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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0일 15시 58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11월 20일 15시 59분 KST

추억의 전자제품을 고쳐주는 세운상가의 장인들

“욕망의 이름으로 나를 찍어낸 곳”(유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2>)이었던 ‘세운상가’가 “비어 있는 가게가 여덟 개 건너 하나씩이라 쇠락해가는 분위기를 감출 수 없는”(황정은 <백의 그림자>) 공간으로 변한 건 덧없는 세월 탓일까.

1967년 국내 최초 주상복합건물로 서울 종로구 청계4가에 들어선 세운상가는 완공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이 “세상의 기운이 다 모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전자제품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1980~90년대 용산 전자상가와 강변 테크노마트에 ‘중심지’를 내주고, 전자제품의 온·오프라인 유통망이 커지면서 활력을 잃어갔다. 상인들조차도 “상가가 너무 낙후돼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고 푸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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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빛을 잃어가던 세운상가에 최근 새로운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시가 외부단체에 위탁해 진행하는 세운상가 활성화 프로그램 ‘수리수리얍’ 프로젝트 때문이다. ‘세운공공은 대학’(세운공공)팀의 청년 5명은 “여기 계신 분들이 가장 잘하시는 일로 상가 활성화를 하겠다”며 세운상가의 숙련된 장인들과 추억의 전자제품을 고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세운공공은 각 분야의 적합한 장인들을 찾아내려 상인 270명과 인터뷰를 했다. 지난 9월, 1차로 신청자를 15명 모집해 10월에 수리를 진행했다. 유학시절 추억이 깃든 라디오, 어릴 때 즐겨 하던 게임기, 돌아가신 장인어른이 쓰시던 워크맨 등…. 세운상가를 찾은 전자제품엔 다양한 추억이 어려 있었다.

지난달 28일 오래된 오디오를 들고 온 의사 황보준원(41)씨는 20여년 만에 세운상가를 찾았다고 했다. 30여년 전 아버지가 구매한 영국제 쿼드(Quad)사 오디오를 고칠 곳을 찾던 그는 인터넷에서 우연히 ‘수리수리얍’ 프로젝트의 공고를 봤다. 황보씨는 “어릴 때 오디오에 턴테이블을 연결해서 ‘에어서플라이’나 ‘본조비’ 음반을 많이 들었다. 고쳐서 다시 쓰고 싶은데 잘못 맡겼다가 ‘바가지’ 쓰거나 망가지진 않을까 걱정하던 차에 인터넷에서 공고를 보고 ‘이거다’ 싶었다”고 말했다.

황보씨의 오디오는 세운상가 7층 장인 이승근(70)씨의 좁은 작업실 작업대에 놓였다. 이씨는 경력 50년을 넘긴 진공관·트랜지스터 오디오 분야 기술자다. 그는 어린 시절 청계천에서 배터리를 주워 놀다가 공업고교를 졸업한 뒤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다. “이것(쿼드 405-2)도 인기가 많았지”라며 겉면을 뜯어본 이씨는 “십중팔구 트랜스(변압기) 고장”이라고 곧바로 진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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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남짓 장인의 손을 거친 오디오는 지난 9일 목소리를 찾아 주인의 품으로 돌아왔다. 수리된 오디오를 받아 병원에 설치했다는 황보씨는 “느낌뿐일지도 모르지만 이 오디오로 들으면 음색이 더 따뜻하게 들린다. 곧 겨울이 오니 캐럴을 틀어야겠다”고 했다. 100만원 수준에 팔린다는 중고 오디오에 청구된 수리비는 7만원. 값을 매길 수 없는 추억도 얹혔다.

세운공공에서는 다음주께부터 2차 ‘수리수리얍’ 신청을 받는다. 블로그(http://oouniv.org)에서 일정 확인과 수리 신청을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