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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19일 12시 51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9월 19일 12시 55분 KST

내가 어쩌다 어른이 돼서...

OTVN
<39금 토크쇼-어쩌다 어른>에는 정신건강의학 전문의인 양재진(왼쪽부터), 개그맨 남희석, 배우 김상중, 개그맨 서경석이 출연한다. 어른의 삶을 이야기하는데, 다 남자다. <오티브이엔> 제공

<39금 토크쇼-어쩌다 어른> <키즈 돌직구쇼-내 나이가 어때서>. 이번달에 각각 오티브이엔(O tvN)과 제이티비시(JTBC)에서 첫 방송을 시작한 프로그램의 제목이다. <어쩌다 어른>에는 40·50대 중년 남자 4명이, <내 나이가 어때서>(이하 <내 나이>)에는 7~9살 어린이 11명이 출연하는 등 출연진의 나이대는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어른’에 대해 얘기하는 프로그램이라는 점이다. <어쩌다 어른>은 제목 그대로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되어버린 40·50대 어른들의 이야기를, <내 나이>는 어른들의 천태만상에 아이들이 돌직구를 던지는 어른 뒷담화를 내세운다.

<어쩌다 어른>은 티브이엔과 엠넷, 온스타일 등의 채널을 갖고 있는 씨제이이앤엠(CJ E&M)이 새로운 라이프 엔터테인먼트 채널 오티브이엔의 개국과 함께 선보인 프로그램이다. 40·50대를 타깃으로 어른들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어쩌다 어른>은 ‘진짜 사는 재미’를 더하겠다는 채널의 취지에 제법 들어맞는 기획이다. 출연자들도 배우 김상중과 개그맨 남희석, 서경석, 정신건강의학 전문의 양재진 등 40대 초반부터 50대 초반까지 나이대로 구성했다. 그런데 명단을 보니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어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출연진은 모두 남자다. 육아도, 요리도, 토론도, 퀴즈도, 토크도 모두 남자들이 하는 요즘 티브이 트렌드에 발맞춘(!) 구성이겠지만, 여성 출연자가 없는데 <어쩌다 어른>이라는 제목은 썩 들어맞지 않는다. <어쩌다 아저씨>면 몰라도. 아니다 다를까 이 프로그램의 첫 방송은 네 명의 출연진이 서울의 한 장어구이집에 모여 앉아 ‘장어 꼬리’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지극히 ‘아저씨’스러운 이 장면을 보면 이 프로그램에서 지칭하는 어른이 ‘남자 어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여성 출연자가 없는 건 아니다. 매회 두 명의 게스트가 출연하는데 그중 한 명은 여성이다. 1회에는 배우 김혜은이, 2회에는 방송인 이본이 출연했다. 여성 출연자가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1회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나이가 들어 주변에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데 “오빠”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는 김상중의 이야기에 김혜은이 “오빠”라고 부르자 김상중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폈다. 이 프로그램에서 여성 출연자의 역할과 대한민국 남자 어른의 세계에서 여성의 역할이 무엇인지 투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다음부터는 가족을 위해 일한 것뿐인데 가족에서 소외된 ‘아빠’의 외로움 같은, 이미 수많은 프로그램을 통해 듣고 본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직장에서의 힘듦을 알아주는 가족이 없어 집 대신 술집에서 위로를 받는다는, 중년 남성들의 술자리에서나 할 만한 지극히 ‘남자-아빠-남편’ 중심적인 대화가 오갔다. ‘여자 어른’이나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스쳐 지나갈 뿐이다. 아빠의 존재감이 없는 것은 과거 여성들을 희생시키면서 남성들이 많은 걸 누려온 결과라는 전문의 양재진이 코멘트가 있지만, 그게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고 ‘여자 어른’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또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2회도 1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구나 스무살이 넘으면 어른이 된다. 어른의 이야기는 자기 스스로를 책임지는 ‘독립’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포함해 인간관계, 사회와의 관계를 설정하고 그에 따라 직업이나 결혼 등을 결정한다. 그 과정에서 고민하고, 고민의 결과로 선택을 하고, 선택에 책임을 진다. 어른은 자신을 책임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외로운 순간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어른의 외로움은 보편적인 이야기다. 어른들 중에 아빠만 특별히 외로운 게 아니고, 아빠만 난감한 게 아니다. 그럼에도 이 프로그램은 중년 남자들이 아빠로서 자신의 외로움을 가여워하면서 자기계발서의 한 챕터나 다름없는 가벼운 공감과 위로를 나누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쓰면서 이를 어른의 이야기로 포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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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즈 돌직구쇼-내 나이가 어때서> 촬영 현장

<내 나이>는 방송인 이휘재와 박지윤, 개그맨 김준현이 진행을 맡고 어린이 11명이 돌직구 위원으로 출연하는 토크쇼 형식의 프로그램이다. 한 가지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코너 ‘순수의 시대’와 연예인 출연자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코너 ‘동심 보감’으로 진행되는 형식은 <비정상회담>과 비슷하다.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은 어린이 출연자들이다. 어른을 시청층으로 하는 프로그램이기에 어린이의 시선으로 던진 ‘독설’이 얼마나 어른 시청자에게 새롭게 다가갈 것이며 어떤 메시지로 전달될 것인지가 이 프로그램의 핵심이다.

어린이 출연자들은 첫 회에서 각자 자기만의 키워드로 자신을 소개한다. 그런데 그 키워드와 소개 내용이 자연스럽지가 않다. ‘욕망’ ‘먹방’ ‘빅데이터’ ‘연애상담’ ‘뇌섹’ ‘허세’ 등의 키워드가 등장하고 “여자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어서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12명의 여자를 만나는 게 목표”라는 멘트가 나온다. 7~9살 어린이들의 순수한 자기소개라고는 볼 수 없는, 요즘 유행하는 말들과 방송계에서 뜨는 캐릭터들을 갖다 붙인 내용이 아닌가. 토론이 시작되면 머릿속은 더 혼란스러워진다. ‘나이를 속이는 어른들 이해할 수 있다 vs 없다’ ‘맞벌이하는 부모님 이해할 수 있다 vs 없다’ 등의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는데, 어떤 아이는 포털사이트 지식백과를 통째로 외운 것처럼 온갖 정보와 지식을 속사포로 얘기하고, 어떤 아이들은 “인생 부질없다” “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야 한다” “다들 아마추어처럼 왜 이래?” 같은 말을 하고, 어떤 아이는 “거짓말할 시간에 돈이나 더 버세요!”라며 독설을 날린다. 어린이 출연자들 모두 열정적으로 토론에 참여하지만, 사실 어린이들은 모두 어른의 말을 흉내내거나 어른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입을 딱 벌어지게 하는 어린이 출연자들의 멘트들이 전부 제작진이 건넨 대본에 쓰여 있는 대사는 아닐 거다. 아역 연기자도 있고 방송 출연 경험이 있는 어린이도 있으니 즉석에서 생각나는 대로 하는 말일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게 아이들의 말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이들은 본래 어른들의 말을 흉내 내고 따라 한다. 부모 등 가족들이 하는 말, 티브이나 스마트폰 등 여러 플랫폼을 통해 듣고 본 말들을 마치 자기 얘기처럼 한다. 그 모습을 본 어른들은,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들이 그러하듯 신기한 눈길로 바라보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줄 아니?”라며 감탄한다. 어른들의 말과 싱크로율이 높으면 높을수록 신기함의 정도도 높아지고, 어린이들은 더 열심히 흉내 내고 따라 한다. 이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처럼 어린이들의 의견이나 조언을 독설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건 어린이들이 내뱉는 말들이 어른의 말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내 나이>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어린이 출연자들에게 잘못된 어른 흉내 내기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토론을 진행하면서 ‘돈을 잘 버는데 바쁜 부모님 vs 가난하지만 시간이 많은 부모님’ ‘화장을 하고 예쁘게 나온 여자 vs 화장을 안 했지만 데이트 비용을 같이 내는 여자’ 등을 던지며 선택하라고 말한다. 돈과 여성의 외모 등을 놓고 저울질을 시키는, 어른에게 던지기에도 부끄러운 내용을 어린이에게 묻는다. 매회 상황극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여자 어린이와 남자 어른 출연자에게 부부 역할을 주고 ‘명품 백을 사달라는 아내의 부탁을 거절해야 한다’는 상황을 제시한다. 어린이들에게 데이트 비용에 대한 토론을 시키거나 명품 백을 사달라는 아내의 역할을 하게 하는 건, 여성 혐오 사회의 단면을 어린이들에게 재현하라고 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른’은 2010년대 들어 한국에서 참 고생이 많은 단어들 중 하나다. 사회가 병 주고 약 주고를 반복하느라 졸지에 중환자 신세가 된 ‘청춘’만큼은 아니지만 ‘어른’도 여기저기에서 천 번 흔들리느라 정신이 없다. 언젠가부터 전국민의 고민 해결사를 자처하고 있는 티브이가 이번에는 어른을 공감하고 위로해주겠다고 나섰다가 위로는커녕 ‘어른’을 민낯 그대로 들켜버렸다. 어른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면서 어른을 얘기하고, 잘못된 어른을 흉내 내는 어린이를 보며 박수를 치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지금 우리의 모습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