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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1월 26일 10시 52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1월 26일 10시 56분 KST

동대문에 얽힌 역사적 사실 3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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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보물 제1호는 흥인지문(동대문)이다. 원래 이름은 흥인문이었는데, 여러 이유로 흥인지문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도성 안 북, 서, 남에 비해 이곳의 땅이 낮기 때문에 그 기운을 올려주기 위해 ‘지(之)’를 더했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만큼 지대가 낮았던 것인데, 이 외에도 흥인지문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쇼핑을 위해 종종 들르는 동대문. 다음의 역사적 사실을 숙지한 후 친구들과 함께 갔을 때 사용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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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대문은 서울에서 유일한 옹성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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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 주변은 지대가 낮아 적의 공격에 취약한 지역이기에, 바깥쪽으로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다. 일반적으로 옹성은 성벽의 취약한 부분을 보강하기 위하여 쌓은 시설로서, 성문 바깥쪽에 구축된다. 성을 방어하는 데 가장 취약한 부분이 성문이므로 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이름처럼 항아리 모양으로 덧대어 쌓은 것이다. 성문으로 진입하는 적을 측면이나 후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구조이니, 옹성 안에 갇힌 적은 ‘독 안에 든 쥐’ 꼴이 될 것이다.” (책 ‘한양도성, 서울을 흐르다’, 신희권 저)

동대문(흥인지문)의 특징 중 옹성이라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실제로 저자는 옹성의 효과에 대해 임진왜란 때도 쉬지 않고 북상하던 왜군이 흥인지문 앞에서 성문이 열려있고 방어하는 군사가 보이지 않자 주춤했다고 설명한다. 옹성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적을 막는데 상당히 효과가 있다. 다만 병자호란 때 쳐들어왔던 청나라에서 성벽을 수리하거나 신축하지 말기를 강요하여 그 이후로 동대문은 오랫동안 유지, 보수가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2. 동대문과 남대문을 일제가 철거하지 않은 이유는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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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은 숭례문과 마찬가지로 1907년 수립된 도시계획에 의해 성문의 양 측면 성벽이 철거되어 도로 가운데 고립된 신세가 되었다. 당시 조선통감부는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주변 통행에 불편을 준다는 이유로 성벽은 물론 성문까지도 철거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숭례문이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1562~1611)가 이끄는 왜군이 한양으로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로 보존될 수 있었다는 한 언론 보도가 있었다. …. 그에 따르면, 당시 흥인지문이 보존된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인데,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한양 공략의 선봉을 담당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흥인지문으로 입성해 도성을 함락시켰다는 역사적 유래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책 ‘한양도성, 서울을 흐르다’, 신희권 저)

한편으로 가슴 아프고,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이런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우리 도성들은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한 것이다. 9년 전 숭례문은 화재로 큰 수난을 겪었다. 그토록 온갖 수난을 겪고 극복해 온 도성인데 우리가 더 신경 써서 보존해야 할 필요가 있다. 흥인지문도 마찬가지다. 도시 개발과 병행하여 제 모습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3. 조선시대부터 동대문 주변에 시장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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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흥인지문과 숭례문 근처에 칠패 및 이현(배나무 고개)이라는 사설시장이 설립되어, 시전과 함께 서울을 대표하는 시장으로 떠오른다. 이현시장의 이름은 흥인지문 부근의 고개인 ‘배오개’를 한자로 바꾼 데서 비롯되었는데, 고개 남쪽에 위치한 종로4가 및 예지동 일대에 형성된 서울 동쪽의 핵심시장이었다. …. 그러나 1905년 일제가 화폐정리를 단행하자 전국의 시장 상인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 이에 맞대응하기 위해 일부 자본가들이 이현시장의 중심지였던 예지동 일대에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하는데, 시장의 이름은 이때부터 동대문시장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책 ‘한양도성, 서울을 흐르다’, 신희권 저)

동대문시장의 유래는 조선 후기부터다. 일제 강점기 들어서기 직전에 동대문시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60년대 광장시장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다. 청계천에 놓여있는 광교와 장교 사이에 동대문시장이 위치하기 때문에 한 글자씩 따서 광장시장이다. 이후 이곳은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 된다. 바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동대문 일대 봉제공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탄압에 항의하며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고 분신한 것이다. 지금처럼 패션 중심지가 되기까지 동대문시장은 꽤나 많은, 또한 가슴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