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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13일 13시 02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12월 13일 13시 02분 KST

김민재, 튀지 않아 특별하다, 네가 그렇다

데뷔 8년 동안 김민재(36)는 조용히 스며들었다. 현란한 애드리브(즉흥대사)를 펼치며 ‘감초 연기’로 주목받는 여느 조연들처럼 톡톡 튀지 않았다. 2007년 <밀양>의 야외기도원 자원봉사자로 상업영화에 데뷔한 뒤 맡은 배역도 국정원 요원 중 한명(드라마 <쓰리 데이즈>) 등 두드러지지 않았다. 주어와 서술어를 바꾼 기형적인 대사들이 넘쳐나는 드라마에서 그의 말투는 대개 일상적 산문체다. 톤의 높낮이가 도드라지지 않고, 자유롭게 내뱉는다. 진짜 삶처럼 평범한데 그래서 특별하다. <쓰리 데이즈>에 함께 출연한 배우 윤서현은 “그런 특징이 드라마가 들뜨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고 캐릭터에 진실성을 심어 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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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종영한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에스비에스)에서 이런 장점은 빛났다. 음산함과 묵직함이 압도하는 드라마에서 그가 연기한 한 경사는 가장 심심한 인물이었다. 비밀을 품은 캐릭터들의 감정 과잉 속에서 기교를 과시하지 않는 그의 연기는 연극 같은 이 드라마가 현실에 발을 딛게 만들었다. 최근 서울 공덕동 <한겨레>사옥을 찾은 김민재는 “욕심을 작품에 반영하지 않는 게 비결”이라고 했다. “배우라면 분량 욕심이 있잖아요. 역할 욕심도 있고. 튈 수도 있지만 내가 해야 하는 포지션이 뭔지를 파악하고 내 역할만 하고 빠지자는 생각으로 연기해요. 이 인물을 어떻게 표현할까보다 작품에서 해결 해야 하는 문제는 무엇인지, 인물들이 그걸 어떻게 보고 접근하고 해결하는지 등을 먼저 생각합니다.”

■ 연극 단역부터 쌓은 내공 튀지 않아서 단번에 알아챌 수 없지만, 어느 틈엔가 시청자의 뇌리에 스며든 비결도 ‘서서히 쌓아올린 내공’이다. 2000년 연극 <관광지대>를 시작으로 2004년 독립영화 <어느 네팔 소녀의 아주 사소한 이야기><화양연화>등에 출연하며 밑바닥부터 시작했다. 28살이던 2007년 <밀양>으로 데뷔한 이후에도 2008년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귀시장 패거리, <범죄와의 전쟁>선원1 등 숱한 단역을 거쳐 ‘마을’까지 걸어왔다. 가시밭길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우연히 본 연극에 매료되어 배우를 꿈꿨고 고등학교 졸업 뒤 대구의 한 극단에 들어가 포스터 붙이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큰물에 가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에 서울에 올라왔지만 기댈 곳도 없고, 돈도 없는 생활이 힘들었어요. 연극영화과에 다니는 배우들은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 보려고 중앙대, 한예종 도강도 많이 했죠.” 28살의 늦은 나이에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 입학했지만, 밤에는 아르바이트하며 학비를 벌어야 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 버티게 해준 좋은 사람들 그러나 돈 주고 못 살 경험들이 고스란히 그 속에 스며들었다. 작은 역이라도 소중히 생각하고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노력이 지금의 명품 조연을 만들었다. 그는 “조연의 캐릭터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조연의 인생은 없잖아요. 입체적이지 못하고 단편적일 때가 많아요. 연기하면서 수십번 다시 찍을 수도 없고. 조연의 집은 딱 필요한 것만 세팅되어 있어요. 그 집에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죠. 우리 생활은 그렇지가 않잖아요. 전 그런 생동감을 살리고 싶어요.” “감독님한테 의견을 내고 주어진 시간 안에서 좋은 것을 찾으려고 스스로를 피곤하게 한다”는데, “그런 고민 자체가 너무 재미있다”고 한다.

때론 인기로 등급을 매기고 서열을 나누는 비인간적인 환경이 힘들었다고도 한다. “남과 비교되는 상황이 온다거나, 누가 누굴 누르려고 한다거나 그런 상황이 싫어 그만두고 싶을 때는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잡아준 건 ‘좋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창동 감독님이나 류승완 감독님부터 유지태 선배, 황정민 선배, 이선균 선배도 그렇고. 누가 특별히 나한테 뭘 해주지 않아도 격려해주는 한마디가 힘이 됐어요.”

■ 비극과 희극의 공존 무명의 시간이 준 고뇌, 그 시간을 견디게 해준 사람들한테서 받은 희망. 그 감정의 소용돌이가 희극과 비극이 공존하는 얼굴을 빚은 걸까. 그는 악역과 선한 역이 동시에 가능한 배우로 꼽힌다. “무섭게 생겨서 사람들이 다가오지 않는다”지만 무표정하게 있으면 매서워 보이던 눈빛이 때로는 표정의 변화 없이도 금세 착한 눈빛으로 변한다. <베테랑>에서 주인공 황정민과 대립하는 비리에 물든 형사 역과 <마을>의 정의로운 경찰을 연기하면서 크게 변화를 주지 않은 것 같은데도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관심사도 ‘비극의 희극화’다. “사람들이 외면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그 안에서 희망을 볼 수 있는 것에 관심이 많아요.” 직접 시나리오도 쓰고 있다. “친구들과 함께 만든 독립영화 <비보호 좌회전><본보야지>등은 개봉도 했어요. 연출하는 친구들과 팀을 만들었고, 직접 쓴 대본으로 영화를 만드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이야기를 많이 쓰고, 그런 이야기들을 올드한 영화가 아니라 뭔가 특별하고 아름다운 영화로 만들고 싶어요.”

올해만 <무뢰한><베테랑><뷰티 인사이드><특종>까지 4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드라마 <마을>까지 이어지면서 2015년을 비상의 해로 만들었다. 알아보는 사람도 부쩍 늘었다는데 “그럴 때마다 어색해서 어깨가 경직된다”고 한다. 기회가 되면 주연의 감성도 느껴보고 싶다는데, 이유가 그답다. “단지 주목받는 주인공이라서가 아니라 주인공을 한다는 건 관객을 대신하는 거잖아요. 관객은 주인공을 통해 경험하니까. 작가가 만든 허구의 세계에서 관객을 대신할 수 있는 그런 포지션을 맡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