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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0일 05시 08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11월 10일 05시 09분 KST

없는 집 둘째 딸 덕선, 88년을 소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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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 깍쟁이 언니와 귀한 남동생 사이에 낀, 없는 집의 둘째 딸은 어려서부터 스스로 살길을 찾아내야 했다. 반지하방이 연탄가스로 뒤덮여도 누가 구해주지 않는다. 스스로 문을 밀치고 기어나와 동치미 한사발을 알아서 들이키며 정신을 차려야한다. 그렇게 질기게 버텨 오늘날 우리 나이로 마흔다섯이 된 성덕선은 "제가요, 연탄가스를 장복(장기복용)했어요. 한 20년 마셨거든요. 그래서 가끔씩 정신이…"라고 능청스럽게 말한다.

걸스데이 혜리(21)가 자신을 둘러싼 우려를 한방에 날리며 1988년의 열여덟 여고생으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지난 6일 시작한 tvN '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 성덕선은 혜리를 만나 단숨에 화제의 인물이 됐다.

악다구니를 쓰는 연기는 물론이고, 발칙한 여고생의 모습과 속깊은 착한 심성의 둘째딸의 모습, '유머1번지' 등 당시 코미디프로를 온몸으로 즐기는 유쾌한 천성의 소유자를 오가는 혜리의 연기에 시청자들은 이구동성 합격점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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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서울올림픽 피켓걸의 배짱과 근성

1994년생인 아이돌 혜리에게 1988년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역사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모든 것이 너무 촌스러워 오글거리지만, 그 시대의 인물로 변신한 것이 혜리에게는 기회가 됐다.

아무리 예쁜 척을 해도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는 듯 우스꽝스럽게만 보이는 시절, 그것도 전교 999등 하는 '특공대'(특별히 공부 못하는 대가리)인 성덕선이 시청자에게 가식을 부릴 여지는 손톱만큼도 없다.

아이돌로서는 예쁜 모습만 보여줬고, 앞선 드라마에서도 인형처럼 예쁜 모습을 보여줬던 혜리는 항아리 같은 모양의 알록달록 청바지에 펑퍼짐한 청재킷, '깍두기' 단발머리 차림으로 변신해 흥미를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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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뒷전이지만 88서울올림픽 피켓걸로 발탁돼 6개월간 하루도 지각하지 않고 성실하게 연습하는 모습을 통해 배짱과 근성을 발휘한 성덕선은 무엇보다 어린시절부터 쌍문동 골목길에서 매일같이 놀던 4명의 동갑내기 남자아이들과 지금까지도 남녀칠세부동석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소년같은 캐릭터다. 이러한 캐릭터는 걸스데이에 가려졌던 혜리의 숨겨진 매력을 끄집어 내고 있다.

눈두덩이는 '시퍼렇게' 칠하고 입술을 '시뻘겋게' 칠하며, 스카치테이프로 쌍꺼풀을 강조하는 귀신같은 화장법을 선보이고, 주먹코를 강조하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연기를 하며, 뒤뚱뒤뚱 특이한 자세로 기를 쓰고 뜀박질을 하는 성덕선의 천진난만한 캐릭터는 망가질수록 혜리를 더 예뻐보이게 하는 마력을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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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집 둘째딸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맷집

성덕선은 언니랑 생일이 사흘 차이인 까닭에 열여덟이 되도록 생일상을 따로 받지 못했고 늘 생일이 빠른 언니의 생일 케이크를 재활용하는 신세였다.

그는 그러나 때때로 가족 앞에서 서러움에 울컥할지언정, 결코 밖에서는 가난에 기죽지 않는다. 성덕선의 단단한 맷집과 둘째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입은 혜리는 성격 좋고 무던하며 심성이 착한 서민 가정의 딸내미를 살갑게 구현해낸다.

부잣집 깍쟁이 역할을 맡았다면 혜리는 눈에 띄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 반대의 처지인 씩씩한 성덕선의 캐릭터는 야한 하이틴로맨스를 탐독하는 여고생의 발칙함과 어울려 코믹 시대극의 익살스러움과 따스함을 끌어올린다.

세살 위 언니와 하루에도 열두번 머리채를 붙잡고 죽일 듯이 싸우고, 예전에는 만만했지만 지금은 자신보다 머리가 한두개 더 있는 골목길 남자 친구들의 머리를 여전히 쥐어박으며 놀다가도 "왜 나한테는 계란 후라이 안줘! 나도 콩자반 싫어해!"라고 북받치는 감정을 토해내는 혜리의 변화무쌍한 연기에는 미운 점이 눈에 띄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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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자신의 가족이 세들어 사는 주인집의 아저씨와도 허물없이 "아이고 김사장 반갑구만, 반가워요" "실례실례 실례합니다~"라며 온몸으로 TV 코미디 프로를 흉내내는 해맑은 넉살과 88올림픽 개막식에서 성화에 불타 죽은 비둘기 사체를 신문지에 싸와 묻어주겠다고 말하는 착한 심성은 혜리의 맑고 큰 두 눈망울과 어울려 성덕선의 사랑스러움을 극대화한다.

'하이드 지킬, 나' '선암여고 탐정단' '맛있는 인생' 등 혜리가 전작에서 보여준 것이 전형적인 신인의 경직된 연기였다면, 그는 '응답하라 1988'을 통해 마침내 진짜 연기의 세계로 들어선 듯하다.

그의 소속사 드림티엔터테인먼트의 이형진 이사는 "우리 역시 혜리의 연기력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신원호 PD가 캐스팅 직후 별도의 연기 레슨을 받지 못하게 하고 본인이 직접 집중적으로 혜리의 연기 교육을 시켰다. 또 촬영하면서는 성덕선이 돋보이게 잘 살려주신 덕분에 반응이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