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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1월 17일 09시 06분 KST

그렇다. 아트는 종종 지루하다. 그건 좋은 건지도 모른다

mark rothko

컬러 필드 페인팅의 제왕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바라보면 무수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생생한 오렌지색과 노란색의 사각형들은 당신의 육체적 감각을 일깨울 수 있고, 당신의 육체가 따스함과 편안함을 되새길 수도 있다. 매끈한 사각형이 당신의 생각의 속도를 느리게 만들고, 평온함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 로스코의 작품 앞에 혼자 서 있으면 당신 자신의 고독을 새삼 느낄지도 모른다.

혹은… 그냥 지루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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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다. 이 단어는 우리가 주관적으로 따분하다고, 흥미롭지 않다고 느끼는 대상에 마구잡이로 갖다 붙이는 형용사다. ‘분노의 포도’, 할머니가 매주 나가시는 브리지 모임. 누군가가 이 단어를 예술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림을 ‘지루하다’라고 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림이 따분하다면, 그 그림은 나쁜 그림인가? 어느 철학자에 의하면 이 두 질문의 답은 ‘아니오’다.

“다양한 예술 작품들은 … 우리에게 지루함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지루함을 방해할 때 예술 작품들은 우리에게 지루함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철학 교수 알바 노에가 NPR의 컬럼에 쓴 글이다.

우리는 ‘넷플릭스를 보며 쉬는’ 것부터 웨어러블 테크놀로지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온라인에 접속되어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우리는 진정 나태하게 보내는 순간이 전혀 없는 셈이다. 어쩌면 지루함은 예술이 주는 혜택 중 하나일 거라고 노에는 추측한다.

“우리를 눈물이 날 정도로 지루하게 만드는 힘이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에 대한 단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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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와 프롬 등 역사적 남성 사상가들은 지루함이 무엇인지 고찰하며, 지루함은 무찔러야 할 상태, 혹은 소원해지거나 산업화되거나 심지어 특권을 받는 것에 따른 원치 않는 증상이라고 분류했다. 여성 작가들도 지루함의 즐겁지 않은 결과들을 탐구했다. 버지니아 울프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작가들의 작품과 노에의 글에서 묘사하는 지루함의 긍정적인 면도 있다.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를 지켜 보거나,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을 분석하는 동안 지루함을 느껴도 괜찮은 긍정적인 면이다. 사실 당신은 지루함을 느껴야만 한다. 그 이유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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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으로서의 지루함

노에는 여러 예술가들이 지루함을 의도한다는 것을 정확히 지적한다. 예를 들어 존 발데사리의 ‘나는 지루한 예술은 더 이상 만들지 않겠다’를 보자. 석판 인쇄 작품으로, ‘나는 지루한 예술은 더 이상 만들지 않겠다’는 문구가 반복된다. 상당히 노골적이다.

그러나 지루함을 의도하는 것뿐 아니라, 어떤 예술가들은 의사 표현을 하기 위해 ‘지루한’ 예술을 사용한다. 영국 비평가 찰리 린의 영화 ‘페인트 말리기’를 생각해 보라. 이것은 그가 미국 영화 협회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조직인 영국 영화 등급 분류 위원회(BBFC)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만드는 것이다.

영국 법에 의하면 영국 극장에 걸리는 모든 영화는 BBFC의 인증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영화 제작자들은 BBFC가 장편 영화를 검토하게 하는 데만 1천 파운드 가량의 돈을 내야 한다. 이 정책은 대형 스튜디오와 같은 자금력이 없는 독립 영화 제작자들에게 특히 큰 부담이 된다.

그래서 린은 이것이 공정하지 못한 관행이라 보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제목과 같이 페인트가 마르는 모습으로만 구성된 영화를 만들려고 킥스타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영화 제작자들은 자신의 작품을 인증 받기 위해 BBFC에 돈을 내야 한다. 그러니 BBFC 역시 우리가 돈을 주고 보게 만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앉아서 끝까지 봐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 새 영화 ‘페인트 말리기’에 대한 BBFC 인증을 받으려고 킥스타트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벽돌 벽에 칠한 흰 페인트가 마르는 것을 기나긴 단 한 테이크로 촬영한 영화다.” 그가 캠페인 사이트에 쓴 글이다.

이 경우, 린은 검열자들이 지루함을 느끼기를 원한다. 그의 지루함은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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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으로서의 지루함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렇게 적었다. “소리를 잠재우는 안개처럼 우리 존재의 심연 속 여기 저기를 떠다니는 심오한 지루함은 모든 것과 인간과 자기 자신을 놀라울 정도의 무관심으로 넣어버린다. 이러한 지루함은 존재의 전체를 드러낸다.”

하이데거가 묘사한 지루함은 맥락에서 들어내면 21세기 CEO나 요가 매니아들에게 익숙한 것 같이 들린다. 명상이다. 그는 위키하우에서 ‘집중하고 마음을 조용하게 하여 궁극적으로 더 높은 단계의 의식과 내면의 차분함에 다다르는 것’이라고 정의한 명상의 과정을 묘사한 거나 마찬가지다.

로스코의 그림이 얼마나 지루할 수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라. 앉아서 단순한 색깔을 칠해 놓은 것이 왜 당신의 주의를 사로잡아야 하는 것인가 생각해 볼 때, 당신의 시선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핑크색의 깊이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집중해서 생각할 때, 개인적, 직업적 의문들은 사라진다. 당신은 지루함이라고 불리는 상태에 있을지는 몰라도, 이 한 작품에 사로잡힌 것이다.

노에는 이런 상태를 ‘일시적 문맹, 또는 심지어 일시적 실명’ 상태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일시적인 상태는 우리 자신의 다른 면을 보여줄 수 있다. 혹은 하이데거의 말처럼 우리 존재의 천체를 보여준다. 명상과 상당히 비슷한 것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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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함으로서의 지루함

결국 수전 손택의 유명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예술이 우리를 즐겁게 하거나 매혹시키길 기대해서는 안 된다.”

지루해져라, 라고 반항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다. 지루함을 즐겨라. 예술가들에겐 당신에게 충격을 주거나 짜릿하게 해줄 책임이 없다. 노에의 말처럼, ‘모든 예술이 지루함을 향하고 있을 더 극단적인 가능성도 있다. 지루함이 목표는 아니지만, 예상 가능한 결과이다.’

모든 예술은 당신을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루함이라는 것을 아무 방해없는 생각의 상태로 규정한다면, 우리는 지루한 상태를 즐길 수 있다. 우리는 목적 의식을 갖고 지루함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지루해진다면, 우리의 관심의 프레임이 옳은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손택의 말이다. 지루함으로 끝내버리는 대신, 지루함 속에 빠져들고 생각을 확장해 보라. 궁극적으로 당신은 감각을 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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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예술이 꼭 나쁜 것은 아니고 나쁜 예술이 꼭 지루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바스키아를 보며 “나도 저건 그리겠다.”라고 내뱉기 전에, 루이즈 부르주아의 전시를 본 다음 “이건 예술이 아니야!”라고 매도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건 지루해.”라는 말 역시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선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옥스포드 사전에 실린 ‘지루하다’는 단어의 정의는 당신 머릿속에서 돌아다니는 지루한 감정만큼 미묘한 결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것만 기억해 두라: 지루한 예술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노에는 이렇게 말한다. “예술의 지루함은 소중한 지루함이다.”

허핑턴포스트US의 Yes, Art Is Boring Sometimes, But Maybe That's A Good Thing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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