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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3일 06시 31분 KST

YS를 기억할 수 있는 ‘6가지 장면'

kim

한국 현대사에서 23일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 만큼 영욕이 뚜렷하게 교차하는 정치인은 드물다. 독재시절엔 불굴의 민주화투사였고, 군부 정권을 종식한 최초의 ‘문민 대통령’이 됐으며, 대통령 재임 중엔 군 사조직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실시, 전두환 노태우 처벌 등 과감하고 단호한 모습을 보이며 많은 개혁을 성취했다. 김대중과 함께 ‘양김’으로 불리거나 김종필을 포함해 ‘3김’으로 회자되며 한국정치에 굵고 선명한 족적을 남긴 ‘정치 거목’이었다. 하지만 그는 집권을 위해 3당 합당을 통해 독재세력과 손잡은 ‘변신의 정치인’이었고, 대통령 재직 때엔 오락가락 대북정책과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위기 등으로 다른 성과들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차남 현철씨와 홍인길 등 측근들의 권력형 비리도 짙은 얼룩으로 남았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

YH노동자 보호하다 의원직 제명…부마항쟁 기폭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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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직업 정치인 김영삼을 결연한 민주화 투사로 단련시킨 것은 박정희·전두환의 군사독재였다. 1979년 5월 김영삼의 신민당 총재직 복귀를 계기로 고조되기 시작한 유신 정권과의 갈등은 그해 8월 와이에이치(YH)무역 사건으로 폭발하고 만다. 당시 김영삼은 회사 정상화와 생존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서울 마포 신민당사에서 들어와 농성을 벌이는 여성 노동자들을 보호·지원했는데, 8월11일 경찰 진입과정에서 당직자와 의원들이 폭행당하고 여성 노동자 1명이 옥상에서 추락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원내 철야농성을 진두지휘하고 진상 규명 백서를 발간하며 정권과 전면전을 벌인다.

와이에이치 사건 직후 법원은 김영삼의 신민당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을 내린다. 이후 미국 정부에 박정희 정권 지원 중단을 요구한 김영삼의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빌미로 집권당은 그의 의원직 제명안을 강행처리했는데, 이는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경남 지역의 여론을 크게 악화시켰다. 10월15일 부산대생들의 시국선언을 시작으로 부산·마산 일원으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됐고, 시민들까지 가세하며 대규모 항쟁으로 비화한다. 정부는 부산과 마산·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가까스로 시위를 진압했지만, 이 지역에서의 광범위한 민심 이반은 정권 내부 권력 암투를 심화시켜 10월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 암살과 유신정권 붕괴로 이어진다.

‘야당 투사’로서 김영삼의 이력이 가장 빛났던 시기는 전두환 정권 전반기인 1983년이다. 광주민주화운동 3주기인 5월18일 김영삼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5개항의 성명을 발표하고 상도동 자택에서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그의 단식은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끌면서 23일동안 지속됐다. 당시 단식 중단을 요구하며 병실로 찾아온 민정당 사무총장 권익현에게 “(나를 해외로 보내고 싶으면) 시체로 만든 뒤에 해외로 부치면 된다”며 무안을 줘 돌려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이세영 '한겨레' 기자

‘동지이자 라이벌’ DJ와의 관계

민주화 쌍두마차…87년 대선 단일화 실패뒤 다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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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을 한 시대, 한 무대에 세운 보이지 않는 손의 장난이 참으로 얄궂기만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씨 자서전 <동행>의 한 대목이다. 하지만 얄궂기만 한 운명이란 없다. 두 사람의 성장은 때론 경쟁하고 때론 협력하며 이뤄졌다.

본격적인 대결의 막은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 때 올랐다. 김영삼은 당선 수락 연설문까지 준비했을 정도로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철승과 손잡은 김대중의 역전승이었다. 그래도 김영삼은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유세에 참여했다.

박정희 치하에서 두 사람은 함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다. 한배를 탄 동지였다. “서로 너무나 달랐지만 사이는 참 좋았어요. 와이에스가 종종 디제이에게 ‘니는 도대체 쉬운 것도 와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노?’ 하고 농을 걸었고, 그럼 디제이는 ‘자네는 말이여, 매사를 너무 쉽게 생각한당게~’라고 맞받았죠.” 박찬종 전 의원의 회고다.

전두환 치하에서 두 사람은 아예 한 몸이 됐다. 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꾸려 공동의장이 됐고, 85년엔 신민당을 함께 창당해 공동의장을 맡는다. 두 사람을 빼고 87년 6월 항쟁의 승리를 기록할 수는 없다. 하지만 87년 대선후보 단일화에 실패했고 그 후유증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90년 김영삼은 3당합당을 하며 여당의 길을 택했고 92년 대선에서 먼저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대중도 정계복귀 뒤 97년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두 사람의 소망이 모두 이뤄진 셈이다. 둘 사이에는 한때 화해의 기운이 감돌았으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의 사면 문제로 다시는 관계가 복원되지 않았다.

김영삼은 김대중 서거 일주일 전에 병상을 찾아 “이제 화해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한다”라고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떠나면서 동지이자 경쟁자였던 두 사람의 화해는 후대의 몫으로 남겨졌다.

김의겸 '한겨레' 선임기자

거대보수정당 낳은 3당 합당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로” 군부세력과 손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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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월22일 월요일 오전 10시.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가 3당 합당을 통한 신당 창당을 전격 발표한다. 선언문의 제목은 ‘새로운 역사의 창조를 위한 공동선언’이었지만, 부산경남(피케이) 지역을 정치적 기반 삼아 군부독재 세력과 싸우던 김영삼의 갑작스런 표변은 영호남 지역구도 고착과 영남 지역패권주의 심화, ‘보수의 기형적 우위’로 특징지워지는 ‘한국정치의 불구성’의 원인으로 작용하며 한국정치에 길고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1노2김’에 의한 민주자유당의 탄생은 1988년 4월 13대 총선 이후 각 당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였다.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이어 제2야당 신세로 전락한 김영삼과 34년만의 여소야대 구도에 불안을 느낀 노태우의 합작품이었다.

당시 ‘밀실야합’이란 야당과 재야 민주세력의 거센 비판에 김 전 대통령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며 ‘구국의 결단’이라고 맞섰다. 그는 ‘3당 합당으로 인한 호남 고립 심화’에 대해서는 “4당 체제는 국민의 선택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평화민주당이 호남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했지만, 이후 한국의 정치지형은 그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돌진했다.

김 전 대통령이 ‘호랑이’를 잡았는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잡아먹히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차기 대선을 노리던 박철언 등 민정계의 거센 반발과 견제, 자신을 겨냥한 3당 합당 당시 내각제 이면합의 폭로 등을 극복하고 1992년 민자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고, 김영삼은 ‘호랑이굴로 들어간’지 2년 10개월여만에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남일 '한겨레' 기자

문민정부 출범

고위공직자 재산공개…현철씨·측근 비리로 빛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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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나면 부수고, 밀어불이고, 몰아냈다. 전광석화였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첫 해는 발 빠르게 전개된 개혁정책들로 숨가쁘게 지나갔다.

대통령과 가족의 재산을 먼저 공개했던 김영삼은 고위공직자 재산공개를 추진하며 “소리 없는 명예혁명이 진행중”이라며 “명예가 아닌 부를 택하려면 공직을 떠나라”고 했다. 권위주의 잔재를 청산한다며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을 시민에게 개방했다. “정치자금을 단 한 푼도 받지 않겠다”며 검은돈이 오가던 대통령 안가들을 철거하라고 지시했다. 국가안전기획부는 기능을 축소했고 5·16과 12·12는 ‘쿠데타’로 성격을 명확히 했으며, 4·19와 5·18, 6·10항쟁에도 합당한 역사적 지위를 부여했다.

한국갤럽이 김영삼 대통령 취임 한 달 뒤 조사한 지지율은 70.9%, 그해 2~3분기 지지율은 무려 83%에 달했다. 김영삼이 청와대에서 즐겨먹은 하얀 칼국수는 부정부패를 일소하는 상징으로 떠올랐다. 중국신문에까지 ‘청정 정치운동’의 상징으로 거론될 정도였다. 하지만, 권력의 음지에서 칼국수는 그가 모르게 불어터지고 있었다.

결정타는 1997년 불거진 차남 현철씨의 인사·공천·이권 개입 등 국정 농단 의혹이었다. 한보그룹 편법대출 의혹 등과 관련해 뒷돈을 받은 ‘상도동 집사’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은 “나는 바람에 날리는 깃털에 불과하다”고 항변했고, 세간의 관심은 ‘몸통’이 누구냐로 쏠렸다. ‘소통령’으로 불리던 아들 현철씨가 구속되자 김영삼은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 여기고 있다”며 대국민사과를 해야 했다.

그해 국회 대정부질의에서는 “칼국수 잔치는 끝났다”는 말이 나왔다. 임기 마지막해 갤럽이 조사한 김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6%였다.

김남일 '한겨레'기자

군사정권 청산

군부 사조직 ‘하나회’ 숙청…전두환·노태우 심판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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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정부’를 출범시켜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이어져온 30여년 군사정권의 마침표를 찍은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군사정권을 떠받쳐온 군 내부의 사조직을 척결해 ‘쿠데타 위험에서 자유로운 정치’의 길을 열었다.

“깜짝 놀랬재?” 대통령에 취임한 지 보름도 안 된 1993년 3월9일 아침, 김영삼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날 예고없이 전격적으로 이뤄진 김진영(육사 17기)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육사 19기) 기무사령관 경질을 가리킨 말이었다. 문민정부 최대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군부 핵심 사조직 ‘하나회’ 숙청 등 군 개혁은 정부 출범 직후 5개월간 질풍노도로 이뤄졌다.

하나회는 1961년 전두환·노태우·정호용 등 육사 11기생들이 맺은 친목 모임에서 비롯됐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 전두환은 박정희 당시 소장을 만난 뒤 ‘군사혁명’ 지지 시위를 벌였고, 박정희는 하나회를 친위조직으로 키웠다. 1979년 10·26 이후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는 두 차례의 연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문민정부’를 이끈 김영삼이 하나회의 군내 기반을 와해시켜 군부 정치개입의 불씨를 제거하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김영삼은 하나회의 핵심이자 ‘1980년 광주학살’의 주역인 전두환·노태우의 처벌에는 미온적이었다. 1993년 5월 김영삼은 5·18 특별담화에서 “진상규명과 관련해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며 전·노 처벌 여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해 7월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희대의 궤변을 앞세워 전·노 등의 12·12 쿠데타엔 기소유예 처분을, 5·18 광주민주화운동 시민학살엔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전·노 처벌 여론은 더욱 거세졌고, 결국 95년 12월 국회는 군사반란에 대한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하는 ‘5·18 특별법’을 만들었다. 이후 대법원은 1997년 4월 전·노 두 전직 대통령한테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을 확정 선고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퇴임을 두 달여 앞둔 97년 12월22일 전·노 두 사람에 대한 특별사면과 복권을 단행했다.

김진철 '한겨레' 기자

경제정책 명암

실명제 등 경제개혁 초석 성과…IMF 구제금융 ‘오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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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은 금융 실명제와 부동산 실명거래 등을 시행해 경제개혁에 굵직한 성과를 남겼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극복하지 못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사진)하는 뼈아픈 과오를 남기는 등 그의 경제정책에는 그림자도 적지 않다.

김영삼 정부는 집권 초기 80%가 넘는 높은 지지율에 힘입어, 금융·부동산실명제를 단행했다. 김영삼은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45분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고,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을 근원적으로 단절할 수 없다”며 “이 시각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뤄진다”고 전격 발표했다. 청와대 안에서도 극소수만 알 정도로 철통 보안 속에 이뤄진 조처였다. ‘목요일 저녁의 충격’이라고 표현할 만큼,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발표였다. 금융실명제로 부동산에 자금이 쏠릴 우려가 제기되자 1995년엔 부동산실명제를 시행했다. 부동산실명거래는 부동산 탈세와 투기 방지에 큰 구실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1996년 12월)도 김영삼 정부 때 이뤄졌다. 하지만 오이시디 가입은 급속한 시장개방과 자본 유출입으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초래한 빌미가 됐다.

김영삼 정부는 오이시디 가입을 계기로 경제개혁·개방 정책에 나섰지만, 1997년 1월 재계 14위 한보그룹 계열사인 한보철강 부도를 계기로 대기업 연쇄 부도 사태를 맞았다. 삼미그룹과 기아자동차가 차례로 도산했다. 1997년 한 해 동안 부도를 낸 대기업의 금융권 여신만 30조원을 넘어섰다.

결국 국외 금융기관의 부채 상환 요구에 외환보유액이 바닥나자, 1997년 11월22일 김영삼은 아이엠에프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됐다는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서거일은 아이엠에프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고 발표한 그날과 겹치게 됐다.

김소연 '한겨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