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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3일 10시 49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11월 23일 11시 01분 KST

IMF 경제위기, YS의 책임은 어디까지였나?

김영삼 전 대통령(YS)에 대한 평가에서 빠짐없이 언급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IMF 경제위기’다. 대통령 재임 중이던 1997년, IMF의 구제금융을 받게 된 초유의 사태를 가리킨다. IMF사태는 YS의 대표적인 ‘과오’로 언급되며 퇴임 뒤에도 꼬리표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반면 모든 책임을 YS에게만 묻는 건 옳지 않다는 일부의 반론도 있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는 IMF 사태와 YS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모아봤다.


1. 김영삼 정부는 IMF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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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22일, 한 시민이 신문을 읽고 있는 모습. 동아일보의 1면 제목이 선명하다. ⓒAP

당시 김영상 정부가 IMF 위기 가능성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는 건 여러 기록과 증언으로 확인된다.

먼저 당시 청와대 대변인 겸 공보수석을 지냈던 윤여준 전 전 장관은 23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전했다.

- 그 당시에는 정말 김 전 대통령은 IMF 상황이 닥칠 거라는 건 모르셨던 건가요, 이제와서 이야기합니다마는.

윤여준 : “제가 청와대 근무를 하다가 이제 내각으로 나간 게 8월 초거든요. 사실은 그 직전까지도 김 대통령께서는 한국경제가 순탄하게 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으셨어요.”

- 장밋빛 보고를.

윤여준 : “그렇죠. 그런데 이분은 경제정책에 대해서 조예가 다른 분야에서는 좀 떨어지는 분이기 때문에 자연히 맡겨놓고 계시다시피 했거든요.”

- 주변에 경제 전문가들한테.

윤여준 : “그렇죠. 경제 관료라든지 많은 분야의 고위 공직자들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에게 맡기셨는데. 사실은 여러 사람이 한국 경제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얘기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영문인지 대통령께서는 늘 한국경제가 연착륙을 했다는 식의 보고를 받으셨거든요. 그러니 IMF가 터지고 얼마나 크게 낙담하셨겠습니까?”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11월23일)

조선비즈에 따르면, 1999년 국회 ‘IMF환란위기 특별위원회’는 정부의 늑장 대응이 구제금융 사태를 불렀다고 결론 내렸다.

환란특위 보고서는 "외환보유액이 어느 정도 있었던 1997년 10월중에 정부가 IMF와 협상을 시작했더라면 IMF 지원조건 협상에서 보다 유리한 입장 확보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보고서는 “윤진식 전 대통령비서관과 윤증현 전 재경원금융정책실장 등이 경제위기를 알리고 경상수지 적자의 큰 원인중의 하나인 환율을 조정할 것을 건의했으나 당시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의 반대로 관철되지 못했다"고 밝혔다.

IMF 환란특위 조사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경상수지 적자 누증 등으로 외환위기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보고를 수 차례 받았으나 대응책을 제때 마련하지 못하고 오락가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비즈 11월22일)


2.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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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22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손명순 여사와 함께 APEC 정상회담 참석차 출국하는 모습. ⓒAP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4년 11월 아시아태평양협력체(APEC) 정상회의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처음으로 ‘세계화’ 구상을 밝혔다. 이후 한국은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고, 1996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합류했다. 이에 발맞춰 자본자유화, 금융·자본시장 개방 등의 ‘선진화 정책’도 줄줄이 시행됐다.

그러나 고성장을 구가하던 한국 경제는 곧 큰 위기를 겪게 된다. OECD 가입을 두고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것”이라고 자찬했던 김 전 대통령의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OECD 가입조건이 아직 한국에는 '시기상조'라는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근본적으로 외화부족 국가였던 탓에 해외로 돈이 빠져나가는 데 워낙 민감하기도 했다. (중략) 정부 손아귀를 벗어난 금융시장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외국인 순증권투자 잔액은 1995년 117억달러에서 1996년 151억달러로 급증했다. 종합금융회사(종금사) 30여개가 난립하면서 이들의 앞다툰 외화차입은 고스란히 외채부담으로 쌓였다.

결국 이듬해 글로벌 금융·외환시장 상황은 급격히 악화하면서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해외자본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무분별한 차입에 나섰던 금융회사들은 한계상황에 이른다. (서울경제 11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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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를 아낍시다' : 1997년 12월1일, 한 시민이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모습. ⓒAP

다만 치밀한 준비 없이 자본시장 문호를 연 데 따른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몰려드는 외자로 원화가치는 급등했고, 수출 부진에다 해외여행 자유화까지 겹쳐 경상수지 적자는 역대 최대 규모로 늘어났다. 단기외채 역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한국경제 11월22일)

하지만 경기가 꺾이면서 과잉투자가 문제가 됐다. 경기확장적 정책을 지속하면서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말이 나왔다. YS 정부는 대내 여건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시장 개방을 진행한데다, 1994년 삼성그룹의 승용차 시장 진출을 허용하는 등 산업 정책에서도 무리수를 뒀다. (조선비즈 11월22일)


3. “균형 있게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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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3일, 임창렬 당시 경제부총리(가운데)가 구제금융을 대가로 고강도의 구조조정을 실시하기로 했다는 합의 내용을 발표한 뒤 미셸 캉드쉬(오른쪽) 당시 IMF 총재와 함께 악수하는 모습. 왼쪽은 이경식 당시 한국은행 총재. ⓒAP

상대적으로 소수이긴 하지만, IMF를 김영삼 정부의 책임으로만 볼 수 없다는 의견도 없는 건 아니다.

임창렬 당시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은 매일경제에 보낸 글에서 “항간에 알려진 내용은 균형 있게 알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며 이렇게 적었다.

궁극적인 원인은 재벌의 부실 경영이 너무 쌓여 있었던 데에 있었다. 재벌 30개 중에 절반이 무너졌다. 은행도 대부분이 자본잠식된 상태였다. 한보철강은 부채비율이 3000%였는데, 자기자본의 30배를 대출해줄 정도로 은행은 방임을 했다.

물론 외환위기에 진입할 당시 정부가 정책 대응을 잘못한 측면은 있다. 그러나 재벌의 차입경영과 은행의 부실 대출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다. (매일경제 11월22일)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같은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외환위기는 국제금융 질서에서 약속과 규범들이 연쇄반응을 일으킨 것으로 단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IMF 위기는 외부요인과 내부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는 미국 금리인상 등 세계경제의 영향도 있었고, 국내 대기업들이 차입을 통한 대규모 신규 투자로 고성장기의 성장 동력을 유지하려던 상황도 맞물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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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28일, 시민단체들이 경제개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모습. ⓒAP

그러나 김영삼 정부가 서둘러 ‘선진화 정책’을 밀어 붙인 반면 ‘구조개혁’을 제때에 단행하지 못한 것이 위기를 초래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는 크게 달라질 게 없어 보인다.

1990년대 초반 불황을 넘긴 한국 대기업들은 1994~1995년의 호황 속에서 신규 투자를 위한 대규모 신용창출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에 김영삼 정부는 1995년부터 종합금융사 설립을 허용했고,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과 함께 국제적 자본이동을 신속하게 자유화시켰다. (경향신문 10월27일)

특히 일부 대기업의 선단식 경영으로 쌓인 부채가 국가경제에 부담을 주고 있었는데도 정부가 구조조정에 손대지 못한 점이 결정적 실책이었다. 경상수지 적자 확대를 감수하면서까지 외환시장에 개입해 환율을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려 애쓰다가 외환보유액을 소진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11월23일)

장인철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지난해 11월 쓴 칼럼에는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구조개혁 타이밍과 관련해 ‘목욕탕 수리론’과 ‘외과수술론’이 회자된 적이 있었다. 김영삼 정부 초기 일시적 불황이 닥쳤을 때다. 당시 경제기획원을 중심으로 정통 경제관료들은 목욕탕도 손님이 뜸한 여름에 수리를 하는 것처럼, 구조개혁도 불황에 하는 게 효율적이니 저성장을 감내하면서 구조개혁에 치중하자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사상 첫 지방선거가 닥친 상황에서 당장 불황이 부담스러웠던 청와대 측에선 큰 수술을 감당하려면 기초체력이 필요하다며 일단 경기부터 살리자는 ‘외과수술론’을 들고 나왔다. 그 결과 초강력 경기부양책인 ‘신경제 100일 계획’이 채택됐고, 그 여파로 경기과열이 이어져 97년 외환위기의 원인(遠因)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한국일보 2014년 11월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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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구제금융 실무 협상을 위해 김포공항에 도착한 IMF 실무진의 모습. ⓒ한겨레

김영삼 전 대통령은 흔히 ‘고도성장기의 마지막 대통령’으로 불린다. 취임 첫 해인 1993년에는 6.8%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1994년에는 9.2%, 1995년에는 9.6%로 정점을 찍었다. 1996년에도 성장률은 7.6%에 달했다. 소위 ‘선진화 정책’을 밀어붙였던 김영삼 정부의 자신감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상당한 권한과 책임을 위임 받았다는 경제관료들은 위기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던 정태인 칼폴라니사회연구소 소장은 고성장을 누리던 당시의 경제관료들에게는 위기대응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며 이렇게 말했다.

정태인 : “우리나라가 1979년에 박정희 시대 말기 위기가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 피살로 이어졌잖아요. 그 이후에 사실은 경제위기가 이렇다 할 경제 위기가 없었고, 특히 1980년대 말에는 3저 호황이 있었어요. 그리고 동시에 노동계 대투쟁으로 임금도 올라갔거든요. 그래서 내수와 수출이 같이 늘어났던 가장 좋았던 시기입니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가요. 그래서 관료들이 위기대응하는 능력이 없었죠.”

“그러니까 DJ 대통령 되기 전까지는 위기경보시스템이라는 것도 없었어요. 위기가 일어날 조짐을 미리 파악해서 준비를 하는 그런 시스템도 없었기 때문에 굉장히 무능한 상태였고. 그리고 또 하나는 자본 자유화라고 하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정책을 쓰면서 준비는 하나도 안 하고...”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11월23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숨을 거둔 11월22일은 꼭 18년 전, 당시 김영삼 정부가 IMF 구제금융 신청 사실을 발표한 날이었다.


South Korea - Talks on IMF loan - AP Archive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