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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8일 12시 53분 KST

자신만의 서재를 만들었던 3명의 선조들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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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도서관의 시설과 접근성이 좋을수록 주변 사는 사람들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집 밖 동네 도서관만 해도 그런데, 집 안에 서재가 잘 갖추어져 있으면 책을 사랑하게 된다. 조선시대 유명 학자들 역시 집에 자신만의 서재를 갖추어 놓았다. 책에 푹 빠져들 수밖에 없는 조건을 구비한 것이다. 예전 선조들의 서재를 둘러보며, 우리 자신의 서재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study room

1. 이덕무의 팔분당

korea folk village

“옛 선비들 중 책을 좋아한 인물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이덕무(1741~1793)처럼 책을 좋아하고, 책에 관한 일화를 많이 남긴 인물도 드물다. ‘한객건연집’이 청나라에 소개되면서 이덕무는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과 함께 사가시인(四家詩人)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정조 임금에게 발탁되어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고, 정조시대 서적 편찬의 주역이 되었다. …. 이덕무는 가난했지만 독서에 대한 그의 열정은 아무도 막지 못했다. 겨울밤에 책을 읽다가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자 ‘논어’는 바람이 들어오는 곳에 쌓아놓고, ‘한서;는 나란히 잇대어 이불처럼 덮기도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말했다. “누가 형암(이덕무의 호)을 가난하다 했는가? ‘논어’ 병풍과 ‘한서’ 이불은 비단으로 만든 장막과 화려하게 수놓은 이불에 못 미치지 않는데 말이다. ‘논어’를 병풍 삼고 ‘한서’를 이불 삼아 생활할 정도였으니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상상만 해도 측은할 뿐이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였다.” (책 ‘서재에 살다’, 박철상 저)

이덕무는 우리에게 간서치(看書痴)로 잘 알려져 있다. 말 그대로 ‘책만 읽는 바보’라고 부르는 이가 있었다. 그런데 이덕무 스스로가 그 호칭을 사랑스러워했다. 이 정도면 심각할 정도의 ‘책 바보’인 셈이다. 특히 없는 형편에 책만 쌓여가고, 그 와중에 책을 병풍과 이불로 사용했다는 일화에선 ‘도대체 왜?’라는 감탄과 탄식이 절로 나온다. 도서관에서 책을 베개로 사용하는 사람은 종종 보았지만, 병풍과 이불로 사용하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드물 것 같다.

2. 유득공의 사서루

“그 중에서도 중앙 관아에서 왕명으로 간행된 서책은 그 질이 아주 뛰어났다. 그러나 아무나 구해 볼 수는 없었다. 이렇게 왕명으로 간행된 서적은 그 중 일정량을 신하들에게 나눠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하사하는 대상이 항상 달랐기 때문에 조정의 관료로 있다고 해서 언제나 서적을 하사받을 수는 없었다. 특히 간행한 서적의 수량이 적거나 거질(巨帙)인 경우에는 하사 대상이 더욱 축소되었다. 조선조 지식인의 장서 중 상당 부분은 이처럼 왕이 내려준 서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를 내사본이라 부른다. …. 하지만 고위직에 있지도 않았고 화려한 서울의 벌열가(閥閱家)도 아니었지만 누구보다도 많은 내사본을 수장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영재 유득공이다. …. 그렇게 많은 서적 중에서도 유득공이 무엇보다도 아꼈던 것은 바로 정조가 내려준 책이었다. 유득공이 서적을 하사받는 장면은 그가 지은 ‘고운당필기’ 곳곳에 남아 있다. …. 이처럼 정조는 유득공에게 지극한 배려를 해주었다. 그러나 그 배려도 정조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나고 말았다. 정조가 죽고 며칠 뒤, 유득공은 정조의 배려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한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사받은 서적의 명칭과 수량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기로 한 것이다. 조선조 전체를 통틀어서 이처럼 많은 종류의 서적을 한 임금으로부터 내사받은 경우는 그 유례가 없다. 더욱이 내사받은 서적을 목록으로 남긴 것은 더욱 드문 사례다.” (책 ‘서재에 살다’, 박철상 저)

누구보다 책을 아꼈던 군주가 정조다. 그에게 가장 많은 책을 하사 받은 이가 유득공이다. 유득공은 상세히 그 기록을 남겼다. 그 뿐 아니다. 내사받은 서적을 보관하기 위해 따로 서재를 마련하기까지 한다. 그 서재의 이름이 사서루(賜書樓)다. 책을 통해 정조와 유득공이 주고 받았을 지식에 대한 갈구와 군신 간의 정이 느껴진다. 유득공은 아마 당대에 누구보다 가장 행복한 신하였을 것이다.

3. 정약용의 여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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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문집 이름에는 왜 ‘다산’이란 그의 호 대신 ‘여유당(與猶堂)’이란 글자가 들어갔을까? 여유당은 정약용이 자신의 서재에 붙인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당호(堂號), 즉 서재의 이름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유당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 ‘여(與)가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하고 유(猶)가 사방에서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하라.’ ….이처럼 여나 유는 모두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하는 처지를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다산 자신이 처한 상황이 바로 여나 유의 상황과 같았다. 다산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뼈저린 후회였던 것이다. 하지만 다산은 결국 천주학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되고 말았고, 18년이란 세월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후로 그는 자신의 서재에 붙인 여유당의 의미를 한 번도 저버린 적이 없었다.” (책 ‘서재에 살다’, 박철상 저)

조선 후기 천재이자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았던 정약용의 서재 이름에서는 인생의 깨달음이 느껴진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관직에서 물러나 유배지에 있는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심스러움을 보인다. 심지어 당대뿐 아니라 수백 년 후 수많은 지식인들이 보았을 때조차 조롱 받지 않으려 애를 썼다. 이런 신중함과 깨달음 덕분에 수백 년 후 우리들은 정약용을 위대한 사상가로 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