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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1월 10일 14시 45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1월 10일 15시 02분 KST

오늘날 헌법의 가치를 알린 4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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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정국이 지속되면서 떠오른 또 다른 키워드는 '개헌'이다. 신년 여론조사에서 개헌에 찬성하는 사람이 65.4%를 차지하기도 하고, 지난 12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개헌특위 구성이 가결되는 등 구체적인 움직임도 보인다. 올해 초 중요한 화두로 헌법이 오르내릴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는다. 이렇게 숨가쁘게 돌아가는 와중에 되새겨봄 직한 건 헌법이 가지는 근본적인 가치다. 그런데 이런 근본적 가치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부터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천부인권'의 보편성 등의 가치가 현실 속에서 역사적 과정을 통해 증명되지 않았다면 '헌법'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취지로, 각국 헌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네 나라의 헌법 제정상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았다. 어쩌면 그 속에서 우리가 개헌을 통해 살려나가야 할 헌법의 근본적 가치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constitution

1. 영국

glorious revolution

초창기 헌법은 대개 같은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졌다. '세금', 그리고 '몸'에 대한 권리 때문이었다. 즉 내 몸과 돈의 운명을 '왕' 한 사람의 의지가 아닌 합의된 '법적 절차'에 의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헌법을 만들었다.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1215년 잦은 전쟁으로 인해 국가 재정 상태가 엉망이 된 존 왕은 귀족들이 반란과 함께 내민 대헌장,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게 된다. 거기엔 왕이 세금을 징수할 때 평의회의 승인을 구하며 자유민을 체포하거나 구금할 때 반드시 법에 의해야만 한다는 조항이 들어있었다. 왕의 권력을 제약한 최초의 '문서'였던 셈이다. 이후 영국 귀족들은 왕 제임스 2세를 쫓아낸 1688년 명예 혁명 이후 새로 모신 왕 윌리엄 3세와 메리2세에게서 ‘권리장전’에 대한 서명을 받아낸다. 그리고 이 문서에는 세금과 신체에 대한 권리에 이어 청원권, 의회의 정기 개원과 의원의 면책 특권 보장이 추가된다. 지금도 헌법상 중요한 권리들이다. 영국의 헌법은 이처럼 '왕'에게서 '귀족'이 권력을 빼앗아 '의회'란 형식을 통해 그 힘을 공유하는 것부터 출발했다. 이후 남성 노동자에게, 마지막으로 여성에게 점차 그 권력이 확산되는 과정이 영국 민주주의 역사를 이룬다. 이런 점진적인 역사적 과정 때문에 영국은 지금도 의회를 행정, 사법보다 우위에 두는 의회주권의 개념을 가지고 내각책임제를 실시하고 있다.

"명예혁명이 헌법사에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과 같은 전면적인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었음은 지적할 필요가 있다. 즉 의회가 오늘날 국민의 대표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당시 영국 의회는 영국 국민 중 소수 귀족 특히 지주층을 중심으로 한 가진 자의 대표기관이었음은 명백하다...그러나 명예혁명으로 인해 영국에서는 절대왕정이 성립하지 못했고, 국왕 역시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아님을 명백히 하였다. 또한 이후 의회를 중심으로 한 국정이 운영되고, 의회 자체도 소수 귀족의 의회가 아니라 국민의 의회로 진보함으로써 오늘날 민주주의 헌법사에 큰 획을 그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책 '헌법사 산책', 김명주 저)

2. 미국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미국은 지리적 조건 때문에 그들만의 헌법 역사를 가질 수 있었다. 엇비슷하거나 더 강한 힘을 가진 다른 나라와 붙어있지 않은 '신대륙'에, '이주민'들로 구성된 새로운 나라라는 조건은 새로운 정치실험인 '공화정'의 시행을 방해할 왕이나 귀족, 침범해올 외부 세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미국은 식민지 상태에서도 나름의 독자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영국은 회사나 개인에게 특정 구역에 대한 특허장을 주는 형식으로 땅을 개척해나갔는데, 그렇게 갈라진 땅들은 독자적인 '주(州)'가 되어 대개 주지사 아래 상•하원을 두는 형식으로 운영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민주적 경험은 결국 1774년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여기도 역시 세금이 이유였다!).'는 선언을 만들어내고, 2년 뒤인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이란 결과를 낳는다. 국민주권, 삼권분립, 천부인권, 혈통이 아닌 투표로 선출되는 대통령 제도 등 현대 민주국가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부분의 개념들이 들어가 있는 이 선언문은 헌법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서 중 하나이다. 다만 이때 독립전쟁을 이끈 주체가 단일한 나라가 아닌 13개 '국가'의 연합체였다는 사실은 미국 민주주의 역사에 '연방'과 '주(州)' 사이의 권력 균형이라는 중요한 화두를 던져준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 의해 미국은 '주(州)의 안보에 필요하기에' 개인의 총기소지를 허락하는 수정헌법 제2조와 각 주에 똑같이 2명의 상원의원이 배당되는 정치제도를 가지게 되었다.

"미국 헌법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세계 최초로 연방주의(Federalism)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즉 영국의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북아메리카 13개의 식민지가 연합하여 전쟁을 수행...했지만, 실제적으로 13개의 식민지들은 역사적 배경을 달리하면서 각자 독립된 국가와 같이 독립된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국은 단일 국가인 우리나라와 달리 연방정부와 주 정부의 권한이 헌법상 구분되어 있다...미국 헌법은 사실상 13개의 각자 다른 나라와 같은 13주를 미국이라고 하는 하나의 연방국가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고, 이후 오늘날 50개 주를 하나의 국가로 묶어냈다."(책 '헌법사 산책', 김명주 저)

3. 프랑스

french declaration of human rights

프랑스는 미국이나 영국과는 또 달랐다. 우선 영국 같은 섬도, 미국 같은 신대륙도 아니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왕권이 약했던 영국과 달리 프랑스는 루이 14세로 대표되는 견고한 절대왕정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프랑스의 헌법이 영국과 같은 점진적인 방식이나, 미국 같은 국가 단위의 독립적인 실험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쟁취될 수밖에 없었고, 이후로도 '빈 체제' 같은 반동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루이 16세 당시 프랑스 왕정은 그 동안 치른 잦은 전쟁으로 엄청난 부채를 지고 있었다. 성직자와 귀족에게 세금을 물릴 수 없었던 왕은 결국 평민에게 더 많은 세금을 물리기 위해 세 계급이 모인 삼부회를 소집하는데, 부르주아지, 노동자, 소작농들이 속한 제3계급 대표들은 1789년 6월 20일 이 삼부회를 거부하고 근처 테니스 코트장에 모여 자신들끼리 '국민의회'를 만든 후 새 헌법의 제정을 요구한다. 이것이 '테니스코트 서약'이다. 그리고 이 국민의회를 무력으로 해산시키기 위해 루이 16세가 군대를 이동시키자 일어난 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그래서 당시 만들어진, 지금 프랑스 헌법의 기초가 되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는 재산권, 자유권과 함께 '억압에 대한 저항권'(제2조)이 명시되어 있다. 또 '법 앞에서의 평등'을 확고하게 적시하였다. 영국처럼 귀족에 의해서, 혹은 미국처럼 국가 단위로 이루어진 헌법이 아닌 '일반 시민'들이 '지배 계급'을 상대로 쟁취해낸 헌법이기에 들어갈 수 있었던 기본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인권선언이 기존 영국과 미국의 인권과 관련된 규정들과 차별되는 이유는 그 동안 주장되었던 자유권 외에도 법 앞에서의 평등권을 명확히 한 데 있다. 영국은 국왕과 귀족이 권력투쟁을 벌이면서 귀족들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것이었고,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미 국민들의 자유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면 프랑스 혁명은 일반 시민(특히 부르주아지)이 기본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인권선언 제6조는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책 '헌법사 산책', 김명주 저)

4. 독일

the weimar constitution

독일은 프랑스나 영국처럼 단일한 국가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미국처럼 멀리 떨어진 신대륙도 아니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수많은 제후국들로 나뉘어져 유명무실한 연방의회만을 가진 약소국에 불과했다. 이런 조건 속에서 1871년에야 비스마르크에 의해 뒤늦게 이루어진 독일 통일은 독일이 약간 다른 헌법을 만들어내는 배경이 된다. 헌법 제정의 목적이 황제의 강력한 왕권을 뒷받침하며 통일된 독일의 정치체제를 보장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렇듯 '위에서부터 만들어져 내려온' 일명 '제국헌법'에 의해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는 여전히 전권을 휘두를 수 있었다. 심지어 헌법에 기본권은 규정조차 되어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헌법사에서 독일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 만들어진 '바이마르 헌법' 때문이다. 패전으로 황제가 도망가고 독일에 공화국이 선포된 가운데 1919년 만들어진 이 헌법은 '재산'과 '몸'의 권리에 대한 법률적 보장이라는 최소한의 차원을 넘어 국가가 적극적으로 국민의 인간다운 삶과 행복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 아래 쓰여진 최초의 헌법이었다. 이 헌법으로 인해 현대국가는 복지국가를 지향하게 되며, 재산권 또한 '정의의 원칙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규정을 가지게 된다. 전쟁 후 기존의 지배세력이 사라진 제로 상태에서, 시대정신을 충실하게 담아낸 헌법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은 전쟁 후 혼란을 수습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히틀러의 집권으로 소멸한다. 가장 뛰어난 헌법 아래 가장 반민주주의적인 정치 지도자를 낳은 독일의 역사는, '정치적으로 조직된 민주 시민'이 적극적으로 헌법상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헌법도 종이뭉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바이마르 헌법의 교훈은 명백하다. 헌법에 온갖 미사여구의 기본권이 보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국민들이 현실적으로 그 기본권을 지킬 의사와 능력이 없다면 헌법은 한낱 종잇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바이마르공화국은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라는 평판을 가지게 되었다. 역사상 가장 선진적인 헌법에서 역사상 가장 최악의 권력이 탄생하였다는 이 아이러니는 헌법과 헌법 현실 사이의 괴리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책 '헌법사 산책', 김명주 저)

각 나라의 헌법은 이처럼 유사한 듯 하면서도 조금씩 다르다. 역사적 맥락이 그 문서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촛불 이후 진행되는 지금의 개헌 논의는 어쩌면 우리가 1987년 이후 두 번째로 잡은, '정치적으로 조직된 민주 시민'의 뒷받침을 통해 우리만의 역사적 맥락을 가진 헌법을 만들 수 있는 기회인지도 모른다.

박영수 특검 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