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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1월 05일 12시 50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3월 12일 05시 46분 KST

조선이 무너졌던 결정적인 이유 3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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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오랜 역사를 가진 왕조였다. 1392년에 건국되어 1910년에 망할 때까지 무려 518년이나 이어졌다. 여러 차례 위기가 있었으나 하늘이 돕고 백성이 도와 극복을 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의 상황을 보면, 제대로 된 국가라는 생각이 안 들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알듯이 양반의 수탈은 극심했고 국가적으로 발전과 변화에 둔했다. 조선은 결정적으로 왜 무너진 것일까? 제도적 측면에서 접근한 책이 있어서 소개를 할까 한다. 조선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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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리학에 지나치게 매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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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리학의 독점적 이데올로기는 많은 부작용을 초래했다. 성리학에 대한 숭상은 중국 문명에 대한 숭배로 이어졌다. 그러는 과정에서 대국의 문명을 과도하게 존중하고 우리 고유의 것을 열등하게 보는 사대의식도 형성되었다. 이것은 중국에서 이미 패망한 명나라를 조선에서 이념적으로 계승하겠다는 시대착오적 ‘소중화의식’으로 나아가, 청나라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 질서를 거부함으로써 병자호란을 초래했다. 소중화 사상은 중국과 조선을 제외한 다른 나라를 오랑캐로 간주해 스스로 폐쇄적인 벽을 쌓는 것이었다.

…. 18세기 말에 박제가는 ‘박학의’에서 성리학에 매몰된 조선 사회를 공리공담(空理空談)하는 사회, 실질적인 논의를 전혀 하지 못하는 무능한 사회라고 규정했다. 그는 “다들 공리공담에는 유능하지만 실제 사무에는 무능하며, 목전에 닥친 일을 계획하는 것에는 온갖 수고를 하지만 큰 사업의 설계에는 어둡다”고 지적했다. 또한 중국과 일본을 다녀온 사람들은 많으나 “다른 나라의 훌륭한 법을 하나라도 배워 오는 자가 아예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왜놈이니 되놈이니 비웃기만 한다”고 그들의 행태를 비판했다.”

(책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정병석 저)

하나에만 치우치면 편협해지기 마련이다. 진리가 하나에서만 나올 수는 없다. 다른 것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던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시야가 점점 좁아졌다. 안타깝게도 조선을 이끌어가는 세력들은 이들이 유일했다. 조선의 시야도 함께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우리 이웃의 국가들도 무시하기만 했다. 실질적인 것이 없고 말만 오갔다.

2. 지식은 국가가 독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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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원의 ‘반계수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피폐해진 조선을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토지 및 조세제도, 인재 선발과 교육제도, 노비제도, 군사 및 행정제도 등 정치 및 경제의 핵심적인 제도를 전면 개혁해 국가를 개조해야 한다는 혁신적인 정책 제안서였다. 반계 유형원은 혼자의 힘으로 과거의 중국과 고려, 조선의 제도를 연구하고 조선의 현실을 예리하게 분석한 후에 이를 개선하는 세밀한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 그런데도 이런 위대한 정책 제안서가 실제 정책에는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학자와 관료들이 1694년(숙종20년), 1741년(영조17년), 1750년(영조26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려 ‘반계수록’을 간행하고 정책으로 채택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이런 건의는 조정에서 계속 무시되었다. ‘반계수록’을 책으로 간행하는 데에는 많은 건의가 누적되면서 거의 100년이 소요되었다.

…. 1769년(영조45년) 11월, 드디어 영조가 ‘반계수록’의 간행을 지시했다. 영조는 유형원의 책을 간행하되 3부를 인쇄해 바치도록 명했다. 1부는 곧 남한산성에 보내어 판본을 새기게 하고, 인쇄해 다섯 군데 사고에 보관하게 했다. 그런데 실제 인쇄는 중앙 교서관이 아닌 경상도 감영에서 이루어졌다. 마침내 1770년(영조46년)에 경상도 관찰사 이미가 목판본으로 ‘반계수록’ 전편을 간행한다.” (책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정병석 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조선은 서점이 발달하지 않았다. 책에 대한 수요는 분명히 있었지만, 지식을 널리 퍼뜨리려는 의지가 약했다. 지배층은 지식을 독점하길 희망했다. 관리들은 나라로부터 책을 하사 받곤 했다. 굳이 서점이 없더라도 그 필요성을 못 느꼈다. ‘반계수록’은 실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유형원의 역작이다. 이런 책 하나가 세상에 발간되어 나올 때까지 100년이 걸렸다는 것은 지식 유통의 의지가 없었다는 의미다. 기득권들의 지식 독점 욕구는 상상을 초월했다.

3. 책임을 묻지 않는 정치로 운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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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책임정치와 신상필벌을 제도화하지 못했다. 임진왜란에 대해 조선에서는 누가 책임을 졌는가? 결과를 놓고 보면 실제 책임진 사람은 전쟁을 총괄 지휘해 공헌했던 영의정 유성룡밖에 없었다. 당연히 임금과 관료, 제도와 그 이념적 기반인 성리학이 책임의 주체들이었는데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권력이 분산되지 않아 누구도 이들의 책임을 추궁하기 않았기 때문이다. 다원적이지 못한 정치제도에서는 지배계급 밖에서 책임을 추궁하는 집단이 없어 책임정치를 구현하기 어렵다. 7년이나 지속되었던 긴 전란이 끝난 뒤 1604년(선조37년)에 논공행상을 했다. 문신들인 호성공신은 86명이 선정되었고 직접 전투에 참여한 무신들의 선무공신은 18명만이 선정되었다. 궁중의 내시 24명과 선조의 말을 관리했던 관원 6명도 호성공신이 되었고 이들이 이순신 장군, 권율 장군과 같은 등급의 공신이 되었다. 선조는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사람보다 임금 가까이에서 밀착 봉사한 사람을 더 우대했다. 중국의 역사서를 읽고도 전쟁 후 신상필벌하는 논공행상의 기본 원리를 배우지 못한 것이다. 공정하지 못한 평가와 보상 시스템은 신상필벌을 외면하는 폐쇄적 제도의 산물이었다.” (책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정병석 저)

조선의 지배층은 생각보다 무책임했다. 위정자들의 준비 부족으로 임진왜란을 겪어 국토와 백성에 큰 피해를 입혔음에도 그 누구도 책임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보상도 엉망이고, 벌도 멋대로였다. 이런 제도 하에서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 끼리끼리 어울리고 해 먹는 폐쇄적 제도가 문제였다. 결국 포용 정신이 더욱 사라졌다. 당쟁은 격화되고 조선은 점차 수렁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