳이다. 하지만 사람이 들어와서 숨어야 했을 때 시골쥐는 서울행을 결심하기 전에 서울에 대해 생각했어야 할 또 다른 질문을 깜빡 빠뜨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질문은 서울의 삶은 자유로운가 하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서울의 답은 '아니요'다...하지만 정작 서울에 살고 있는 서울쥐는 그러한 질문 자체를 던지지 않는다. 서울쥐에게 서울은 오직 풍요롭고 살기 좋은 곳일 뿐이다." (책 '우화의 서사학', 김태환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