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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1월 05일 12시 48분 KST

촛불집회 때 들고 나와도 괜찮을 명화 3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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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 새해가 밝았다. 그리고 그 '희망'의 목록 중 하나로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넣고 있는 사람들이 2016년 마지막 촛불집회에서 '송박영신'을 외치기도 했다. '송구영신'을 패러디한 '송박영신'이란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 이번 촛불 집회는 수많은 패러디들의 향연이기도 했다. 영화 곡성을 패러디한 한예종 학생들의 시'굿'선언과,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개사해 부른 동아방송예술대학생들의 시국선언이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왕에 프랑스 혁명을 소재로 한 노래를 촛불 집회에서 사용했다면, 혁명 당시를 소재로 한 당대의 명화들은 어떨까? 새해를 맞아 변함없이 만들어갈 희망을 위해 피켓에 붙이고 나와도 괜찮을 프랑스 혁명기의 명화 세 점을 선정해 보았다. 시간과 문화를 뛰어넘는 유사성에 놀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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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자크 루이 다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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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의 의도와 목적은 분명하다. 구성을 살펴보자. 마치 비극을 주제로 한 고전 작품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다비드는 고전의 레퍼토리 속에서 용기를 북돋우는 상징을 얻길 원했다. 도시국가 로마의 시민이었던 호라티우스 삼형제는 절망과 비탄에 빠져 있는 어머니와 누이, 아내 앞에서 목숨을 바치는 맹세를 하고 있다" (책 '미술관에 간 인문학자', 안현배 저)

다비드가 그린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로마가 아직 작은 도시국가였던 시절의 에피소드를 그린 작품이다. 밀집한 도시국가 간 잦은 전쟁이 공멸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널리 퍼지자, 각 국가의 지도자들은 고심 끝에 새로운 룰을 정한다. 대표 전사들을 뽑아 검투 경기로 '대리 전쟁'을 수행하게 만든 후, 최후에 살아남은 전사가 속한 도시국가에 승리를 안겨주는 방식을 만들었다. 이러한 룰은 이후 맞붙은 도시국가 로마와 알비에도 그래도 적용된다. 로마에선 호라티우스 형제가, 알비에선 쿠리아티우스 형제가 뽑히게 된다. 문제는 이들이 예전에 사돈지간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호라티우스 형제는 무기를 들고 나가 쿠리아티우스 형제와 붙어 승리를 얻는다. 그림은 바로 그 결전에 나가기 전 아버지에게 검을 건네 받는 단호한 순간을 그리고 있다. 이 그림은 본래 루이 16세의 주문으로 제작되었으나 얼마 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화가가 혁명정부에 기증하였다. 호라티우스 형제는 '공화국'을 지키기 위한 신념의 상징이 되었다.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광장에 나서는 결연한 심정을 대입시켜 들고나가 볼 만한 작품이다.

2. ‘메두사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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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 호는 1816년 7월 2일 대서양 캡 블랑크(Cap Blanc) 근처에서 엄청난 풍랑을 맞아 침몰 위기에 놓입니다. 배의 함장은 400여 명의 승무원 중 하급 승무원 149명은 내버려둔 채 탈출을 지휘합니다. 난파한 배에 남아 있는 승무원들에게는 배를 젓는 노 하나 남겨주지 않지요. 생존을 위해 버틸 수 있는 거라곤 바닷물에 젖은 비스킷과 소량의 포도주뿐이었습니다...구조대 아르귀스 호가 조난자들을 발견했을 때, 149명 가운데 15명만이 살아있었습니다." (책 '미술관에 간 인문학자', 안현배 저)

프랑스에도 약 200여 년 전, 한국의 '세월호'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아프리카 세네갈로 향하던 해군 전함 '메두사 호'는 풍랑을 만나 침몰했다. 그런데 왕당파 귀족이었던 선장이 하급 승무원 149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만을 대피시켰다. 난파된 배에 남겨진 그들은 매우 늦은 구조로 15명만 생존하였다. 구조되기까지의 처절했던 상황은 책으로 출간된 생존자 두 명의 일기를 통해 알려졌고, 프랑스 사회는 매우 큰 충격에 빠진다. 그러나 친정부적인 신문사들이 이 두 명을 법원에 고발해버리는 후안무치한 짓을 저지르고, 여기에 분노한 화가 제리코는 그림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알리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메두사의 뗏목’은 이런 화가의 저널리즘적 사명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걸작이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 다시 들어선 반동적인 '황제'의 무책임한 정치와 그로 인해 고통 받는 민중에 대한 은유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그림에 잘못된 정치로 인해 고통 받았던 우리의 얼굴이 들어갈 수 있다.

3.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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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 7월 2일 당시 프랑스의 왕 샤를 10세는 출판과 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시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명령을 발표한다.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혼란을 막겠다고 내린 이 결정은,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계속되는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이것을 '7월 혁명'이라고 부른다. 민중의 봉기는 샤를 10세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대신 입헌군주제로 체제를 바꿔 프랑스에서 왕정이 사라지게 만들었다."(책 '미술관에 간 인문학자', 안현배 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프랑스 혁명과 관련된 그림 중 가장 유명하고, 또 패러디도 가장 많이 되었던 작품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뻔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 그림엔 당시와 지금의 시차를 뛰어넘는 공통된 상황이 있다. 프랑스 혁명은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시작되고 1793년 루이 16세의 목을 자름으로써 제1공화정을 이룬다. 그러나 혁명의 성공은 아니었다. 이후로도 프랑스는 1870년 제3공화정을 선포하기까지 약 80여 년의 시간 동안 두 번의 반동을 경험해야 했고, 또 그걸 이겨나가야 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만들어진 제1공화정은 1804년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에 오르며 무너져야 했고, 1848년 약 40여 년 만에 겨우 다시 만들어진 제2공화정은 나폴레옹의 '후광을 이용해' 대통령에 오른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1852년 헌법을 개정해 다시 황제 자리에 오르며 허무하게 사라져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89년 처음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던 주역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어졌을 오랜 시간 동안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프랑스 민중은 결국 공화정을 재건해낸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아직 제2공화국도 만들어지기 전, 황제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잠깐의 입헌군주제를 만들어낸 1830년 7월 혁명을 그린 작품이다.

우리는 흔히 역사책 속에서 '혁명'이 일어났다고 하면 빛나는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세상에 그런 혁명은 없다. 프랑스도 우리와 마찬가지였다. 모든 걸 이뤘다 기뻐했던 순간 '어떤 정치군인의 쿠데타'로 민주주의가 박살 나기도 했다. 다시 그 모든 걸 힘겹게 이겨냈다 마침내 안도하는 순간 어처구니없게 '국민의 손으로 직접' 그 정치군인의 가족 중 누군가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후회를 하는 경험도 했다. 단지 프랑스인들은 약 150-200년 전에 겪었고, 우리는 지금 겪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저 그림 속에 등장하는 1830년의 '분노한 민중들' 이후로도 프랑스 사람들은 진정으로 견고한 공화정을 재건하기까지 약 40년을 더 싸워야 했다.

우리가 지금 들고 일어나 불을 밝힌 이 촛불 이후 만들어갈 세상이 프랑스에서 곧 사라져버렸던 제2공화정에 속할지, 견고한 제3공화정에 해당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빛나는 한 순간 이후 짙은 실망감이 닥쳐오는 순간이 있더라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을 때 진정한 새날은 온다는 것은 확실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우리는 아직 어떤 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렇지만 뒷걸음질치지도 않았다. 단지 우리는 1789년 혁명과 1870년 제3공화정 선포 한 가운데 있었던 1830년 7월 혁명의 사람들일 뿐이다. 들라크루아의 이 그림은 아직 촛불을 끄지 않은 우리들에게 바로 그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