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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1월 24일 05시 22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1월 24일 05시 23분 KST

"지난주 저는 가상현실에서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Benjamin Torode via Getty Images

“지난주 저는 가상현실에서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다소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되는 한 블로그의 글이 미국 사회를 강타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난해 10월21일 블로그 서비스 ‘미디엄’에 조던 벨라마이어란 필명을 쓰는 한 여성의 글은 온라인에서 빠르게 공유되며 파장을 일으켰다.

사건은, 남편과 함께 시동생의 집을 찾은 벨라마이어가 처음으로 가상현실(VR)을 구현하는 ‘퀴브이아르’(QuiVR)란 이름의 게임을 체험하며 벌어졌다. 벨라마이어는 가상현실의 엄청난 몰입감에 전율했다. 활을 쏴 좀비를 쓰러뜨리는 이 게임에서 그는 아주 높은 곳에서 공포를 느끼기도 했고, 이 공포를 극복하며 마치 ‘신’처럼 느낄 정도로 희열을 느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온라인에 접속한 다른 사용자와 함께 즐기는 ‘멀티 플레이어’ 모드를 시작한 뒤 곧바로 “(남성에게) 쫓기는 힘없는 여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동료로 등장한 ‘BigBro442’란 아이디를 쓰는 한 사용자가 갑자기 벨라마이어의 가슴 부위를 주무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바타의 형태가 머리카락과 손, 활만 둥실둥실 떠다니는 식이었고, ‘가상현실’이라는 인식도 그에게 있었지만, 수치심은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벨라마이어는 시엔엔머니(CNNMoney)와의 인터뷰에서 “예전에 실제로 스타벅스에서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쇼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돌입하면서 윤리 문제가 난제로 떠오르고 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기술이 등장할지 모를 정도로 빠른 변화가 특징이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면서 우리는 지식과 정보가 공유되고 스마트폰이 상용화되면서 누구든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기술을 개발할 수 있게 됐고, 기존의 세계관마저도 손쉽게 뒤흔들 수 있게 됐다. 이런 상황은 필연적으로 윤리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killer robot

가장 첨예한 논쟁은 바로 인공지능과 관련된 윤리다. 인간의 명령 없이 스스로의 의지로 살인할 수 있는 로봇인 ‘킬러 로봇’(자동살인기계)을 개발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인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미 펜타곤(국방부)은 얼굴 인식 기능을 갖춰 적을 찾아내 살해할 수 있는 기능을 탑재한 드론을 개발해 이미 테스트했다.

러시아와 이스라엘도 이미 주변을 감시하고 움직이는 물체를 쏠 수 있는 정도의 기술은 확보해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비 확장을 강조하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 ‘로봇 군비경쟁’이 시작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자율주행자동차는 인간이 운전하는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사망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어떤 판단을 하도록 설계하느냐가 중요한 윤리적 논점이다. 인공지능과 관련해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실린 논문 ‘자율주행차의 사회적 딜레마'는 ‘그대로 주행하면 보행자가 죽고, 피하면 벽에 부딪혀 승객이 죽는’ 돌발상황에 맞닥뜨린 자율주행차의 선택을 주제로 다뤘다.

‘합성 생물학’의 등장에 따른 논쟁도 첨예하다. 유전자 염기서열 분석에 따른 새로운 인류의 출현은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전례 없이 쉽고 정확하게 유전자 조작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인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CRISPR/CAS9)’의 등장은 인류에게 질문을 던진다.

지난해 9월 미국에서는 세 명의 디엔에이(DNA)를 결합해 체외수정 시술로 ‘세 부모 아기’가 탄생하기도 했다. 질병이나 노화를 극복한 ‘우월한 인류’의 문제라든가, 모두에게 평등한 죽음과 수명의 문제를 정면으로 거스를 수 있는 기술의 등장은 차별 문제와 얽히며 커다란 논란거리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윤리적 문제들은 일견 새로운 현상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미 인류는 지금 떠오르는 주제와 닮은 수많은 논의를 쌓아왔다. 벨라마이어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사례는 사실 컴퓨터 등장 이후 겉모습만 달리하며 이어져온 ‘사이버 성추행’ 논쟁 중 하나다.

킬러 로봇 등 인공지능에 대한 문제도 ‘아직은’ 인간의 문제로 치환할 수 있다. 인공지능은 아직 “인간처럼 자유의지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제어함으로써 자기 실존을 확인할 능력이 없기 때문”(홍익대 로봇윤리와 법제연구센터 이중기 교수)이다. 이 때문에 로봇에게는 아직 ‘도덕적 판단 주체’로서의 지위를 부여할 수는 없고, 그 인공지능의 행동 방식을 설정하는 인간의 판단에 대해 논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각종 기술의 등장으로 인해 ‘인간’이라는 존재의 정의는 확장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세계경제포럼의 클라우스 슈바프 회장은 그의 책 '4차 산업혁명'에서 “놀라운 발견들이 계속 등장함에 따라 도덕적, 윤리적 논의를 지속해서 이어가겠다는 우리의 관심과 약속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기존에 ‘인류 공동체를 위한 선’을 추구해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확장된 인간’의 관점에서 공동체를 재정립하고 윤리적 공감대를 쌓아나가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슈바프 회장은 “제4차 산업혁명이 기존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모델에 가져올 파괴적 혁신은 결국, 권한을 가진 모든 이들이 스스로가 분배된 권력 시스템의 일부라는 것을 인식하고, 성공을 위해서는 협동적인 상호작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시작한다”고 강조했다.

또 한 가지, 4차 산업혁명이 만드는 세상은 예상치 못할 정도로 빠른 변화를 유발한다는 점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빠른 속도 탓에 어떤 사건의 공론화가 이뤄지기도 전에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크다. 그렇다면 반대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빠르게 공론화시키는 것 자체가 문제 해결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전세계가 연결돼 공유와 교류가 빠르게 이뤄지는 시대이니만큼 공론화만 된다면, 윤리적 공감대 역시 빠르게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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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마이어의 사례는 그 가능성을 보여줬다. 벨라마이어가 자신의 경험을 블로그에 올린 뒤, 많은 사람이 논의와 토론을 벌였다. 그중에는 게임 ‘퀴브이아르’의 개발자들도 있었다. 개발자인 헨리 잭슨과 조너선 솅커는 “책임감을 느낀다”며 하나의 해법을 제시했다.

“만약 그녀가 손가락만을 이용해서 가볍게 치는 것만으로 마치 개미를 날리듯 그 나쁜 플레이어를 날려버릴 수 있었다면 그 글쓴이의 경험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잭슨은 가상현실 관련 커뮤니티 사이트인 ‘업로드 브이아르’에서 이번에 새로 추가한 기능인 ‘퍼스널 버블’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퍼스널 버블이란 성추행 등으로 괴롭히는 상대를 튕겨내 버리는 기능이다.

그는 “가상현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포비아’ 등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가상현실이 구현하는 엄청난 리얼리티 덕에 사람의 심리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 반대 효과 역시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밝혔다. 성추행 피해자의 수치심을 그대로 두지 않고, 곧바로 극복할 수 있는 장치를 게임 속에 마련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 글이 올라온 시점은 지난해 10월25일이다. 벨라마이어가 미디엄에 글을 올린 지 고작 나흘 만에 나름대로 합리적인 대안을 내놓은 셈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극적으로 연결된 사회에서 인류의 집단지성은 윤리 문제도 빠르게 공론화시키고, 빠른 속도로 결론을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