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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18일 07시 46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9월 18일 07시 47분 KST

[빅데이터 돋보기] 청년의 상실감이 만들어낸 유행어 '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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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부채 있음, 집에 비데 없음, 옷장 안에 유행 지났는데도 꾸역꾸역 쟁여놓은 옷이 많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온라인에서 유행처럼 번진 '흙수저 빙고게임'에 등장하는 항목들이다. 가로, 세로, 대각선 어느 방향으로 든 5개 항목에 해당해 한 줄로 연결되면 그 사람은 '흙수저'라고 한다.

여기서 '흙수저'는 유복한 부모 밑에서 나고 자랐다는 뜻의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에서 따온 것으로, 가난의 대물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수저론'은 "한국에서의 삶이 마치 지옥(hell)과도 같다"고 부르짖는 누리꾼들이 만들어 낸 이론이다. 이와 맞물려 온라인에서는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청년층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다. 한반도(조선)를 '지옥'에 빚댄 말이다.

'헬조선'은 취업난, 전세난 등으로 상실감을 느끼는 청년층의 현실을 일정 부분 반영한 유행어로 보이지만, 우리나라를 '지옥'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편향적인 언어라는 지적도 있다.

어쨌든 올해 들어 온라인상에는 '헬조선'이라는 단어의 노출 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8일 빅데이터 분석업체 다음소프트에 의뢰해 블로그 6억9천922만7천349건과 트위터 72억8천472만2천255건을 분석해보니 '헬조선' 언급량은 2014년 5천277건에서 올해 9월 초까지 10만1천700건으로 껑충 뛰었다.

올해 월별 언급량을 살펴보면 4월(1만1천504건), 6월(1만2천985건), 7월(20만94건), 8월(2만2천915건)으로 '헬조선'을 언급하는 글이 늘어나는 추세였다.

twitter

채널별로는 트위터에 올라온 글이 10만45천956건, 블로그에 올라온 글이 2천89건으로 트위터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98%에 달했다.

'헬조선'을 이야기할 때 주로 등장하는 인물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젊은이와 여성이다.

인물 연관어 분석을 해보면 '국민'이 2천574건으로 가장 빈번하게 등장했고, '청년'과 '학생'이 각각 1천206건, 1천20건 언급돼 그 뒤를 따랐다.

그래서인지 '헬조선'의 생활 연관어로 '결혼'(368건), '취업'(69건), '연애'(44건) 등 젊은 세대가 주로 고민하는 주제가 상위권을 차지했다.

젊은 층에 이어 많이 등장한 인물인 '여자'(1천20건), '미혼모'(677건), '임산부'(671건), '엄마'(626건), '며느리'(537건), '시어머니'(535건) 등은 모두 여성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트위터에서 686회나 리트윗된 "헬조선 탈출을 외치며 외국으로 유학 또는 이민을 시도한 주위 사람을 보면 대체로 여자들이 잘 안 돌아온다. 남자들 중 다수가 그래도 조국이 낫다며 돌아오는데…. 이건 매우 상징적인 현상이 아닐까 싶다"는 글은 '여성'과 '헬조선'의 관계를 보여준다.

주목할 만한 '헬조선'의 연관어로는 '노오력'(757건)이 있다. "이 세상에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어딨느냐"는 기성세대의 훈계를 비꼬는 표현이다. '노력' 사이에 들어간 '오'가 많아질수록 아니꼬운 정도가 심해진다.

최재원 다음소프트 이사는 "올해 SNS에서 10만건 당 빈도 기준 '헬조선'이 갑자기 뜨면서 '애국'에 대한 관심은 줄어드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10만건 당 언급량 추이를 비교해보면 '헬조선'은 2014년 0.46에서 2015년 9월 초까지 8.74로 늘어난 반면 '애국심'은 74.10에서 61.79로 감소했다.

실제로 대한민국 감성 연관어를 살펴보면 '자랑스럽다'는 표현이 2012년 24위(1만2천535건)에서 2013년 28위(9천179건), 2014년 40위(6천898건), 2015년 48위(2천993건)으로 추락했다.

트위터와 블로그에서 '헬조선'을 언급한 글의 감성을 분석해보면 '분노'가 535건으로 가장 많았고, '울음'(299건)과 '희망'(112건)이 그 뒤를 따랐다. '희망'은 "한국에는 희망이 없다"와 같이 부정적인 표현과 함께 쓰이는 경우가 빈번했다.

최근에는 '헬조선(www.hellkorea.com)'이라는 인터넷 커뮤니티까지 등장했다. 이른바 '헬조선' 사례를 공유하는 곳이다. 홈페이지 배너에 붙어 있는 글귀 '괴로우나 괴로우나 나라사랑'은 이 커뮤니티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지난 5월말 개설한 사이트 헬조선의 '베스트 게시판'에는 1천 건이 넘는 글이 올라와 있다. 베스트 게시판은 한국에서 일어난 소식을 공유하는 '헬조선'과 외국에서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 알리는 '탈조선'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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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오는 글의 주제는 다양하다. 청년실업, 자살률, 노동강도, 외모지상주의, 존속살인, 각종 성범죄, 국회의원의 자녀 취업 청탁,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 등 성역이 없다.

사이트 헬조선 운영자 A(30)씨는 연합뉴스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라 판단되는 이슈들을 볼 수 있는 사이트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사이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이목을 끌기 위해 헬조선이라는 자극적인 키워드를 썼다"고 말했다.

현재 사이트 헬조선의 순 방문자 수(UV·Unique Visitors)는 3천명, 페이지뷰(PV·Page View)는 6만건에 이른다는 게 A씨의 설명이다.

온라인의 신조어로 떠오른 '헬조선'을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린다.

민경배 경희사이버대학교 모바일융합과 교수는 청년세대가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자각했다는 방증이라면서 이들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섰다고 진단했다.

그는 "청년층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 구조 안에서는 뭘 해도 안 된다는 점을 깨닫고, 그 구조를 '헬조선'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 교수는 "구조의 문제점을 자각했다는 것만으로도 과거보다 진일보한 셈"이라며 "구조를 자각했으니, 그 구조를 바꾸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아직 그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반면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헬조선'이라는 유행어에 대해 개인의 분명한 잘못까지 사회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를 조장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곽 교수는 "옆에서 누가 짜증을 내면 나도 짜증이 나듯이, 불만은 전염병처럼 번지는 특성이 있다"며 "온라인에서 군중심리도 작동하는 것 같다"고 '헬조선' 붐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곽 교수는 "분명히 자기 자신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을 무조건 사회 탓으로 돌려버리는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속이 시원해지면서 카타르시스 효과는 있겠지만 그게 너무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