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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12일 06시 38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12월 12일 07시 16분 KST

보람, 패션쇼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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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 경기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오랑우탄 ‘보람’에게 진행된 세번째 거울실험에서 보람(10·수컷)이 비닐 더미를 머리에 두르고 거울을 바라보고 있다. 보람은 표준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된 거울실험을 통해 자의식이 확인된 국내 최초의 동물이다.

비인간인격체 오랑우탄 거울실험

국내 최초 동물의 자의식 확인_오랑우탄 거울실험이 남긴 것

비인간인격체(nonhuman person)

생물학적으로 인간과 다르지만(비인간·nonhuman), 자의식, 이타성 등 인간이 독보적으로 가진 것으로 여겨졌던 특성(인격체·personhood)을 일부 동물 종이 공유한다는 주장이다. 제인 구달, 피터 싱어 등이 1993년 결성한 ‘유인원 프로젝트’나 토머스 화이트, 로리 마리노 등 ‘헬싱키 그룹’ 과학자들이 2010년 발표한 ‘고래와 돌고래 권리선언문’은 이런 비인간인격체의 신체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다. 거울실험을 통해 자의식의 존재가 밝혀진 대형유인원, 코끼리, 돌고래 등이 일반적으로 비인간인격체로 인정된다.

피아니스트처럼 긴 손가락이 치렁치렁한 비닐 더미를 끄집어 붉은 머리카락 위에 올려놓았다. 거울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정돈해 중심을 잡았다. 파티에라도 나가려는 듯 오랑우탄 보람(10·수컷)은 지난달 19일 모자를 고쳐 쓰며 자신을 바라봤다.

지난달 11일부터 <한겨레>가 한달 동안 진행한 ‘비인간인격체 프로젝트-오랑우탄 거울실험’에서 오랑우탄 보람이 자아인식 행동을 하는 게 확인됐다. 보람은 물감을 몰래 이마에 칠해놓고 반응을 보는 ‘마킹 테스트’에도 반응을 보임으로써, 국내에서 처음으로 과학적 실험을 통해 자의식이 확인된 동물이 됐다. 거울 속의 자신을 알고 있는 듯한 행동을 하면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해당 종이 자의식이 있다고 본다.

경기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한달 동안 진행된 이번 실험은 오랑우탄 보라(13·암컷), 보석(13·수컷), 보람을 각각 6~8시간 거울에 장시간 노출시키고 마킹 테스트로 확인하는 방식을 택했다. 보라와 보석에게선 특이한 반응이 관찰되지 않았지만, 보람은 거울 노출 40분 만에 자아인식 행동을 벌였다. 평소 눈에 잘 띄지 않는 생식기와 항문을 관찰하고 머리를 매만지는 몸단장 행위도 관찰됐다. 또한 비닐 더미 등 물체를 이용하여 몸을 꾸미고 거울을 통해 확인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치러진 두 차례의 마킹 테스트에서도 보람은 물감이 칠해진 이마를 만지작거림으로써, 거울 속 이미지가 자신임을 확인시켜주었다.

거울실험은 1970년 침팬지에게 처음 시행된 이후 동물의 자의식을 알아보는 수단으로 이용돼왔다. 자신을 타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기초적인 능력이 이 실험을 통해 나타난다. 현재까지 침팬지, 오랑우탄 등 유인원과 돌고래, 코끼리, 유럽까치의 자의식이 확인됐다. 동물보호단체는 이 실험을 근거로 최소한 자의식이 관찰된 종만이라도 동물원 전시와 동물실험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 미국 뉴욕주 법원에서는 침팬지가 자의식이 있는 법적 인격체라며 동물실험용 동물의 인신 구속을 중단하라는 소송이 제기돼 진행중이다.

보라와 보석이 거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이유에 대해 김예나 국립생태원 전문위원은 11일 “둘 다 사회적으로 성숙했고 전시실 유리벽에 반사된 자기 모습에 익숙해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며 “추가적인 조건을 조성해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성 탐구하던 소년 보람, 비닐더미를 머리에 쓴 뒤…

보라에게 지구 옆에 자리를 내준다면, 기꺼이 지구를 들어올렸을 것이다. 보라는 지렛대라는 도구에 능통한 오랑우탄이었다. 일찍이 제인 구달이 나뭇가지로 흰개미를 잡아먹는 침팬지를 보면서 ‘동물도 도구를 사용한다’고 외쳤지만, 보라는 호모 파베르(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들의 들썩거림이 우스울 정도로 도구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지렛대를 이용하여 마르켈루스의 적병을 무찌른 아르키메데스처럼, 오랑우탄 보라는 실험진을 끊임없이 아연실색하게 하면서 무장해제시켰다. 나에게 보라의 이름을 붙이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보라 아르키메데스’로 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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퉤, 퉤, 퉤, 아르키메데스!

지난 11월11일 오전 9시 경기도 과천 서울대공원 유인원사. 보라는 셸터(실내 전시실)에 들어오자마자 거울로 향했다. 깨지지 않는 반사필름 재질의 거울이 유리벽에 붙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라는 거울 앞에 몸을 밀착시키고 몇 분간 앉아 있었다. 그러나 보라는 거울보다 철창 뒤에 숨은 낯선 인간에게 흥미가 있어 보였다. 나에게 다가와 철창의 좁은 틈으로 긴 손가락(오랑우탄은 손가락이 길다!)을 집어넣어 카메라를 빼앗으려고 했다. 나는 꼭 잡고 놓지 않았다. 그러자 왕만두처럼 생긴 큰 입을 오물거리더니, 보라는 퉤, 퉤, 퉤. 그 뒤로 불쾌한 액체 덩어리를 열번은 맞은 거 같다. 그래도 보라가 거울(반사필름)을 구겨 머리에 둘러쓰고 돌아다니는 것만 보지 않았어도 액체의 세례는 추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주욱, 주욱, 주욱. 무대에 등장한 지 20분도 채 되지 않아 보라는 거울을 찢었다. 거울을 붙이며 생긴 작은 공기구멍을 이빨로 공격했다. 이것으로 실험은 끝이었다.

실험 진행 및 다큐 제작을 맡은 박성호 감독은 절치부심했다. 보라뿐만 아니라 오랑우탄 보람에게도 일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날 괴수처럼 등장한 보람은 단호하게 거울을 찢었다. 불과 1~2분 만에 실험은 중단됐다. 사실 임양묵 사육사는 이런 사태를 예견했었다. “사육사 안에 새로운 물체가 생기면 집착하듯 떼어내요. 아마 남아나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 해야 되나? 실험진이 오랑우탄을 거울실험에 끌어들이기 위해 새로 고안한 방법은 ‘아크릴 거울’이었다. 아크릴 거울은 접착성이 좋았다. 이 거울을 오랑우탄이 셸터에서 실외방사장으로 드나드는 출구 문에 설치하자고 박 감독이 제안했다. 위아래로 여닫는 정사각형의 작은 문인데, 아크릴 거울을 문 위에 덮은 뒤 측면의 홈에 끼워넣어 버리면 젓가락질을 하는 킹콩도 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섣불리 뗄 수 없을 거다, 요놈아!”

이틀 뒤인 11월13일 오전 9시, 잔인하게 웃는 박성호 감독이 차린 무대 위로 보라가 다시 등장했다. 거울 앞에 앉아 한참 힘을 쓰던 보라는 셸터 바닥에 깔린 짚더미를 헤치며 다녔다. 지푸라기 하나를 들어 난로에 갖다대는 불장난도 했다.(2009년 비슷한 장면이 포착돼 보라는 유명세를 탔다.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 거울 떼기는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말했다.

“거울 참 잘 붙이셨네요.”

“아, 진짜 그거. 제가 어제 아주 겸손한 마음으로…(붙였습니다)”

그때 ‘우지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보라는 배관공처럼 거울 하단부 틈새를 보고 누워 있었다. 그의 손에는 언제 구했는지 길이 10㎝의 철사가 쥐어져 있었다. 보라는 지렛대의 원리로 아크릴 소재의 거울을 밀어내고 있었다. 우지직. 우지직. 충격의 도가니였다. 거울 하단부의 아크릴 조각을 노획한 보라는 이것을 가지고 촬영진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지렛대 삼아 전시실 유리벽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다.

보라가 이용한 것은 철사였다. 어쩐지 아까부터 보라는 셸터 내부의 짚더미를 헤치고 다녔었다. 지레로 쓸 만한 물건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보라는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 나오는 지렛대의 원리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위대한 이름이여, 보라 파베르 아르키메데스!

보람은 거울서 떨어지지 않았다

40분 동안 거울을 조사하고는

생식기 관찰하고 모자 만들어 써

국내 최초로 자의식이 확인된

‘사춘기 소년’ 오랑우탄

오랑우탄 보라, 보석, 보람

4~5차례 6~8시간 장기노출

물감 칠해 마킹 테스트까지

‘동물의 자의식’ 살펴보는

국내 최초의 거울실험

수수께끼의 열쇠는 유리벽

예로부터 거울은 자의식의 표징이 되어왔다. 거울 속 이미지를 자신으로 바라보는 것은 자신을 객체(대상)로 인식하는 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의 메두사는 페르세우스의 방패에 비친 끔찍한 자신의 모습을 처음 보고는 돌로 굳지 않았나. 자신을 타인의 눈으로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복잡한 사고를 하게 된다. 반성과 성찰 그리고 혼돈, 공감, 이타적 행동 등 고차원적인 행동은 내면 속 다른 사람의 눈을 거쳐 나온 정신작용의 결과다. 18~24개월이 되어서야 인간은 비로소 거울 속의 이미지를 자신으로 인식한다.

1970년 미국의 비교심리학자 고든 갤럽이 침팬지에 대해 거울실험을 마치고 ‘동물도 자의식이 있다’고 발표한 것은 ‘동물도 도구를 사용한다’는 제인 구달의 선언만큼 도발적이었다. 지금은 동물이 어떤 형태든 인간의 자의식과 비슷한 정신작용을 가졌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아졌고, 최근에는 적어도 유인원과 코끼리, 돌고래 등 거울실험을 통과한 동물은 ‘비인간인격체’(nonhuman person)라고 주장하면서 동물원 전시·감금과 동물실험 금지 등 이들의 신체적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한겨레>가 지난달 11일부터 김예나 국립생태원 연구원, 서울대공원 사육사들과 한달 동안 진행한 거울실험에 나온 오랑우탄 보라(13·암컷), 보석(13·수컷), 보람(10·수컷)도 이른바 ‘비인간인격체’로 불리는 오랑우탄이다.

보르네오 말로 ‘숲의 사람’인 오랑우탄 삼총사는 그러나 거울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3차 실험이 이뤄진 16일, 보석은 거울에 붙어 우두커니 자신을 바라보더니 머리로 거울을 쿵쿵쿵 박았다. 몸을 풍선처럼 말아 구른 뒤 잠시 항문을 바라보는 것처럼 행동해 실험진이 잠깐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보석은 이내 거울에서 눈을 떼고 루벤스의 모델처럼 풍만한 몸을 누인 뒤 움직이지 않았다. 보라도 13일 항문을 바라보는 듯한 행동을 한 차례 했다. 나중에 동영상을 확인한 김예나 국립생태원 연구원은 “자아인식 행동으로 보기엔 충분치 않다”고 말했다.

고든 갤럽의 침팬지들은 1차 거울 노출 때 자신을 인식하지 못했다. 생전 거울을 본 적이 없으니 그럴밖에. 대신 위아래로 뛰고 머리로 받았다(①사회적 행동). 거울 속 자신이 다른 동료인 줄 안 것이다. 침팬지들은 그러나 거울의 작용을 천천히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물체가 대체 무엇인지 앞뒤를 살펴보다가(②거울 검사) 어느 순간 입을 벌려 이빨을 쳐다보고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③자아인식 행동). 날이 갈수록 사회적 행동은 줄어들었고 자아인식 행동은 늘어났다. 세 단계를 거쳐 거울 속 이미지가 자신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이번 실험에서 보라, 보석, 보람 그 누구도 사회적 행동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 수수께끼였다. 보라는 도구의 원리를 탐구하는 과학자 행세만 했고, 보석은 하품만 해대는 게으름뱅이였다. 거울은 이들의 관심 밖이었다. 왜 오랑우탄들은 거울에 무관심한가?

언젠가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이 물었다.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평생 어둠 속에 살며 반사음의 파동으로 세상을 보는 박쥐의 감각과 진화된 의식세계를 시각형 동물인 우리가 도저히 알 턱이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인간은 눈으로 살아왔고, 개는 코로 살아왔으며, 박쥐와 돌고래는 음파로 살아왔다. 그럼 오랑우탄이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다행히 오랑우탄은 인간과 진화적 거리가 가깝다. 그럼 동물원에 갇혀 평생을 산 오랑우탄이라면?

오랑우탄이 평생 갇혀 있는 셸터 안에 들어가 보았다. 다리를 구부리고 오랑우탄 눈높이에서 유리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유리벽 표면에 놀란 나의 표정이 반사되고 있었다. 유레카! 제인 구달이 외치듯 나 또한 외쳤다. 오랑우탄은 진작에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메두사처럼 한번도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지 않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괴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보람, 모자를 쓰다

“이건 정말 뗄 수 없을 겁니다. 스프레이 본드. 가장 강력한 걸로 달라고 했어요.”

16일 실험부터 박성호 감독이 이겼다. 보라 아르키메데스는 어디선가 또 철사를 가지고 와 거울을 쑤셔댔지만, 거울 일부만 부러뜨릴 수 있었다.(난로에 붙은 철사를 해체해 써온 사실이 나중에 발견됐다.) 그 뒤엔 실험에 절대 협조하지 않겠다는 듯 새침하게 카메라 앞에서 낮잠 자는 포즈로 누워 몇십분을 그러고 있었다. 박성호 감독이 말했다. “이놈이 우리가 뭘 하려는 걸 아는 거 같아요.”

최대한 과학적으로 설계해 조작된 조건에서 실험을 진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험진이 현장에서 사로잡힌 건 오랑우탄과의 싸움이었다. 특히 보라와의 싸움. 동물의 권력이 실험 전체를 지배했다. 보라는 계속 우리를 약 올리듯 거울을 떼내었다.

그러나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즉, 동물원의 오랑우탄은 거울 이미지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는 것. 이런 점을 반영해 실험을 다시 설계해볼까 했지만-이를테면 거울 이미지에 익숙한 오랑우탄과 그렇지 않은 오랑우탄의 비교 실험-, 오랑우탄과의 싸움에 지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생전 거울 이미지를 보지 못한 오랑우탄을 찾기도 힘들었다. 오랑우탄은 이미 인간과 가까웠다. 그러던 중 열살의 사춘기 소년 보람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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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우탄 거울실험 현장 개요.

이날 오후 셸터에 등장한 보람은 곧장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이미 단번에 거울을 찢어버림으로써 실험진의 가슴을 찢은 전적이 있던 보람이었다. 보람은 거울을 두 손으로 누르다가 고개를 숙이고 틈새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거울을 밀고 받고 두리번거리며 조사했다(거울 검사). 그러기를 40여분, 어느 순간 거울 앞에 앉은 보람이 두 발을 벌리면서 뒤로 눕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눈을 내리깔고 아랫배를 바라봤다. 놀랍게도 보람의 시선은 자신의 생식기를 향하고 있었다.

거울실험에서 생식기 관찰은 전형적인 자아인식 행동이다. 입속의 이빨, 겨드랑이, 생식기와 항문 등 자신의 신체 중 안 보이는 부위에 특히 흥미를 보인다. 보람은 그 뒤 한 시간 이상 자신의 생식기와 항문에 집착했다. 그로테스크한 동작을 취하여 항문도 관찰했다. 항문에 손가락을 집어넣은 뒤 코로 가져와 냄새를 맡았다.(아휴! 더러워!) 몸을 앞뒤로 움직이며 작았다가 커지는 자신의 몸을 관찰했다. 어떤 때는 아예 엎드려서 텔레비전을 보듯 거울 속에 비친 얼굴에 골몰했다. 열살 ‘숲의 사람’은 거울놀이에 몰두했다.

19일 이어진 4차 실험. 보람은 더 이상 거울 검사를 하지 않았다. 거울의 작용을 이해한 그는 거울 앞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앞뒤, 좌우로 뒹굴면서 계속 거울을 흘끔 쳐다봤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어디선가 보람이 치렁치렁한 비닐더미를 가져왔다. 그리고 비닐더미를 머리에 쓰고 거울 앞에 섰다. 다시 매무새를 다듬은 뒤 거울을 바라봤다. 우리는 ‘패션쇼’를 하는 보람을 경이롭게 쳐다보았다. 이 장면은 영장류학자 프란스 더발이 이야기했던 오랑우탄 ‘수마’의 행동과 비슷하다. “수마는 거울을 건네주자 우리에서 샐러드와 상추잎을 가져와 차곡차곡 쌓은 다음, 전체 더미를 머리 위에 얹었다. 그렇게 거울을 쳐다보면서 수마는 야채모자의 위치를 조심스럽게 바로잡았다. 그 모습을 사람들이 보았다면 수마가 결혼식에라도 참석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프란스 더발, <내 안의 유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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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우탄은 나이가 들수록 단독자가 된다. 그래서인지 보라와 보석은 거울놀이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난 2일 보석의 세번째 실험.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한겨레).

식물인간과 오랑우탄

“이 실험의 목적은 무엇이지요?”

닷새 뒤인 24일, 5차 실험을 참관하러 온 한 목사가 물었다. “비인간인격체 개념을 한번 보려고 하는 것이지요.” 박성호 감독이 답하자, 목사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동물이 인격체가 될 수 있지요?” 이번엔 내가 대답했다.

“자, 이렇게 말해보죠. 인간은 두 가지로 정의됩니다. 첫째는 종으로서의 호모 사피엔스. 둘째는 자의식, 고통과 감정, 이타성, 도덕을 가진 인격체로서의 특성. 인간이 인간을 살해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동물을 살해하는 것은 많은 경우 합법입니다. 왜 그럴까요? 동물은 자의식이 없는 열등한 존재여서? 그럼 식물인간을 예로 들어볼까요? 두번째 정의로 보면, 오랑우탄이 인간에 더 가까울까요, 식물인간이 인간에 더 가까울까요? 왜 우리는 오랑우탄은 가두고 식물인간을 보호할까요?” “상당히 도발적인 이야기네요.”

도발적인 이야기는 이내 라캉의 거울이론으로 이어졌다. 어쨌든 이 설명은 철학자 피터 싱어의 그 유명한 ‘종 차별주의 논증’이다. 사실 우리가 돼지를 공장에 가둬 기른 뒤 잡아먹고, 쥐에게 암세포를 집어넣어 실험에 쓰고, 동물쇼에 나가지 않는 돌고래를 굶기는 것은, 고매하고 훌륭한 인본주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게 아니라 그냥 그들이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거다. 인간이라는 종의 이기성 때문에 그런다는 거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마킹 테스트’였다. 동물에게 몰래 물감을 칠해놓고 동물이 그 부위를 만지는지를 보는 거울실험의 최종 관문이다. 인간은 이 실험에서 보통 18~24개월 때 얼굴의 반점을 인지하고 만지작거린다. 그간 관찰됐던 자아인식 행동이 우연이 아니라면, 보람 또한 물감이 칠해진 이마를 만지작거릴 것이다.

“보람아, 보람아.”

24일 아침 일찍 국립생태원의 김예나 연구원이 보람에게 먹이를 주면서 이마에 몰래 하얀 물감을 칠했고, 보람은 깜박 속아 넘어갔다. 오전 9시 인디언 추장처럼 분장한 보람이 셸터의 실험무대에 올랐다. 9시57분께 보람은 거울에서 약 1미터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거울 쪽으로 돌렸다가 이마가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왼손으로 이마를 만지작거리더니 성큼성큼 거울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오른손으로 쥔 플라스틱병으로 다시 이마를 긁적였다. 마킹 테스트 통과! 보람은 자신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처음엔 보라에게 농락당했다

아크릴거울로 교체했지만

철사를 찾아내 쑤셔댔다

‘지렛대의 원리’에 능통한

보라 아르키메데스!

이상하게도 오랑우탄들은

거울에 관심 없었다

‘동물이 되어보라’ 가르침 따라

셸터에 들어간 순간 깨달음

그들은 자신 모습 알고 있었다!

‘비인간인격체’에 대한 불편함은

인간에 대한 ‘불경’ 때문 아닌가

인격성의 증거는 늘어간다

동물도 도덕적 공동체 안에서

인간과 공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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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은 거울에서 떨어지질 않고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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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동작을 취하며 거울 이미지를 확인했고 자주 엎드려서 텔레비전을 보듯 거울을 바라봤다.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한겨레).

보라-보석이 거울을 보지 않은 이유

그간 외국에서 진행된 거울실험 결과를 보면, 동물들은 ‘사회적 행동→거울 검사→자아인식 행동→마킹 테스트 통과’의 전형적인 단계를 밟아갔다. 그러나 서울대공원의 오랑우탄 보라, 보석, 보람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첫째, 사회적 행동이 거의 관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회적 행동은 거울 속 자신을 타자로 착각하는 행동이다. 1970년 고든 갤럽의 침팬지 실험을 보면, 침팬지들은 맨 처음 사회적 행동만 하다가 며칠 뒤 자아인식 행동을 했다. 김예나 연구원은 “야생에서 수컷 성체는 서로 만나면 큰 싸움으로 번진다. 보석은 거울을 보고 흥분하거나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울 속 자신을 다른 개체로 인식한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유리벽에 반사된 자신의 이미지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보라와 보석은 자신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거울이 새로울 게 없었다. 그리고 보람의 경우 3차 실험에서 사회적 행동 없이 거울 검사를 거쳐 40분 만에 자아인식 행동에 돌입했다. 매우 빠른 속도다.

둘째, 보라-보석 커플은 거울을 무시했고, 보람만 거울에 반응을 나타냈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까? 한 가지 가설을 내놓는다면, 보라-보석 커플과 보람 둘 사이에는 ‘유리벽 노출 시간’의 차이가 있다. 보라, 보석은 일주일 중 엿새 이상을 유리벽 셸터와 실외방사장에서 시간을 보낸다. 반면 보람은 이 커플에 비해 셸터와 실외방사장에 나갈 기회가 적었고 자기 이미지를 볼 시간도 적었다.

거기에는 보라-보석 커플과 보람의 삶의 역사가 얽혀 있었다. 보라-보석 커플은 서울대공원에서 유일한 순종 보르네오오랑우탄으로 ‘값진 존재’다. 개인이 애완동물로 키웠던 보라는 2004년 세관에 압수되어 쇠사슬로 목이 묶인 채 들어왔다. 임양묵 사육사는 9일 “너무 예민해서 천장에 딱 붙어 사육사가 다가가질 못할 정도였다”며 “일주일 만에 쇠사슬을 풀어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역시 애완동물로 키워진 순종 보르네오오랑우탄 보석도 이듬해 압수되어 이송됐고, 둘은 어릴 적부터 커플이 되어 내내 함께 컸다.

반면 보람은 2005년 동물원에서 태어난 보르네오, 수마트라 오랑우탄의 잡종이다. 어렸을 적 보라, 보석과 함께 뒹굴며 시간을 보냈지만, 나이가 든 뒤에는 이들로부터 격리됐다. 잡종 탄생을 방지하기 위한 동물원의 원칙 때문이다. 지금 전시공간인 셸터와 실외방사장은 주로 보라-보석 커플이 차지한다. 보람은 일주일에 하루이틀을 제외하고는 좁은 내실에 갇혀 지낸다. 거울실험 진행 중 실외방사장에 나가 있던 보람은 셸터 안에 있는 보라를 발견하자 계속 다가가려고 했다. 둘은 만날 수 없었다.

미국 침팬지 ‘인신보호영장’ 청구

미국의 동물보호단체 ‘논휴먼라이츠’(NhRP)는 2013년 침팬지 네 마리에 대해 불법구금의 해제를 요구하는 ‘인신보호영장’(writ of habeas corpus)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최소한 인격성이 확인된 동물만이라도 감금 및 전시, 동물실험을 금지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지난 7월 논휴먼라이츠는 이 소송에서 패소했지만, 뉴욕주법원은 판결문에서 “법적 인격체(legal personhood) 인정은 생물학이 아닌 정책의 문제”라며 “이를 침팬지로 확대하려는 시도가 이해되고 언젠가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전향적인 의견을 붙였다. 이 소송은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비인간인격체는 급진적 동물해방운동가의 혁명선언문 정도로 치부되어선 안 된다. 과학자들은 꽤나 진지하게 이 문제를 논의해왔다. 저명한 영장류학자 마크 베코프, 프란스 더발, 해양포유류학자 로리 마리노와 다이애나 리스 등은 거울실험을 통해 드러난 자의식 그리고 도구의 이용, 이타적 행동, 공감 능력 등을 들며 동물의 인격성(personhood)에 대해 열린 자세를 취한다. 동물을 인격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우리가 불편해하는 이유는 그것을 인간 종에 대한 ‘불경’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마크 베코프는 말한다. 그러나 동물이 인격체의 특성을 고루 가지고 있다면, 그들을 우리의 도덕적 공동체 안으로 허락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거울실험에 대해 “오랑우탄은 변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변했던 과정”이라고 박성호 감독은 말했다. 거울실험을 통해 우리는 오랑우탄의 자의식을 지켜봤다. 늦었지만 의미있는 한 발을 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