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2017년 02월 04일 15시 42분 KST

유전자나 DNA를 연구했던 과학자의 뒷이야기 3가지

the

유전자나 DNA연구는 과학사에서 그리 역사가 길지는 않다. 그렇지만 대중들에게도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다. 어떤 기질을 보이는 사람에게 부모 중 누구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는지를 흔히 궁금해한다. 또한 후천적 노력만으로 유전을 극복할 수 있는지도 늘 궁금증을 안겨주는 주제이다. 수많은 과학자들 덕분에 유전자나 DNA에 대한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상상이 가겠지만, 이런 주제에 대해 쉽게 연구를 하는 과학자들은 없다. 고난을 겪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과학적 방법으로 사실을 밝혀내려는 이들의 노력하는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the

1. 멘델: 유전학의 아버지

gregor mendel

멘델의 유전 법칙은 생물 시간에 빠짐 없이 등장하는 중요한 내용이다. 이 법칙은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서로 대립하는 우성 유전 인자와 열성 유전 인자가 있을 때 우성 유전 인자의 형질만이 나타난다는 우열의 법칙이다. 둘째는 우성만 보이던 잡종 1세대를 교배하면 서로 다른 유전자가 나뉘어 들어가 우성과 열성이 일정한 비율로 분리되어 나타난다는 분리의 법칙이다. 셋째는 서로 다른 형질을 나타내는 유전자는 각각 독립적으로 행동한다는 독립의 법칙이다.” (책 '상위5%로 가는 생물교실2’, 백승용 외 저) 그런데 유전 법칙의 주인공 그레고어 멘델(Gregor Mendel)은 말년에 수도원장이었다. 또한 당대에는 자신의 연구가 인정받지도 못했다. 과학자로서 불우한 말년을 보낸 셈이었다.

“멘델은 몇 년 더 연구를 계속했지만, 자신의 과학적 명성을 빛낼 기회는 1868년에 수도원장에 선출되면서 거의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전에 조직을 이끌어본 경험이 전혀 없었던 멘델은 새로 배워야 할 것이 아주 많았고, 매일 수도원을 돌보느라 골치 아픈 일들을 처리하다 보니 원예에 몰두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 멘델은 정치 문제로, 특히 정교 분리 문제로 싸우느라 점점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는데, 이 점도 과학 연구 활동을 위축시킨 한 가지 요인이었다. …. 멘델은 교회와 정부가 충돌한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1884년에 세상을 떠났다. …. 지금은 고전이 된 논문이지만 그가 죽고 나서 35년이 지날 때까지 그의 논문을 인용한 과학자는 겨우 11명에 불과했다. 인용한 사람들(대부분 농업과학자)도 그의 실험을 완두콩 교배에 대해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뿐, 유전에 관한 보편 법칙으로 보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실제로 멘델의 이론을 너무 일찍 매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 생물학자들은 멘델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사실들을 세포에서 계속 발견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발견은 자식 대에서 형질들이 특별한 비율로 나타난다는 사실과, 염색체가 유전 정보를 멘델이 확인한 별개의 형질들처럼 별개의 덩어리 단위로 전달한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1900년 무렵에 각주를 샅샅이 뒤지던 세 생물학자가 각자 독자적으로 멘델의 완두콩 논문을 발견하고, 자신들보다 훨씬 앞서서 그 놀라운 발견을 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과학사에서 사라져간 수도사를 부활시켰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멘델은 한 동료에게 “언젠가 내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예언은 실현되었다.”(책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 샘 킨 저)

2. 이바노프: 휴먼지 시도자

the

사람은 영장류이다. 아주 오래 전에는 우리도 원시적인 영장류였다. 그러나 운 좋게 진화를 계속해 나갔다. 두뇌는 발달하였고 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두 달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은 동물이지만, 동물과는 차원이 다른 위치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런 우월감에도 불구하고 몇몇 과학자들은 인간과 동물을 섞어서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계속 하였다. 가장 놀라운 시도를 했던 사람은 1920년대의 일리야 이바노비치 이바노프(Ilya Ivanovich Ivanov)라는 러시아 생물학자였다. 스탈린의 승인 하에 인간 유전자와 침팬지 유전자를 섞는 놀라운 실험을 하였다.

“…. 이바노프는 대규모의 침팬지 하렘을 건강하고 안전하게 유지하는 일이 비용도 많이 들고 관리하기도 성가시자, 실험 과정을 정반대로 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암컷 영장류는 새끼를 가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반면, 정력이 좋은 수컷 한 마리는 적은 비용으로 씨를 많이 뿌릴 수 있다. 그래서 이바노프는 사람의 정자로 임신시킬 암컷 침팬지를 많이 사육하는 대신에 한 수컷 침팬지를 확보해 여성들을 임신시키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계획은 이처럼 아주 간단했다. ….아프리카에서 머문 마지막 날까지 이바노프는 수정을 시킬 여성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아무 성과도 없었다. …. 대신에 수후미에 새로 문을 연 소련영장류연구소에서 자신의 실험을 계속할 생각이었다. …. 1928년 봄에 마침내 이바노프는 그토록 원하던 지원자를 구했다. 그녀의 이름은 그저 ‘G’로만 전한다. …. 하지만 수정을 위해 G를 수후미로 데려오는 절차를 밟는 도중에 타잔(수컷 침팬지)이 뇌출혈로 죽고 말았다. 그전에 타잔의 정액을 추출해 보관하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 한 번 실험은 연기되었다. …. 1930년, 다른 유인원을 구하기도 전에 비밀 경찰이 불확실한 이유로 이바노프를 체포해 카자흐스탄으로 유형을 보냈다. …. 그는 1932년에 엉터리 혐의를 벗었지만, 교도소를 떠나기 하루 전달, 타잔처럼 뇌출혈이 일어났다. 그리고 며칠 후, 그는 하늘나라의 거대한 영장류연구소에서 타잔과 해후했다.” (책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 샘 킨 저)

3. 카메러: (자신도 모르게) 후성유전학의 선구자

과학자들이 자신의 실험을 결과를 부풀릴 경우 당장은 주목을 받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한 비난을 받을 확률이 높다. 어설픈 요소들이 하나 둘씩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험 과정의 기록도 부실하고, 데이터나 사진까지 조작이 되었다는 사살까지 드러나면 더욱 그렇다. 스스로 ‘제2의 다윈’이라고 일컬었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파울 카메러도 그런 사례였다.

“카메러는 1910년에 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 다음 10년 동안 그는 이 결과와 다른 실험 결과(그의 실험은 실패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를 사용해, 적절한 환경만 마련해주면 동물을 어떤 행동을 하게 하거나 어떤 존재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당시에 그런 주장은 마르크스주의적 요소를 강하게 포함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마르크스주의는 불쌍한 대중을 억압하는 유일한 요소는 끔찍한 환경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성적인 사회주의자였던 카메러는 자신의 주장을 인간 사회에까지 확대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양육은 곧 본성이고, 둘은 하나로 통합된 개념이었다. …. 불행하게도, 카메러가 유명해질수록 – 그는 곧 자신을 ‘제2의 다윈’이라고 내세웠다 – 그의 과학은 점점 더 허술해 보였다. 무엇보다도, 카메러는 과학 보고서에서 양서류 실험에 대해 중요한 세부 사항을 밝히지 않았다. 그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고려할 때 많은 생물학자는 카메러가 허풍을 떤다고 생각했는데, 특히 유럽에서 멘델의 불도그를 자처한 윌리엄 베이트슨이 그랬다. …. 점점 거세지는 압력을 견디다 못해 결국 카메러는 1926년에 베이트슨의 편에 선 미국인 생물학자(글래드윈 킹즐리 노블)에게 유일하게 남은 산파두꺼비를 조사하게 했다. …. 노블은 ‘사기’라는 단어를 사용하진 않았지만,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 1926년 9월 23일, 그는 편지에 쓴 대로 빈 외곽에 위치한 시골 오솔길에서 자기 머리에 총을 쏴 자살했다.”(책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 샘 킨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