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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1월 17일 12시 27분 KST

'신사임당'의 이미지는 누가 왜 만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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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은 우리에게 특별한 인물이다. 2009년부터 가장 단위가 높은 화폐인 5만원권 인물도안의 주인공이다. 또한 아들 율곡 이이는 5천원권 인물도안이기도 하다. 그만큼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조선시대 몇 안 되는 여성 중 한 명이다. 또한 1월 26일 이영애 주연으로 신사임당 드라마가 시작된다. 신사임당이라는 인물이 더욱 우리의 주목을 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신사임당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정확히,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신사임당 이미지는 어떻게 구축되어 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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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사임당은 아들 이이를 떠받드는 서인들에 의해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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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이이)이 존숭되고 선양될수록 신사임당은 그 아들의 어머니에 걸맞는 모습으로 구성되어 갔다.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지나 17세기에 접어든 사임당은 율곡을 종주(宗主)로 하는 서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율곡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그 어머니 사임당의 존재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임당의 무엇을 부각시키고 무엇을 약화시킬 것인가’하는 것은 사람들마다 조금씩 달랐다. 우선 사임당이 화가라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긴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정구, 이항복, 김집은 사임당의 글과 그림 실력을 강조하였지만, 김장생은 그림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장생이 용 태몽 이야기를 언급한 이후 ‘율곡과 용’의 연관은 점차 사실로 자리를 잡아간다.” (책 ‘신사임당, 그녀를 위한 변명’, 고연희, 이경구, 이숙인, 홍양희, 김수진 저)

신사임당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경전을 익혔으며 글을 잘 지었다. 바느질과 자수 실력도 뛰어났다. 그림 솜씨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나 서인들에게 그녀가 율곡 이이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더욱 중요했다. 심지어 서인들의 태몽까지 들먹이며 율곡의 대단함을 강조했다. 자연스럽게 신사임당까지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곡 이이의 어머니임이 대단한 것이었다.

2. 신사임당이 역사적 인물이 된 것은 송시열 덕분이다.

“무엇보다 신사임당을 역사적 인물로 만든 최고의 공로자는 송시열이다. 송시열의 사임당 이야기는 그녀가 그렸다는 난초 그림과 산수화 등을 매개로 펼쳐졌다. 난초 그림에 대한 발문 ‘사임당이 그린 난 그림에 대한 발문’은 송시열의 나이 53세 때인 1659년 섣달에 나왔다. ‘이것은 고 증찬성 이공 부인 신씨의 작품이다. 그 손가락 밑에서 표현된 것으로도 혼연히 자연을 이루어 사람의 힘을 빌려 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하물려 오행(五行)의 정수를 얻고 또 천지의 기운을 모아 참 조화를 이룸에는 어떠하겠는가? 과연 그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 송시열은 사임당의 그림은 단순한 솜씨나 기교가 아닌 보다 높고 깊은 예술성과 정신세계를 묘사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천지의 기운이 응축된 사임당의 혼이 곧 율곡의 존재를 가능케 하였다. 무엇보다 송시열은 그림을 통해 ‘신부인의 어머니 됨과 율곡 선생의 아들 됨이 뿌리와 가지처럼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책 ‘신사임당, 그녀를 위한 변명’, 고연희, 이경구, 이숙인, 홍양희, 김수진 저)

신사임당의 그림에 대해 높게 평가한 송시열. 그런데 송시열이 그녀의 난초화를 높게 평가한 글을 쓴 시기가 1659년으로 서인이 1차 예송 논쟁으로 남인과 첨예하게 대립할 때다. 또한 그녀의 산수화를 높게 평가한 글을 쓴 때는 1676년이다. 이때는 2차 예송 논쟁으로 인해 서인들의 힘이 약해졌을 때다. 항상 서인의 단결을 위해 율곡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 스토리까지 들고 나왔다.

3. 신사임당은 유교적으로 부인으로서 훌륭하다고 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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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사임당은 유교적 부덕(婦德, 부인으로서의 덕)을 갖춘 여성으로 다시 강조된다. 17세기의 송시열도 사임당을 중국의 후(侯) 부인 못지않게 부덕을 갖춘 여성이라 칭송하였지만, 18세기에는 유교 경전의 정신과 대비시키면서 더 구체적이면서 심도 있게 전개되었다. 18세기 들어 가장 먼저 나온 글은 앞에서 소개한 김진규의 ‘사임당 초충도 뒤에 부치다’이다. 그는 사임당이 그림을 그린 것은 ‘부인의 덕’에 부합하는 것임을 역설하였다. …. 사임당의 그림이 ‘시경’ 속 성녀들의 행위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김진규의 해석은 갈수록 정설로 굳어졌다. 바로 2년 뒤, 신정하는 사임당이 그림을 그린 것은 그림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까지 이른다. …. 신정하가 보기에, 여성의 일이란 그것이 무엇이든 여성의 역할을 체현하는 가운데 있다. 따라서 사임당의 그림은 부덕을 실천하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책 ‘신사임당, 그녀를 위한 변명’, 고연희, 이경구, 이숙인, 홍양희, 김수진 저)

신사임당의 재능은 오로지 현명한 부인, 덕이 있는 어머니로서 포장되기 위해 쓰인다. 이런 훌륭한 마음과 자세를 갖춘 어머니 덕분에 율곡 이이처럼 훌륭한 대학자가 나올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 심지어 비교의 대상이 중국 북송 대학자 정호, 정이 형제의 어머니 후부인이 되기도 한다. 대학자의 어머니끼리 붙여놓은 것이다. 신사임당은 본인의 능력과 실력으로 정당하게 평가를 받기를 바랐을 텐데, 꽤 오랜 기간 동안(혹은 지금까지도) 그런 움직임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