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2016년 04월 06일 18시 27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4월 06일 18시 27분 KST

복면 쓴 작가 몰래 쓴 대본

GettyImagebank

가면 쓰고 노래하는 ‘복면 가왕’만 있는 게 아니다. 정체를 숨기고 드라마 대본을 쓴 ‘복면 작가’들이 있었다. 지난해 6월 끝난 오광록 주연의 일일드라마 <불굴의 차여사>(문화방송·MBC)와 지난해 8월 끝난 하지원, 이진욱 주연의 주말드라마 <너를 사랑한 시간>(에스비에스·SBS)이 그렇다. 방영 당시 작가의 정체가 베일에 싸였는데, 알고 보니 담당 피디의 아내와 기획피디였다. 두 드라마 모두 작가가 총 세번 교체됐고, 작가 교체 뒤 내용이 산으로 가면서 대체 작가가 누구냐는 비판이 거셌다.

■ <불굴의 차여사> 오린 작가는 피디 아내? <불굴의 차여사>는 박민정 작가가 1회부터 50회까지 대본을 썼고, 이후 오린 작가가 집필했다. 오린 작가는 교체 한달 만인 지난해 4월24일 76회 방송을 끝으로 하차했다. 이후 박찬홍 작가가 이어받아 집필을 마무리했다. 당시 <문화방송> 쪽은 “박민정 작가는 건강상의 이유”로, “오린 작가는 개인과 프로그램 사정상” 하차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오린 작가의 하차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오린 작가가 <불굴의 차여사>를 연출한 오현창 피디의 아내였던 것이다. 오 피디는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작가도 아닌 아내한테 오린이라는 가명으로 드라마를 쓰게 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일부 제작진한테도 함구령을 내렸다고 한다. 오린 작가가 피디의 아내라는 소문이 돌았고, 방송이 한달 정도 나간 뒤에 정체가 알려졌다.

the
MBC 드라마 '불굴의 차여사' 피디 아내가 작가로 참여. MBC

이와 관련해 문화방송은 지난해 자체 징계위원회를 열고, 아내라는 사실을 숨긴 것 등에 대해, 오 피디한테 정직 1개월의 중징계를 내렸다. 오 피디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아내한테 대본을 쓰게 한 것과 이 사실을 숨긴 것에 대해서 “억울한 점이 많지만,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방송사에 (박민정) 작가가 못 쓰겠다고 하면서 다른 작가를 구하기가 힘들었고, 방송을 펑크 낼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피디들 사이 전해진다.

■ <너사시> 작가는 알고 보니 기획피디? 정체를 숨기고 집필한 ‘복면 작가’는 또 있었다. <너를 사랑한 시간>도 이 드라마를 집필하던 정도윤·이하나 작가를 대신해 지난해 7월5일 5회부터 마지막회까지를 작가집단 ‘가일’이 대본을 맡았다. 가일은 지고, 지순, 인해라는 세명의 작가로 구성됐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이들이 누구인지는 일부 제작진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한겨레>와 만난 한 주연 배우는 “바뀐 작가를 만난 적도, 누구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너를 사랑한 시간>은 이미 첫 방송 전 처음 극본을 썼던 민효정 작가가 교체된 바 있다.

the
SBS 드라마 '너를 사랑한 시간' 기획피디가 작가로 참여. SBS

그런데, 최근 가일이 누구인지 드러났다. 지고는 <너를 사랑한 시간>의 송진선 기획피디, 지순은 제작총괄로 이름이 올려져 있던 김정미 기획피디였다. 두 사람이 입봉하지 않은 한 신인 작가와 함께 대본을 썼다. 이 같은 사실은 가일이 최근 한국방송작가협회에 <너를 사랑한 시간>에 대한 저작권료 지급요청을 하면서 알려졌다. 저작권료 지급요청은 직접 집필한 드라마가 방영이 되어야만 할 수 있다. 송 기획피디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방송이 2~3일 정도밖에 안 남은 상황이어서 다른 작가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작가가 올 때까지 메운다는 개념으로 피디 등 제작진과 상의해서 맡게 된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작가료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 “자격증 없다고, 아무나 막?” 작가들의 분노! 드라마 작가들은 알려진 두 경우 외에도 ‘복면 작가’들은 더 많다고 주장한다. 한 드라마 작가는 “몇해 전 방영된 드라마에서는 중간에 그만둔 작가를 대신해 담당 피디가 연출도 하고 대본도 직접 쓰겠다며 작가료까지 요청했다가 방송사에 거절당한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또다른 드라마에서는 실제로 제작사 관계자가 대본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드라마 작가 자격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 작가들은 이들한테 대본을 맡긴 것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한 드라마 작가는 “제작비가 치솟는 등 산업화된 시장에서 드라마가 안될 경우 손해가 막심한데, 대본을 그냥 쉽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책임감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드라마 작가는 “밤을 새워 대본을 써도 좋은 드라마가 나올까 말까 하는데, 기획피디 일까지 하면서 대본을 집필한다는 것 자체가 드라마를 우습게 보는 행위”라고 말했다. 실제로 송 기획피디와 김 기획피디는 <너를 사랑한 시간> 방영 당시 기획피디로도 이름을 함께 올렸다. 이런 사례는 또 있다. 최근에는 <돌아와요 아저씨>(에스비에스)의 현주연 기획피디가 3월 중반부터 노혜영 작가와 함께 공동집필자로 이름을 올렸다.

한 지상파 방송사 드라마국 간부는 “방송에 차질을 빚을까 피디가 압박감을 느꼈을 수도 있고, 작가가 그만두면서 ‘대타’를 찾기가 쉽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이런 무리수는 결과적으로 드라마의 질을 떨어뜨린다”고 말했다. 실제로, 세 드라마 모두 성적이 좋지 않았다. <너를 사랑한 시간>은 평균시청률 6.2%(닐슨코리아 집계), <돌아와요 아저씨>는 가장 최근인 3월31일 방송이 3.8%에 그쳤다.

작품성에 대한 평가도 낮다. <너를 사랑한 시간>은 특히 작가가 바뀐 이후 드라마 내용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내용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면서 드라마 팬들조차 “대체 어떤 드라마인지 내용을 모르겠다”고 비판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일부 배우들도 내용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복면 작가’들의 등장은 드라마 제작 과정 자체를 왜곡시킬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드라마 시장이 커지면서, 제작 명단에 이름이 올려진 경우 받을 수 있는 부가 수익의 규모도 확대되고 있다. 송 기획피디가 저작권료를 요청한 것이 받아들여지게 되면, 앞으로 꼼수를 부리는 ‘복면 작가’들이 우후죽순 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거론된다. 한 드라마 작가는 “저작권료는 캐릭터, 내용 등 창작한 사람이 받아야 한다. 남의 아이디어를 이어받아 단순히 이야기를 끌어갔다고 저작권을 인정해주면, 앞으로 아무나 이런 식으로 대본을 쓰겠다며 ‘가명’으로 등장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