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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16일 10시 18분 KST

대본으로 읽어도 감동적인 영화, 드라마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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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리에 방영되거나 매니아층을 형성한 드라마, 영화 등은 ‘감독판’ DVD가 출시되고는 한다. 그것은 그 작품을 조금이라도 더 세밀하고 깊게 즐기고자 하는 팬들의 요구 때문이다. 또한 감독판DVD와 함께 대본집이 출시되기도 한다. 영상을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돌려봐도 생길 수 있는 공백, 혹은 배우와 감독의 대본 해석 등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굳이 그런 ‘팬심’이 아니더라도 영상을 글로 즐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영상에 비해글은 감상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더 쉽고, 영상에 느낀 감정과 다른 종류의 감동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여기 몇 편의 대본집을 소개한다. 매니아층은 물론 대중의 마음까지 잡은 훌륭한 작품들이다. 영상이 놓칠 수 있는 글의 매력에 한 번 빠져보자.

1. 그들의 감정이 자연스러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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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영 : 나는 아빠가 엄마랑 사는 게 싫었어. 아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엄마 같은 사람이랑, 아빠는 보들레르를 좋아하고, 잔느를 사랑하고, 베를렌을 이해하고… 선배가 나한테 드라마처럼 살라고 한 것처럼 똑같이… 인생을 시처럼 살아라 하고… 그런데, 어제 만난 아빠는… 너무나 이쁘고, 젊은 여자랑,

지오 : (안쓰레 보기만 하는, 눈가 붉어지는) …

준영 : (엉엉 우는) 아빠 보고, 엄마가 첨으로 보고 싶었는데, 엄마한테 갈 수가 없었어. 또 다른 말로 상처받을까봐, 또다시 엄마한테 실망할까봐, 선배, 니가 이런 맘 알어? 안다고 하지 마! 시골에서 착하게 농사지어서 아들 준다고 때마다 꿀 보내고, 반찬 보내는 그런 이쁜 엄말 가진 니가 알긴 뭘 알어?! 니가 뭘 알어?!

지오 : (안고, 맘 아픈, 몸을 조금 흔들며) 미안, 미안, 정말 미안.”(책 ‘그들이 사는 세상’, 노희경 저)

노희경 작가는 대본을 꼼꼼하게 쓰기로 유명하다. 또한 그는 탈고를 마친 후 드라마 제작에 들어가도록 하는 뚝심을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그의 노력은 현장의 감독과 배우들에게 극찬을 받고, 드라마 팬들에게 역시 ‘웰 메이드 드라마’라는 칭송을 이끌어낸다. 그의 대본집은 배우들의 연기가 그대로 눈 앞에 재생되는 것처럼 아주 세밀하다. 특히 특유의 나레이션과 대사로 표현되는 감정 묘사에 탁월하다. 쉼표, 말 줄임표 하나하나, 맞춤법에 맞지는 않지만 구어체를 사용하는 점들까지.

대본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준영’은 이 장면에서 엉엉 울면서도 ‘엄마’를 찾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이 울면서 본능적으로 ‘엄마-‘를 부르는 것을, ‘준영’을 맡은 배우 송혜교는 하지 않는다. 엄마에 대한 애증에 가까운 감정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리라. 이렇게 배우가 해석한 캐릭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도 대본집의 매력 중 하나이다.

2. 드라마 속 긴장감이 그대로, 드라마 ‘시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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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씬7 N, 현재, 진양서 건물 복도/과거, 진양서 건물 복도

계단을 내려와서 서는 해영. 역시 어둡고 텅 빈 복도 한편에 놓인 오래돼 보이는 괘종시계를 보는데, 그 앞쪽에 서 있는 어린 꼬마의 뒷모습. 천천히 몸을 돌려 이쪽을 바라보는데, 어린 해영이다. 가만히 과거에 잠겨 어린 자신을 바라보는 성장한 해영. 서서히 들려오는 과거의 소음 소리, 뛰어다니는 형사들의 발소리들. ‘카드사에서 연락 왔어?’ ‘윤정이 집에선 소식 없었나?’ 등등의 소리들 서서히 커져오면서 서서히 밝아지는 형광등 불빛, 그리고 빠르게 오가는 형사들이 하나둘 화면으로 들어오며, 현재의 해영은 사라지고, 과거로 변하는 복도 오가는 형사, 순경들 사이에서 겁먹은 얼굴로 떨고 있는 어린 해영이와 부딪치는 순경1.” (책 ‘시그널’, 김은희 저)

드라마 ‘시그널’은 독특한 컨셉과 긴장감 있는 화면 구성, 박진감 넘치는 배우들의 연기로 큰 인기를 끌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그 장면들은 대본 단계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던 그 장면들을 김은희 작가는 글로 꼼꼼하게 깔아두었다. 무엇보다도 대본집을 읽다 보면 드라마의 속도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장면 묘사는 물론 배우들의 대사까지도. 아무래도 영상에 비해 박진감이 조금 부족하기는 하지만 글로도 그 분위기가 표현된다는 것은 놀랍기만 하다.

이 드라마 역시 배우들이 명연기를 펼친 터라, 영상과 비교하며 그들이 해석한 캐릭터를 살피는 것도 흥미롭다. ‘가만히 과거에 잠겨 어린 자신을 바라보는’이라고 대본은 서술할 뿐, 그것을 보고 어떤 표정을 만들어 낼지는 배우들의 해석에 달려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3. 대본을 읽고 나면 영상으로 보고 싶어,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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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뛰어 들어오는 숙희, 은제 골무를 보여주며 자기 입을 벌려 보인다. 따라하는 히데코, 골무 낀 손가락을 집어넣어 이를 갈기 시작하는 숙희. 사각사각. 처음에는 눈을 감고 있더니 어느새 숙희를 보는 히데코, 뺨이 붉게 물든다. 덩달아 부끄러운 기분이 드는 숙희, 정신을 딴 데 팔려고 숨을 크게 들이마셔 향을 음미한다. …

사각사각- 이빨 갈아주는 동안 초조한 듯 엄지로 숙희의 한쪽 팔꿈치를 연신 쓰다듬는 히데코의 손 클로즈업. 슬며시 눈 떠보는 히데코, 눈 마주치자 숙희 뺨이 붉게 물든다. 숙희가 시선을 피하자 마음껏 그녀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볼 수 있게 된 히데코, 솜털이며 땀구멍까지 들여다 본다.”(책 ‘아가씨 각본’, 정서경, 박찬욱 저)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의 대본이다. 그러다 보니 분량이 앞의 두 작품에 비해서는 짧다. 분량은 짧으면서도 드라마보다 긴 호흡을 갖고 촬영을 진행하다 보니 좀 더 장면들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느낌이다. 세밀한 묘사들이 많다.

특히나 이 영화는 감독과 작가가 오랜 시간을 들여 준비한 작품인 만큼 대부분의 장면들이 아주 세세하게 그려져 있는 느낌을 주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대사보다는 장면 묘사가 주를 이루는 편이고, 그 장면들 내에서 배우들의 감정이 상대적으로 ‘정해진’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대본집을 읽고 있으면 이렇게 정해진 ‘길’ 안에서 배우들은 어떻게 자신의 개성을 남겼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