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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2일 10시 28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10월 12일 11시 00분 KST

박혁권,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지난주, 화제의 티브이 프로그램을 놓치지 않고 챙겨 본 시청자라면 경험했을 일이다.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스모키 메이크업과 잘 다듬은 수염을 과시하며 교태를 부리던 남자가, 수요일이 되자 숫기 없는 표정으로 더듬더듬 이야기를 하다 말고 연신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걸 보는 희한한 경험.

에스비에스 월화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외모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무관 길태미 역을 천연덕스럽게 소화해 ‘길태미 메이크업’이란 단어를 검색순위에 올린 박혁권은, 바로 다음날 방영된 문화방송 예능 <라디오스타>에서는 병적으로 낯가림 심한 본래 모습을 보여주며 시청자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는 조심스럽게 ‘실례’임을 강조하다가, <무한도전> 촬영 뒤 혈변을 보았다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할 땐 민망함도 잊은 듯 진지하게 “혈변이 나올 정도로 베개 싸움을 하는 게 토크보다 쉽다”며 “여기서도 혈변을 볼까, 볼 수 있을까” 덤덤히 되묻는 이 희한한 남자. 수년간 여러 작품을 통해 그의 낯을 익힌 사람이라 해도 이번주 월화와 수요일 사이의 낙차를 경험한 이라면 한번쯤은 중얼거렸으리라. 당신,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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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스타' 출연 모습

물론 <육룡이 나르샤>가 아니라 그 어떤 작품에서 처음 마주쳤다 하더라도, 박혁권은 좀처럼 잊기 힘든 독특한 첫인상을 남기는 배우다.

후배 검사에 대한 콤플렉스와 살아남아야겠다는 욕망, 보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인정욕이 징그럽게 배합된 에스비에스 <펀치>(2014)의 조강재 검사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는 제자를 천재를 발굴하고 육성해냈다는 허명을 얻기 위해 차마 내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밀회>(2014)의 음대 교수 강준형처럼 점잖은 얼굴 뒤에 속물근성을 꾹꾹 눌러 담은 다큐멘터리형 인물을 연기할 때에도. 육상계의 김연아를 키우겠다며 제자들에게 육상과는 큰 상관이 없어 보이는 시 수업을 듣게 만드는 <도약선생>(2011)의 전영록 코치, 촌스러운 파마머리 족발집 배달원으로 위장한 <의형제>(2010) 속 국가정보원 직원 고경남, 유명 스타가 되고 싶지만 현실은 영유아 대상 전대물 출연 배우로 살아가고 있는 <은하해방전선>(2007)의 ‘혁권 더 그레이트’처럼 어딘가 구름 속을 살고 있는 듯한 인물로 분했을 때에도. 박혁권은 자신이 맡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순간만큼은 그것이 픽션임을 잊게 만드는 몰입도로 보는 이들을 설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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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은하해방전선'

아마 어떤 배역을 맡든 그 인물의 궁극적인 동기부터 접근하는 박혁권의 접근 방식에 기인하는 것이리라. 보는 이를 속이기 위해선 그것이 아무리 찌질하고 우스꽝스러운 설정이더라도 배우만큼은 진심이어야 한다는 진지한 접근방식. 인물의 욕망과 언행의 이유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배우로서 무책임한 것이라 잘라 말하는 박혁권의 연기 철학은 그가 맡은 인물에 기묘한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듀오 유브이(UV)가 수세기에 걸쳐 인류 문명사 곳곳에 등장해 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코믹한 캐릭터였음에도, 엠넷 페이크 다큐멘터리 <유브이 신드롬 비긴즈>(2011)의 기 소보르망 박사는 단 한순간도 진지함을 내려놓지 않았다. 극의 해설자 기 소보르망 박사가 “유비무환은 ‘유브이가 있어야 환란이 없다’는 뜻”이란 헛소리를 진심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늘어놓으며 극의 중심을 잡아준 덕분에, 유세윤이 바지 지퍼 사이로 장풍을 쏘고 뮤지가 신석기 시대를 기억하는 이 황당무계한 설정의 코미디는 허공으로 붕 날아가버리는 대신 지면에 발을 붙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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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펀치'

배우가 인물의 욕망을 파악하는 데 집착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일까 싶지만, 박혁권이 자신의 연기 스승들조차 좌절시켰다던 암울했던 과거를 극복한 과정을 살펴보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연기가 하고 싶단 생각에 남들보다 늦게 들어간 대학교에서, 그는 머릿속에 구상한 연기를 밖으로 꺼내지 못해 당황하다가 제 차례가 끝나고 나면 터져나오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도망가버리는 날들을 보냈다. 공부도 어려워 보이지 않았고 고등학교 생활조차 우스워 보여 평범한 학교생활을 검정고시로 우회해버렸던 박혁권에게, 연기는 생애 처음으로 접한 난공불락이었던 셈이다. 훗날 그는 자신이 뭔가 열심히 해본 적이 없기에 잘하는 방법도 몰랐던 것 같았노라 회고했다. 간절히 원한 것이 없었기에 욕망하는 바를 이루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도 알 수 없었다. 매일 자신의 연기를 일지에 기록해가며 머릿속의 연기를 밖으로 꺼내 보이는 법을 익혀갔다는 박혁권의 경험담은 얼핏 연기론에 국한된 이야기로 들리기 쉽지만, 그때 박혁권은 자기 자신을 움직이게 만드는 궁극적인 동기를 발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든 노력을 감수하게 만들고 인물을 움직이게 만드는 욕망. 그가 “인물의 동기를 확신하지 못하면 못 움직이는 편”이라 말할 때, 그 말은 여느 배우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질량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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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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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하얀 거탑'

자기 욕망에 대한 확신과 뚜렷한 당위 없인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에게, 살면서 생기는 갖가지 자질구레한 일들은 적응하기 어려운 과제가 된다. 2007년 문화방송 <하얀거탑>에 출연할 무렵 처음으로 인터뷰를 위해 메이크업과 헤어디자인을 받으며 그는 “애완견 미용대회 나가는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만드는지 굉장히 불쾌했”다 말했고, 8년이 지난 지금도 예능프로그램에서 방송용 살가움을 가장하기보단 진행자들과의 거리감이 실제로 가실 때까지 말을 아낀다. 인터뷰에서 자신이 잘 보여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기 전엔 그 모든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와 친해져야 할 이유를 느끼기 전엔 굳이 친한 척을 하지 않는 것이다. <라디오스타>에서 윤종신은 박혁권이 술자리에서 “그 작품 그냥 그랬어”라고 에둘러 말하는 임원희에게 “형 그거 망했죠”라고 첨삭해줬던 에피소드를 말하며 “술 취하면 되게 정확해지는 스타일”이라고 표현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술의 힘이 아니라 상대를 편하게 대할 당위를 느끼느냐 아니냐의 차이였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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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 출연 모습

대신 이런 이에게 ‘베개 싸움을 해서 팀을 승리로 이끈다’ 같은 납득할 수 있는 명확한 목표가 주어지면 그들은 혈변을 볼 때까지 최선을 다한다. 여말선초 부패한 권문세족의 나르시시즘을 온몸으로 담아낸 <육룡이 나르샤> 속 길태미를 연기하기 위해, 박혁권은 웬만큼 색조화장을 해봤다는 이들조차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할 섬세한 그러데이션 화장을 눈가에 얹고 얼굴 근육의 미세한 씰룩거림을 통제해가며 인물을 극세필로 그려낸다. 충격적인 외양에 놀란 시청자들은 박혁권이 입을 여는 순간 한차례 더 놀란다. 그저 코믹한 악역 조연이 아니라 스스로 ‘삼한제일검’이라는 자부심을 안고 살아가는 무인 캐릭터이기에, 박혁권은 짜증과 권태가 섞인 길태미의 나른한 말투 안에 뾰족한 날을 심어뒀다. 고작 2회가 방영되었을 뿐인 <육룡이 나르샤> 이야기가 온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뒤덮었던 건, 시청자들에게 길태미란 독특한 인물의 내면을 납득시켜야 한다는 박혁권의 명확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저렇게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 인간이 한 명 정도는 있었을 법도 하지’라는 시청자 반응이 나온 건 당연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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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여전히 대중에게 자연인 박혁권은 낯선 존재다. 그는 연기자가 굳이 자신의 생물학적 나이를 밝혀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해 포털 사이트에 자신의 생년월일을 지워달라고 부탁하고, 사인이 없다는 이유로 팬들의 사인 요청에도 연신 사과를 하며 자리를 뜨는 사람이다. 아마 그가 연기 외적으로 대중에게 어필해야 할 필요성을 간곡하게 느끼지 않는 한, 박혁권의 이런 삶의 태도는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마스라고 애인에게 꼭 이벤트를 해야 하느냐고 묻고, “사람들 피곤하고 다음날에도 일해야 하는데 늦은 시간에 오라 그러는 게” 귀찮을 것 같다며 자신이 죽으면 장례식도 하지 말라 할 거라는 극단적인 이야기 뒤에는, 사람들이 으레 하는 인사치레나 예의를 챙길 시간에 본질을 한뼘이라도 더 주시하고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목표에 더 가까워지고자 하는 삶의 태도가 숨어 있는 거니까. 그리고 보통 이렇게 곁가지를 쳐내고 핵심만 남기는 외골수형 인간을, 사람들은 흔히 ‘진짜배기’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