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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1일 07시 02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11월 21일 07시 03분 KST

불안장애가 정형돈 한사람뿐일까

osen

징조는 코앞에 있었다. 냉장고를 부탁한다고 외칠 때 힘겨워하던 목소리나 <주간 아이돌>을 외치며 뻗는 처진 팔, 두 손을 모아 펼치는 <무한도전>의 시그니처 포즈조차 버거워하는 듯한 표정. 일단 힘겹게 도입부를 지나고 나면 자연스레 말문이 트였으니 그 위화감도 곧 사라졌지만, 날이 갈수록 표정이 어두워지는 건 눈 밝은 이라면 진작에 알아챘을 일이다. 그는 MBC <무한도전> ‘생활계획표’ 특집에선 숙소에 누워 있기만 했고, KBS <우리동네 예체능> 사이클 편에선 유독 지친 모습을 보여줬으며, 유도 편에서는 늘 벤치를 지켜야 했다. ‘4대천왕’이란 호칭과 점점 늘어가는 방송 개수가 보여주는 화려함으로도 불안에 잠식된 모습을 감추는 건 역부족이어서, 폐렴으로 JTBC <냉장고를 부탁해>를 비웠을 때 불길한 예감은 이미 가득 찬 물잔처럼 찰랑거렸다. 징조가 쌓이면 사달이 난다. 지난 12일 정형돈이 불안장애를 비롯한 건강상의 이유로 전격적인 방송 중단을 발표했을 때,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면서도 “왜 이런 예감은 틀리지 않나”라 탄식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가 불안장애에 시달리고 있단 사실은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벌써 3년 전에, 정형돈은 능력보다 너무 큰 성공을 한 것 같단 생각 끝에 불안장애가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SBS <힐링캠프>에서 털어놓았다. 그도 그럴 법했다. 웃기지 못한다는 이유로 일부 팬들로부터 <무한도전>에서 빠지라는 이야기를 몇 년씩 듣던 사람이, 어느 순간 갑자기 ‘미친 존재감’이란 별호를 얻으며 프로그램의 중심축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아무리 대중의 기호가 본디 변덕스러운 거라고 하지만 180도 달라진 대중의 반응에 초연해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정형돈이 본격적으로 잠재력을 터뜨리기 전 <무한도전>에서 유지했던 ‘웃기는 것 빼곤 다 잘하는’ 캐릭터 또한 부담이 되기는 매한가지였다. 발군의 운동신경 때문에 몸을 써야 하는 도전에서 주축이 된 일이 잦았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부상을 입고 뜻처럼 따라주지 않는 몸을 자책했다. 반복된 머리 부상으로 보는 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프로레슬링 특집이나, 손목 부상과 포지션 적응 실패로 자신을 괴롭히다가 시합 직전에 콕스로 포지션을 변경한 조정 특집에서 정형돈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숨기지 못했다. <무한도전>이 장기 프로젝트를 끝내는 순간 제일 먼저 눈물을 흘리는 것은 어느새 그의 역할이 되었다.

방송인이란 얼마나 잔인한 직업인가. 평범한 이들의 사소한 실수는 기껏해야 직장 안, 넓게 잡아도 업계 안에서나 회자가 되고 끝나지만 방송인의 실수는 전국에 중계되어 모두의 평가 대상이 된다. 정형돈은 ‘못 웃기는 개그맨’ 캐릭터로 활동할 때는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라는 팬들의 항의를 받았고, 잦은 부상으로 장기 프로젝트에서 활약하지 못할 때에는 엄살을 피우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다 큰 어른이 흘리는 눈물이 부끄러워 웃자고 던진 ‘눈물 콘셉트’란 농담조차 어떤 이들은 ‘가식적’이라며 죽자고 받았다. 대중을 상대해야 하는 연예인에게 꼭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힐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님에도, 그가 3년 만에 <힐링캠프>에 출연해 김제동의 ‘4대강’ 농담에 “그런 위험한 얘기는 나에게 하지 말아달라. 나는 정치적 소신을 밝히지 않겠다”고 대꾸하자 어떤 이들은 “속내를 안 보여줄 거면 뭐하러 <힐링캠프>에 나왔느냐”고 소리를 높였다. 자신에 대해 쉽고 그럴싸한 단어들로 정의 내리려던 방청객들의 시도에 규정 지어지길 거부하며 확답을 피하자 ‘최악의 토크쇼 게스트’ 운운하는 기사가 포털 사이트에 걸렸다. 선수는 하나인데 심판을 자처한 이는 너무 많았다.

물론 최근의 정형돈이 모든 걸 다 잘하고 있었단 이야기는 아니다. 처음 그의 ‘뻔뻔함’이 빛을 발했던 비결은 관계의 역전이었다. 옷을 평범하다 못해 못 입는 축에 끼던 정형돈이 패션 아이콘 지드래곤에게 옷차림을 지적하며 패션 센스를 개조해주겠다 말할 때, 음악적 재능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에픽하이나 정재형에게 그들의 음악세계를 지적할 때, 이영표에게 축구를 알려주겠다고 나설 때 밀려오는 어처구니없음. 평범함의 아이콘 정형돈이 비범한 이들을 훈계하고 우위를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웃음을 자아내는 방법이었다. 그러던 그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4대천왕’이자 가요제 스타메이커임을 강조하며 자신이 원하는 콘셉트의 곡을 파트너에게 관철시키고, <냉장고를 부탁해>에선 여성 게스트에게겐 요리 실력을 물어보고 남성 게스트 냉장고 속 마스크팩은 열애설 농담의 소재로 활용하는 것으로 흔한 남녀 성역할 모델을 재탕했다. 진행하는 프로그램 수는 늘어나고 대중의 기대치는 그에 따라 점점 늘어만 가니, 개그 스타일의 방향을 유지하는 게 어려워진 것이다. 세상의 권력관계를 뻔뻔스레 뒤집어 보임으로써 지금의 자리에 올라간 그는, 어느 순간 뻔뻔스러운 태도는 유지하되 암묵적인 약속에는 눈을 감았다.

이런 변화를 본인이 감지 못했을까? 그럴 리가. 정형돈은 <무한도전>에서 이렇다 할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시절에도 어느 대목에서 어떻게 웃기면 좋을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방송작가 수준으로 분석했던 사람이고, 한때나마 작가로 전향할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던 사람이다. 개그 스타일이 변해가는 양상을 누구보다 먼저 파악한 것은 정형돈 본인이었으리라. 그러나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할 정도로, 최근의 정형돈에게 실리는 무게감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그는 여섯 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그중 그가 메인 진행자 역할을 수행하는 프로그램만 세 개였다. 어찌나 일이 많았는지 <무한도전>이 10주년 기념 포상휴가로 위장한 ‘해외 극한알바’ 특집을 마련했을 때 그는 일정을 맞추기 위해 잠도 못 잔 채 몇 개의 프로그램을 한꺼번에 몰아서 찍어야 했고, 방콕 공항에서 ‘사실 이번 특집은 해외 극한알바’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성을 잃고 진심으로 역정을 내는 모습을 노출했다. 카메라 앞에서 감정을 감추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바빠진 상태였지만, 지금처럼 상황이 심각해지기 전에 잠시 멈춰 숨을 고르는 것 또한 쉽사리 결정할 수는 없었을 테다. 한국의 방송환경이 서구권처럼 시즌제 제작이 보편적이어서 정기적으로 쉴 수 있는 환경인 것도 아닌데다가, 한번 외면하기 시작하면 잔인할 정도로 차가워질 수 있는 게 대중이란 사실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어느 나라든 고도로 발달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모습은 대동소이하겠지만, 한국 사회가 연예인을 대하는 태도의 이면엔 연예인 또한 사람이란 사실을 애써 지우려는 무의식이 유독 강하게 작동한다. 정형돈의 투병 소식에 안타까움을 표하는 이들의 물결 반대편엔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연예인 걱정”이라는 훈계가 버티고 있다. 과거 배우자와 함께 쇼핑을 하고 공연을 보러 갔던 사진은 졸지에 활동 중단 뒤 휴식을 취하는 동안 찍은 사진으로 둔갑해 대형 오보가 되고 “쉬겠다는 사람 좀 내버려두라”는 말에는 “이것도 관심인데 고마운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대꾸가 달린다. 방송활동을 할 때에도 도대체 쉴 틈을 주지 않았던 이들은, 방송활동을 잠정 중단하고 병을 치료하겠다는 마당에도 그의 근황을 집요하게 묻는다. 사생활조차 상품화하는 거간꾼으로 전락한 언론과, 관심을 줬으니 그에 맞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소비자로서의 대중이 빚어낸 살풍경. 쾌유를 비는 행위조차 능숙하게 조회수 장사 산업 안으로 포섭해버리는 이 현장에 사람은 없다.

누군가는 내가 일상적인 가십매체들의 호들갑이나 연예산업의 생리를 두고 지나치게 과민반응한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더 많은 인기와 관심을 받으면서도 멀쩡하게 방송활동을 하고 있는 연예인도 있는데, 누가 그렇게 무리하라고 등을 떠밀었느냐며 말이다. 그러나 서두에서 말했던 것처럼 징조가 쌓이는 걸 방치하면 결국 사달이 나는 법이다.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이조차 행복하긴커녕 대중에게 외면당할까 두려워 결국 고장날 때까지 자신을 혹사시켜야 하는 산업, 그리고 그 투병 과정마저 어떻게든 정보로 가공해 상품화하려는 언론. 어쩌면 진짜 멈춰 서서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는지 살펴봐야 할 이들은 우리인지도 모른다. 정형돈의 쾌유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