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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13일 09시 27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9월 13일 09시 30분 KST

[르포] 日 홋카이도 최북단 일제 강제노동 현장을 가다

연합뉴스

축구장 다섯 배 크기의 거대한 초원은 습기를 머금은 해풍에 부드럽게 일렁였다. 경계를 나타내는 아름드리나무는 융단처럼 낮게 흐르는 구름과 평행하게 늘어서 암녹색을 띠었다.

12일 오전 6시50분께 연합뉴스 취재진이 찾은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사루후츠(猿拂) 아사지노(淺茅野)의 푸른 초원은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일제의 군용 비행장 터라는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서늘한 비가 추적추적 내리며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흐를 뿐이었다.

아사지노 비행장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2∼1944년 북방지역 방어를 위해 러시아(당시 소련)를 코앞에 둔 홋카이도 북부 해안가에 목판으로 건설됐다.

이 비행장 건설에는 바다를 두 번 건너 3천㎞ 거리를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들이 주로 동원됐다. 최대 1천여명이 강제로 투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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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일본 홋카이도 최북단 사르후츠에 위치한 옛 일본육군 아사지노 비행장 인근 공동묘지에 2006년에 유골 송환을 위해 노력한 한일 양국의 민간단체가 세운 표지가 서 있다. 아사지노 비행장은 조선인 강제노동 희생자들이 비행장을 만들기 위해 몸을 바쳐 일했던 곳이다. '강제노동 희생자 추모 및 유골 귀향 추진위원회'(이하 귀향추진위)는 12일 홋카이도 사루후츠(猿拂) 아사지노(淺茅野) 옛 일본육군비행장과 슈마리나이(朱鞠內) 우류(雨龍)댐에서 수습된 유골 34위와 4위를 각각 되찾았았다.

"조선인들은 추위와 구타, 굶주림에 고통스러워했고 심지어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한여름에는 발가벗긴 상태로 일을 시켰다는 것이 주변 마을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기록상 97명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는데, 전염병이 돌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강제 노동 희생자 유골 115위(位)를 고국으로 봉환하는 단체인 ㈔평화디딤돌 정병호(60·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대표의 말이다.

이 억울한 죽음의 흔적은 이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비행장 터를 출발해 거친 비포장도로를 자동차로 10분가량 달리자 자작나무로 둘러싸인 깊은 숲 속에 발굴 흔적이 곳곳에 있는 공터가 나타났다.

이곳은 1952년까지 공동묘지였는데, 비가 올 때마다 물이 들어차 이곳에 묘를 쓴 일본인은 모두 이장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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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일본 홋카이도 최북단 사르후츠에 위치한 옛 일본육군 아사지노 비행장 인근 공동묘지에서 조선인 강제노동 희생자들의 유골 발굴에 참여했던 관계자가 발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흙내음이 진하게 풍겨오는 이 공터 한가운데는 나무로 된 2m 높이의 명패가 있었다. 이 명패에는 한자와 일본어로 '구 일본육군 아사지노 비행장 건설공사 조선인 희생자를 슬퍼하다'라고 쓰여 있었다.

2005∼2010년 네 차례 이곳에서 발굴 작업을 벌여 유골 34위를 찾아낸 한일 공동발굴단이 세운 명패였다.

강제 노동 희생자는 죽어서도 평안을 얻지 못했다.

시신은 정상적인 장례 절차 없이 대충 화장을 하거나 심지어는 화장 없이 말 그대로 '구겨져서' 아무렇게나 매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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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일본 홋카이도 최북단 하마톤베츠의 텐유지에서 열린 조선인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 봉환 추도식에서 유가족들이 수습된 유골함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06년부터 발굴에 참여한 한양대 박물관 연구원 오승래(30)씨는 "20∼60㎝ 깊이의 얕은 구덩이에 불완전하게 화장된 여러 명의 유골이 한꺼번에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또 "그나마 유골 한 구는 전체 뼈를 온전하게 수습했지만 이 유골은 모서리의 길이가 45㎝인 정육면체 나무상자에 들어 있었다"며 "희생자를 좁은 상자 안에 밀어 넣느라 목뼈까지 부러뜨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이곳에서 발굴된 34위는 이날 유골을 봉환하러 방문한 '강제노동 희생자 추모 및 유골 귀향 추진위원회' 한국 측 대표 평화디딤돌이 인수했다.

이 유골은 70여년 전 머나먼 동토로 끌려왔던 경로를 그대로 거슬러 고국으로 돌아간다.

한일 공동발굴단이 작업을 하던 당시 인근 마을회장으로 있으면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줬던 미즈구치 코이치(水口孝一·80)씨는 "첫 발굴 이후 10년 동안 우리는 이 유골을 하루라도 빨리 고향으로 보내드리고 싶었다"며 "희생자를 추모하는 마음을 한국인과 일본인이 서로 나눴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