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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06일 15시 07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9월 06일 15시 07분 KST

1958년 북한 모스크바 유학생 '집단 망명' 사건,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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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1월 북한 국비 유학생인 정린구(왼쪽부터), 김순자, 허웅배, 한대용(한진), 리경진, 김종훈, 리진황이 소련 전연맹국립영화대학 기숙사 앞에서 찍은 사진.

[토요판] 커버스토리 / ‘잊혀진 망명자’ 한진과 그의 친구들

1956년 11월 북한 국비 유학생인 정린구, 김순자, 허웅배, 한대용(한진), 리경진, 김종훈, 리진황이 소련 전연맹국립영화대학 기숙사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2년 뒤 벌어질 운명의 소용돌이를 예감하지 못한 채 즐거운 한때를 남긴 흑백사진이다. 1951~58년 영화대학을 다녔던 유학생 10명 가운데 8명이 1958년 북한 국적을 버렸다.

사진 속 유일한 여성인 김순자를 제외한 6명과 연출과 학생 최국인, 촬영과 양원식이 국적을 포기하고 무국적자의 길을 선택했다. 1946년부터 시작된 북한 유학생 파견은 큰 타격을 받았다. 유학생들의 첫 집단 망명이었다. 김일성이 개인숭배를 강화하기 전 북한에서 짧게나마 사회주의의 이상을 좇았던 이 북한 지식인들은 1953년 암살과 공포정치를 일삼던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숨지면서 소비에트연방에서 봄을 맞이했다.

공산주의의 이상을 희망하고 투쟁하던 망명자들은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대다수 타국에서 사망했다. 망명자들 가운데 카레이스키 희곡 문학의 대표자 고 한대용(한진)의 여정을 좇아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향했다. 마지막 생존자 김종훈을 만나 기억을 더듬었다.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역사를 거기서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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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5일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자리한 낡은 아파트에서 지나이다 이바노브다가 한진의 그림을 옆에 두고 남편을 추억하고 있다.

북한 국적 버린 뜨거운 가슴, 동토에 버려진 차가운 운명

▶ 카레이스키 희곡 문학을 대표하는 고 한진(망명 전 이름 한대용). 소련 전연맹국립영화대학 유학 시절 망명부터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지난달 13~19일 카자흐스탄에서 한진의 삶을 좇았습니다. <한겨레>는 한진과 동료들이 집단 망명 과정에서 치열하게 토론을 벌인 미공개 기록을 최초 입수했습니다. 북한에서 소비에트 연방으로, 소비에트 연방에서 카자흐스탄을 오갔던 한진과 가족, 망명 동료들의 편지들을 펼칩니다. 민주적 공산주의를 바랐던, 끝내 성공하지 못한 투쟁가들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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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전연맹국립영화대학 북한 유학생 집단 망명 사건의 마지막 생존자인 김종훈씨를 지난 8월18일 알마티의 나보이거리 자택에서 만났다.

“대용이에게. 너의 편지는 반가이 잘 받았다. 편지를 받을 때마다 나의 마음은 기뻤다. 몸 건강히 일에 성과를 낼 뿐만 아니라 남편으로서의 일을 다할 줄 믿으며 이 북극에서 뜨거운 축하의 인사를 보낸다.

나는 10월1일부터 휴가를 받는다. 10월1일 이날은 내가 북극에서 나의 일을 총화하고 이 북극, 낯익은 소련에서의 제2의 고향 무르만스크를 떠나는 날이다. 그렇게 정든 촬영소의 낯익은 동무들을 떠나기 싫다. 그러나 내가 영원히 이곳에 살 사람은 아니지. 떠나면 어데로 가겠는가?

더 북극으로는 갈 수는 없지. 남쪽으로 가야지. 나도 장가를 들려면 들 수 있으나 많이 생각하는 중이다. 왜냐하면 나의 처지, 즉 우리들의 처지로 보아 그렇게 안전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나를 주저하게 하고 있다. 결혼을 잘 하여 훌륭한 아버지가 되어라. 처의 사진 한 장 보내려무나. 종훈.”

1959년 10월. 러시아인 아내와 결혼을 앞둔 한대용(한진)은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김종훈이 북쪽 200㎞ 러시아 무르만스크에서 보내온 편지였다. 겨울이면 온종일 밤이 지속되고 여름이면 낮만 계속되는 지구의 가장자리, 무르만스크. 여름의 하얀 밤이 지나가면 검은 낮이 찾아와 쉬이 물러서지 않는 곳.

김종훈의 편지는 러시아 서부 시베리아 바르나울시의 한대용에게 도착하였다. 북한 국적을 버린 망명자 한대용과 김종훈은 편지로나마 서로의 소식을 전했다. 무국적 망명자들은 붉은색의 소비에트 공민증이 아닌 녹색 거주증을 가지고 있었다. 녹색 거주증을 가진 자들은 이동의 자유가 제한됐다.

이 편지는 2009년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한대용 자택에서 발견됐다. 극작가 한대용이 숨진 지 16년이 지난 뒤였다. 비극적으로 살다 간 한진의 삶을 기억하려던 러시아인 아내 지나이다 이바노브다가 알마티에 거주하는 김병학 시인에게 부탁했다. 김 시인은 몇년째 한진 자택 곳곳에 숨겨진 편지들을 발굴하고 있다. 북한과 러시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오가던 편지는 김일성 개인숭배에 반대한 북한 유학생들의 첫 집단 망명 사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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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전연맹국립영화대학 북한 유학생

1951~1958년 북한의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돼 소련 전연맹국립영화대학을 다녔던 한대용·김종훈·리경진·허웅배·정린구·최국인·양원식·리진황. 이들은 1958년 8월 북한 국적을 버렸다. 당시 소련 전연맹국립영화대학생 10명 가운데 8명이 집단 망명한 것이다. 1946년부터 시작된 북한의 유학생 파견은 집단 망명 사건으로 타격을 받았다.

이들의 국적은 네다섯번 바뀌었다. 일본 신민, 북조선 인민, 무국적자, 소비에트 연방 공민,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국민. 혁명의 피가 뜨거웠던 젊은 날, 이들은 민주적 공산주의 사회를 향한 이상을 택했다. 젊은 날의 열정은 현실을 이기지 못했다. 죽음으로 향하는 시간 열차의 종착역에 다가설수록 두려움에 꺾여가기도 했다.

청년 망명자들은 조국이 아닌 땅에서 노인의 죽음을 맞았다. 한대용(1931~93), 최국인(1926~2015)은 카자흐스탄에서 지병으로 숨졌다. 양원식(1932~2006)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괴한에 의해 흉기에 찔려 사망했다. 허웅배(1928~97)는 우즈베키스탄, 리경진(1930~2002)과 리진황(1933~2005), 정린구(1931~2004)는 러시아에서 눈을 감았다. 마지막 생존자는 김종훈(83)씨다. 대표적인 고려인 희곡작가 한대용, 그리고 망명 동지들. 그들의 얘기를 듣기 위해 마지막 생존자를 찾아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갔다.

2015년의 광복절

카자흐스탄 알마티 고골거리에 자리한 문화휴식공원(막심 고리키 공원)에 노인이 홀로 나타났다. 중앙아시아의 뜨거운 햇빛을 받은 전나무와 자작나무들이 하늘 높이 빼곡히 들어선 숲길 사이로 키 작은 노인이 걸어와 벤치에 앉았다.

거리의 사진사들이 토끼와 함께 사진을 찍게 해 준다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한번 손을 놓치면 영원히 잃어버리는 헬륨 풍선이 공원의 아이들 손에 쥐여 있었다. 가족이나 친구 단위로 모여든 8·15 문화 축제의 날. 여든세살 노인은 아는 사람을 찾아 기웃거렸다. 한복 입은 사람들이 공원을 돌아다녔고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남녀 사회자가 무대 위에서 러시아말로 진행을 했다.

8월15일 광복절은 한민족 문화 행사의 날임과 동시에 옛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2차 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야외 무대에선 유대인, 아프가니스탄, 체첸, 러시아, 위구르 민족 전통 춤과 노래가 이어졌다. 고려인들의 후예가 이곳에 모인 것이다.

고려인이란 19세기 중엽부터 러시아로 이주하여 1937년 이후엔 현재의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흩어진 한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러시아어로는 ‘카레이스키’라고 한다. 고려인들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17만명으로 증가했다. 1937년 이들이 옛 소련 동쪽 끝인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중앙아시아로 간 것은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의 소수민족 강제이주정책 때문이었다. 소수민족 말살 정책이었다.

고려인을 비롯해 130여개 소수민족들이 카자흐스탄에 산다. 한국말은 거의 들리지 않는 가운데 노인이 북한 말투로 말했다. “사는 동안에 언어는 세번이 바뀌었지. 일본어, 한국어, 러시아어, 카자흐스탄어.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단 말이야. ‘당신은 어떤 언어로 생각을 하오?’”

노인의 이름은 김종훈. 소련 전연맹국립영화대학 망명 사건의 마지막 생존자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말이야. 휘말려서 빠져나오질 못하고. 내가 아무리 원하든, 열렬히 뭘 하고 싶어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지.” 문화 행사가 끝나고 노인과 공원을 빠져나갔다.

노인은 헬륨가스 풍선을 손에 쥔 검은 머리 어린아이 등 뒤에서 장난을 쳤다. 헬륨 풍선을 만지작거리고 아이들 머리에 손을 댔다 떼기도 했다. 공원 맞은편에 자리한 터키 음식점에 노인과 마주앉았다. 카자흐스탄 만두와 터키 발효음료 아이란, 염소젖을 응고시킨 치즈 샐러드가 나온다. 광복절의 정찬이었다.

“한국은 내 조국입니다. 어째, 내 조국인가? 광산 김씨의 묘지와 부모님의 묘지, 같이 자란 어린 시절의 친구들, 친척들, 선생님들이 있으니까 내 조국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같은 조국은 아니야. 품에 안겨보지 못했지. 그러나 한반도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싶었고 우리 친구들도 그걸 원했어.”

국가가 정치적 함의를 지닌 단어라면 조국은 핏줄과 정서를 담은 말이다. 조국은 이방적인 단어다. 태어난 곳이 아닌 이국의 땅에서 가슴에 품는 말이다. 다민족이 같은 땅덩어리에서 부대끼며 살아갈 때 민족이라는 개념도 타자화된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다가 1958년 망명 이후 가게 된 곳이 북극이란 말이다. 무르만스크. 육개월은 해가 땅 밑으로 들어가서 보이질 않아.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사슴 고기를 먹었지. 야채도 없이.”

평생을 작가로, 카자흐스탄의 국립 고려극장 극작가로 일해온 한대용의 단편소설 <그 고장 이름>에 이런 대목이 있다. “모든 일에 시작과 마지막이 중요하듯 사람도 마찬가지일 게야. 죽는 일도 중요한 일이지. 사람이 태어난 곳은 고향이라는데 사람이 묻히는 땅은 뭐라고 하느냐? 거기에도 이름이 있어야 할 거야. 고향이란 말에 못지않게 정다운 말이 있어야 할 거야….”

마지막 생존자 김종훈은 57년 전 소련 전연맹국립영화대학을 다니던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용이는 말이다. 러시아어를 굉장히 잘했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노어를 전공했기 때문에 소련에 온 지 1년 만에 자유롭게 말할 정도가 됐단 말이지. 유학을 오니까 북한에서의 날카로운 당 생활이 없고 동무들끼리 자유롭게 생활했지. 그러다가 1958년에 사건이 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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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빅토르 화가가 고려극장 극작가 고 한진(한대용)을 추억하며 2014년 그린 그림. 문 빅토르는 1977~97년 무대그림 등을 그린 국립극장 주임 화가다.

1958년, 소련 전연맹국립영화대학

1958년 한대용은 혼란과 공포의 시기를 견디고 있었다. 선진 문명을 습득하고 헌신하기 위해 1952년 떠나온 조국은 얼어붙고 있었다. 유일 정당인 조선노동당 내부에서 계파끼리 견제와 균형을 맞추던 당내 민주주의가 사라졌다. 1955년 12월5일 남조선노동당 박헌영이 처형되고 1956년 6~8월에 중국 출신의 연안파, 소련파들이 숙청되어갔다.

유학생들과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가깝게 지냈던 주러시아 대사 리상조가 1957년 연안파로 몰려 강제 파직당했다. 북한에 혹독한 겨울이 찾아올 때 공산당 종주국인 소비에트 연방에는 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암살과 처형을 일삼던 스탈린은 1953년 숨졌다. 1956년 2월에 열린 제20차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했다는 소식이 유학생들과 북한 엘리트 계층에 스며들었다.

같은 학과인 허웅배는 대학을 떠난 뒤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1957년 11월2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조선유학생대회에 참석해 김일성 개인숭배를 비판한 뒤 달아났다. 한대용도 허웅배와 같은 입장이었지만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반대파에 의해 단상에서 끌려내려온 허웅배는 도주했다.

대사관의 추적과 설득으로 제 발로 대사관에 돌아갔으나 곧 구금되고 말았다. 대사관 화장실 창문을 뚫고 도망친 허웅배는 지하철로 뛰어들어가 역무원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소비에트 연방 당국에 인계된 허웅배는 의과대학 소속인 또다른 유학생이자 연인 최선옥을 데리고 망명했다.

당시 북한은 ‘종파이론’에 따라 부정적인 정치적 싹이 보이면 뿌리까지 캐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대사관은 소련 전연맹국립영화대학 학생들이 허웅배에게 물들지 않았는지 조바심을 냈다. 학생들의 입장을 확인하고자 대사관 직원 입회하에 수차례 토론을 붙였다.

망명한 허웅배를 제외한 영화대학 학생 9명 가운데 김영설, 김순자는 허웅배를 비판하며 입장을 확고히 했다. 나머지 7명은 고민에 빠졌다. 평양에 있는 한대용의 가족들은 허웅배 사건을 접하고 동조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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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2월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망명 동료들의 토론기록을 <한겨레>가 최초 입수했다. 망명을 앞두고 김일성 개인숭배를 지적하는 등 북한의 현실 정치에 대한 유학생들의 비판적 인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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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1월22일. 겨울방학이 되자 한대용 등 6명은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러시아인 친구 소유의 빈집으로 갔다.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한대용이 속기로 작성한 기록에는 치열한 고민이 보인다. 토론 날짜는 확인되지 않지만 유학생들의 입장이 망명 쪽으로 가닥을 굳힌 1958년 2월의 기록으로 추정된다.

“조선에 개인숭배 사상이 있는가?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숭배 사상은 헌법과 당내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것이다. 헌법 위반이다. 당내 민주주의가 있는가? 영화 대학에 우선 있는가? 없다. 상부에서 하는 말하고 회의에서 하는 말이 다르다.

(모스크바종합대학 철학과 유학생인) 유정억의 집에서 사람 잡아먹을 회의를 하고 있다. 믿지 못하겠다. 허웅배가 반당 종파 분자의 비밀회의에 참가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 1920년에 시작된 김일성의 항일운동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1917년에 벌써 쏘련에 항일 부대가 있었다. 이것은 김일성이를 우상화하는 것이다. 없는 것을 날조하는 것이다. (김일성이) 없을 때도 인민의 투쟁이 존재했다.”(최국인)

“(망명한) 허웅배가 나쁘다고 맹신하였다. 그러나 (당의) 말을 듣는데 믿지 못할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말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학교나 마치고 나가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서워서 못했다. 나는 기뻤다. 나도 출세했구나 하고. 양원식, 한대용, 최국인, 리경진을 걸 수 있는(비판할 수 있는) 근거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렇게 내가 얻는 것이 무슨 일인가. 노예 생활이다. 내가 어리다고 (당이) 위협 공갈하는 것이다.”(김종훈)

1950년대 중반부터 김일성 개인숭배, 정적 제거가 심해졌지만 북한 단독정부 수립 당시에는 인민민주주의가 존재했다. 최고인민회의는 1948년 9월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했고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내각이 조직됐다. 내각에는 남북의 인사들이 대략 반반씩 참여한 가운데 남·북조선 노동당 출신이 전체의 70%를 차지했다.

남·북조선 노동당 외에 민주독립당, 인민공화당, 근로인민당, 조선민주당 등 친사회주의적 중도파 정당들이 내각에 참여하여 노동당 우위의 인민민주주의적 성격의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짧게나마 인민민주주의를 경험한데다 ‘소비에트 연방의 봄’까지 맞이한 유학생들에게 개인숭배는 비판해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소련파가 숙청되는 사회적 분위기, 시나리오과에 다니던 허웅배가 먼저 망명해버리면서 북한에 돌아가도 종파 이론에 따라 그들의 안전도 담보할 수 없다는 불안도 작용했다.

학생들은 1958년 2월4일 후르시초프가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한 20차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망명서를 소비에트 연방 정부에 보냈다. 한대용이 그해 6월 시나리오과에서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다음날, 북한 대사관의 요청으로 김영설과 김순자를 제외한 소련 전연맹국립영화대학 재학생 전원이 퇴학당했다.

신념을 택했지만 안락했던 생활은 사라졌다. 갈 곳이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40~50㎞를 벗어난 모니노 지역의 숲으로 들어가 천막을 쳤다.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인근 집단농장에서 일을 도와주는 대가로 먹을거리를 얻었다.

먼저 망명한 허웅배가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쌀과 김치 등을 들고 모니노의 천막으로 찾아왔다. “우리들은 이제 참사람이 되겠다는 뜻으로 같은 이름 ‘진’을 쓰도록 하자.” 허웅배가 제안했다. 이들 망명생 8명 가운데 리경진, 허웅배, 한대용은 이후에도 결의대로 평생 리진, 허진, 한진이라는 이름을 썼다.

천막생활을 이어간 지 두달이 지난 8월. 그들의 망명 요청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붉은색 소련 공민증이 아닌 녹색의 무국적 임시 거주증이 주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음악대학 정추, 극장대학 맹동욱도 잇따라 망명했다. 소비에트 연방은 북한과의 외교를 고려해 이들을 소비에트 전역의 직장으로 흩뿌려 놓았다.

리경진은 모스크바 근교, 정린구는 중부 시베리아 이르쿠츠크, 한진은 서부 시베리아 바르나울, 김종훈은 러시아 북서부 항구도시 무르만스크, 리진황은 우크라이나 키예프 근교 도네츠크, 양원식은 러시아 볼가강 근방 스탈린그라드, 최국인은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발령받았다.

국적도 없이 헤어지기 전 그들은 굳은 결의를 했다. 1958년 12월21일 정린구는 나머지 동료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결의 내용을 다시 전달했다.

“우리들이 각 직장으로 떠나기 전 수일간의 모임에서 토의한 내용, 직장에서 노력하여야 할 문제를 동무에게 전달하겠소. ①직장에서 겸손하고 근면하며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않는 모범적인 일꾼이 될 것 ②언제나 자체 교양에 노력할 것 ③동무들의 사업과 생활과 의식수준에 대해 적극적 관심을 돌리며 중요한 문제는 전원이 알게 하며 필요하면 토의에 부칠 것 ④도덕적으로 공산주의자답게 손색없는 인간이 될 것 ⑤조국 정세에 대한 자기 의견을 외국인들에게 절대로 공개하지 않을 것 ⑥투쟁과 관련되는 일체 의견을 제때에 토의에 부쳐 동무들이 사태를 옳게 판단하도록 할 것 ⑦매 동무들이 서로 한달에 한번 이상 편지로 자기 생활에 대한 총화를 지어 동무들에게 알릴 것”

2015년, 고 한진의 자택

8월15일 김종훈씨와 헤어져 알마티 지역의 한 낡은 아파트로 찾아갔다. 한진(한대용의 망명 후 이름)은 이 아파트에서 고려극장을 출퇴근하며 남한과 북한의 정치적 상황을 그린 희곡을 썼다. 망명 사건을 보여주는 편지와 기록물이 발견된 곳이며 한진이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이다.

광복절을 맞이해서인지 한진의 집에는 태극기와 카자흐스탄 국기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 정부가 1970년대 고려극장 직원들에게 제공한 아파트에는 러시아인 아내 지나이다 이바노브다(83)와 작은아들, 손자가 살고 있다. 지나이다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보청기 건전지를 갈아끼우곤 한쪽 귀에 손을 대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오늘은 저한테도 남편 한진과 동료들에게도 언제나 가장 기쁜 날이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광복절입니다. 예전에 이날만 되면 한진과 동료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서로 축하를 했습니다. 멀리서 만나지 못하면 연락이라도 하며 축하했어요.

어느 해인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광복절에 남편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현재의 인민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를 위해 작품을 쓴다고. 조국과 먼 미래 세대를 위해, 나중에 카자흐스탄이 제2의 조국이 되었기 때문에 여기 고려인들을 위해서 작품을 쓰는 것이라고요.”

지나이다와 한진은 1958년 8월10일 모스크바 카잔 기차역에서 처음 만났다. 망명 허가서를 받은 직후였다. 지나이다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섰고 한진이 어디에 줄을 서야 하냐고 질문을 했다. 두 사람은 기차표를 예매한 다음 데이트를 이어나갔다. 러시아문학 교사였던 지나이다와 시나리오과 출신인 한진은 문학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워졌다. 한진이 망명하게 된 사연을 듣게 된 것은 결혼을 하고 나서였다.

“오래도록 왜 한진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지나이다가 눈물을 흘렸다) 저도 물어보기 어려웠는데 그가 대답해주었습니다. 조국은 지금 공평하지 못하다, 우리가 돌아가도 자유롭게 진리나 사실을 말할 자유가 없다, 영화대학 학생들이 이런 상황에 반대해서 망명하게 됐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평양에 있는 가족들은 한진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며 돌아오라고 애원했다. 화를 내기도 훈계하기도 했다. 한진의 가족들은 지나이다와의 결혼과 출산을 축하하며 선물을 주고받았다. 소비에트 연방에 오기 전까지 평양에 살았던 한진은 김일성종합대 노어과 출신으로 당성이 좋았다. 한진의 아버지는 종군기자였고 자신과 여동생도 인민군으로 복무했다.

“(한)대용(한진)에게. 지금 한 밤만 지나면 10월15일이 된다. 잠시도 잊을 때가 없는 내 아들 대용에게 소식을 전한다. 네 편지를 받으니 사는 것 같고 새 희망이 솟는 것 같다. 나는 다림질하기를 즐긴다. 이것이 없었든들 나는 더 외롭고 정 부칠 곳이 없을 것이야. 네가 쓰는 다리미는 지금 내가 쓴다. 너를 본 듯이. 대용아. 부모는 언제나 자식이 행복하게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로력한단다. 자식이 행복함은 부모에 대한 효성이다. 나는 네가 참된 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노력하는 데 힘을 다하고 방조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1958년 10월14일 평양의 어머니가 한진에게 쓴 편지)

한진은 평양에서 온 편지를 받으면 아내에게 러시아어로 읽어주곤 했다. “같이 살면서도 가끔씩 잠을 잘 못 이뤘습니다. 몸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형제자매가 갈라진 나라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슬퍼하곤 했습니다.”

1965년, 크질오르다

1958년 8월23일, 망명 허가를 받은 한진은 소비에트 연방 서부 시베리아의 바르나울시 텔레비전 편집위원으로 파견됐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꿈을 놓을 수 없었다. 모스크바 근교에 사는 동료 리진(망명 전 이름 리경진)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창작 활동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북한에서부터 같은 김일성종합대 출신인 리진은 늘 투쟁으로서의 글을 써야 한다고 했다. 한진은 1963년 현재의 카자흐스탄 영토가 된,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크질오르다로 거처를 옮겼다. 레닌기치(현 고려일보) 신문사 문예부 기자로 입사한 것이다. 틈틈이 신문사에서 단편소설과 첫 희곡 <의부 어머니>를 발표했다.

해가 더해갈수록, 드넓은 소비에트 연방에 흩뿌려진 동료들의 머나먼 거리가, 저마다의 고된 생활이 그들을 멀어지게 했다. 신념은 저마다 다르게 자랐다. 한달에 한번 이상 편지로 생활을 알리고 투쟁과 관련된 토의를 제때에 부치자는, 헤어질 당시의 합의는 퇴색되어갔다.

“그렇다. 많은 것이 변했다. 더 많이 변할 것이다. 생활과 신념 사이에 생길 수 있는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 가는가 하는 문제는 개인의 일생의 기본 문제다. 이놈의 망명 생활은 사상활동을 제외한 기초 위에서만 가능한, 방공호 생활 같은 것이 돼서 온 심혈로 쓰는 글이 아니라 정황에 맞을 정도로 만든 글밖에는 내놓을 수가 없다. 비극이다. 나는 (허)웅배가 (글을) 쓰지 않는 것이 큰 유감이다. 네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을 중지하는 것도 슬프게 생각할 것이다. 래년에는 꼭 오너라. 몇이라도 모여 앉아 합평회를 하자. 1965년 9월3일.”(리진이 한진에게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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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극장 단원들은 고려인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중앙아시아 전역을 돌며 순회공연을 다녔다. 순회공연을 위해 짐을 챙기는 고려극장 단원들. 1960년대에 찍힌 사진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진은 1965년 2월 신문사를 그만뒀다. 고려극장 문예부장으로 옮겨 본격적인 극작가의 인생을 시작했다. 1932년, 문화예술인들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인 집단 거주지인 신한촌에 설립한 극장은 1960년에 들어서 세대교체기에 들어서고 있었다. 1세대 극작가와 배우들은 1937년 강제이주를 경험하며 고려인들의 애환을 체험했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예술인들은 아니었다. 선배 세대가 저물면서 한진이 2세대 극작가로 등장한 것이다. 극장 사람들은 고려인이 사는 중앙아시아 전역으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허허벌판에 간이무대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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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극장은 고려인들에게 극장 이상의 극장이었다. 조국이었다. 극장 60주년 회고록에서 한진이 극장을 표현한 말이다. 1937년 9월 스탈린의 러시아 정부는 고려인 2500여명을 일본군 스파이란 죄목을 씌우고 사살한 뒤 고려인 사회를 공포에 떨게 했다.

17만여명의 고려인이 짐짝처럼 기차 화물칸에 태워져 강제 이주됐다. 강제 이주 과정에서 2만여명이 굶주림과 추위로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인들은 기차를 타고 한달 넘게 6000여㎞를 달렸다. 들어본 적 없는, 알지 못한 곳에 별처럼 떨어졌다. 그렇게 중앙아시아 전역으로 흩뿌려졌다.

“1937년 가을 쏘련 연해주의 조선 사람들은 한날한시에 모두 승객이 되었다. 수십만명이 동시에 기차를 탔다. 얼마나 많은 차량이 들었을까. 수천대? 수만대? 살던 집과 가장집물을 그대로 두고 거진 알몸으로 쫓겨나면서도 누구 하나 안 가겠다고 떼를 쓰는 사람이 없었다.

양무리처럼 온순히들 차에 올랐다. 어데로 무엇 때문에 실려가는지도 몰랐다. 남녀노소 한사람도 남지 못하고 다 고향에서 쫓겨났다. 차에서 태어나는 애도 있었다. 그것들은 나서 귀신들이 물어갔다. 출생신고도 사망신고도 할 필요 없었다. 이 세상에 왔다가 땅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사라져갔다. 오직 어머니 가슴속에 피멍울만을 남기고. 많은 노인들과 어린것들이 철도 연변에 묻혔다.”(한진 소설 <공포>)

“1937년/ 기막힌 그때 일이 기억에 역역하다/ 텅텅 빈 집들/ 열어 제낀 창문들/ 사람의 눈인 양 무리를 바라보며/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듯하였고/ 뜨락에 서 있는 나무들은/ 머리를 숙여 우리를 전송했고/ 어린애같이 기르던 / 황둥 강아지는/ 우리를 따라오다 걸음을 멈추고/ 무정히 가는 우리를 바라보며/ 날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고/ 한없는 원망에 눈물 짓는 듯하였다/ 그러나 우리를 떠나보내며/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려극장 1세대 극작가 연성용, ‘1937년’)

고려극장은 그들이 울고 웃는 광장이었다. 들킬까봐 등 돌려 외로이 울지 않아도 되는 곳. 핏줄에 흐르는 정서를 속이지 않아도 되는 안식처였다. 그리움들이 모여 그리움을 달래던 공간이었다.

1968년, 알마티

한진은 극장이 크질오르다에서 알마티로 이전함에 따라 이사를 갔다. 극장은 1968년 주립극장에서 국립극장으로 승격됐다. 극장 사람들은 한진이 타국에서 만난 새로운 동료들이었다.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주했거나 그들의 자녀 세대인 대다수 고려인들 사이에 북한 출신의 한진이 걸어들어갔다. 한진은 분단된 조국, 진리와 자유를 잃은 한반도, 소수민족으로 사는 이방인으로서의 애환을 작품에 담았다. 남한도 북한도 아닌 곳에서,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도 아닌 고려인들과.

한진은 삶의 이유를 무대에서 찾았다. 무대라는 조국에 남한과 북한을 모두 올려놓았다. 남한 병사와 북한 병사의 갈등을 그린 <나무를 흔들지 마라>(1987)는 미완성의 화해를 그린 작품이다. 한반도에 큰 홍수가 나고 살기 위해 남한 병사와 북한 병사가 나무에 올라가 총을 겨눈다. 그러던 중에 다 죽어가는 한 처녀를 발견해 나무 위로 올린다.

두 병사는 처녀를 살리는 과정에서 말문을 튼다. 두 병사가 화해를 하며 사라지고 처녀는 혼자 남아 독백을 한다.

“그때부터 삼십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남수도 기복이도 다시 이 나무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나무는 지금 군사분계선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동안 나무는 사람의 그림자를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해마다 늦은 가을이면 흰 두루미가 두마리 날아와 잠깐 나무 위에 앉았다가 어디론지 날아가곤 합니다.”

1982년 러시아 모스크바의 말리극장에서 공연된 한진의 희곡 <산부처>의 한 장면. 배우 박 마야, 김 블라지미르, 박춘섭(왼쪽부터)이 연기를 펼치고 있다.1982년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광장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은 고려극장 단원들. 고려인 문인 가운데 처음으로 광주 민주화 항쟁을 담은 희곡 <폭발>, 소비에트 연방의 뇌물 관행을 풍자한 <나 먹고 너 먹고>(1983), 베트남 전쟁을 비판한 <고용병의 운명>(1967) 등은 시대를 담은 작품이었다.

특히 김일성 개인숭배와 독재를 비판한 <산부처>는 1982년 모스크바 말리극장에 초대받아 호평을 받았다. 살아 있는 부처 행세를 했던 고려시대 궁예와 김일성을 연결해 제목을 <산부처>라고 했다. 당시 여주인공 역으로 출연했던 박마야(82)씨는 “희곡을 보는 순간 북한 이야기라는 걸 알았다. 당시 공연이 모스크바에서 크게 화제가 되어 다음날 대다수 신문에 기사가 났다”고 회고했다.

1960년 가을 찍은 가족사진. 한진과 아들 안드레이, 그리고 아내 지나이다 이바노브다. 아들 안드레이가 성년이 되던 1978년 한진도 국적을 취득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진은 중견 작가가 되었다. 고려인 사회도 변화를 겪었다.

1937년 연해주에서 강제이주를 당한 고려인들의 자녀가 새로운 세대로 자리했다. 그들은 한국어를 알지 못했다. 한국어 연극, 한국어 소설을 통역 없이 이해할 수 없는 세대였다. 고려극장 2세대인 한진의 뒤를 잇는 3세대 배우들은 극장에서 한글을 배웠다.

1978년에 입단한 최따찌아나(59)는 “극장에 들어와 한글 읽기와 발음부터 익혔다. 배우들이 대본을 읽을 때 한진 선생님이 옆에 계시곤 했는데 발음이 안 되면 이마를 잡고 바닥을 쳐다보셨다. 선생님이 얼굴을 드시면 괜찮다는 뜻이다. 더 잘 읽으면 ‘어, 잘하네’ 말씀하시곤 했다”고 회상했다.

잃어가는 한국말에 대한 염려는 한진이 쓴, 재소련 한국 문학인들의 책을 엮은 <오늘의 빛> 머리말에서 드러난다.

“쏘베트 조선문학이 걸음마를 탈 때 그를 부축해준 사람들 가운데 막심 고리끼 작가가 있었다. 1928년 9월8일 선봉신문(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한 고려인 신문, 현 <고려일보>) 로동기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고리끼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들 조선 사람들이 뭣을 하고 있으며 어떤 성과를 거두었으며 당신들 속에 새것이 어떻게 자라나고 있는지 써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들을 흥분시키고 기쁘게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써 주십시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고리끼에게 회답을 쓴다면 무엇에 대해 어떻게 썼으면 좋겠는가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줄임) 아직은 우리에게 자기 신문, 자기 극장, 자기 문학이 있다. 그것들이 다 없어졌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말이 없어지면 문학도 극장도 신문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민족주의의 표현이나 협소한 견해라고 떠들던 조선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있다가는 글을 쓸 사람은커녕 글을 읽을 사람도 없어질 것이다.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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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 옛 고려극장이 자리하던 위구르극장 앞에서 고려극장의 3세대 예술가인 한 야꼬브(왼쪽) 작곡가와 송 라브렌찌 감독이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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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한대용)의 고려극장 후배 예술가 한 야꼬브(맨 왼쪽)가 1989년 북한에 갔을 때 만난 한진의 가족들.

1989년, 북한

한진은 평생 북한 땅을 밟지 못했다. 가족과의 서신 왕래는 1960년대에 끊어진 지 오래였다. 1989년 4월 조선극장 아리랑가무단이 북한 초청으로 평양으로 떠나면서 한진은 조선극장의 후배인 한 야꼬브 작곡가를 통해 가족의 생사를 확인했다. 그해에 평양을 방문한 한 야꼬브 작곡가와 송 라브렌찌 감독이 여동생 신옥이 쓴 편지를 한진에게 전했다.

“꿈결에도 그리운 오빠에게. 오빠! 철들어 한번도 불러보지 못한 이름을 속으로 부르고 또 부르며 글을 쓰는 이 순간 눈물은 하염없이 흐르고 흐릅니다. 그 반가움에 이 세상을 떠난 어머니 아버지 생각이 겹치며 마음이 걷잡을 수 없습니다. 세월도 너무나 많이 흘러 새로운 한 세대가 자라난 오늘 이곳 소식부터 전하겠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1975. 7. 2. 0시30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의 일생은 당과 조국에 대한 성실성으로 일관되었으며 우리에게 훌륭한 아버지였고 스승이었습니다. 어머니는 1983. 9. 27 뇌혈전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평소에 내가 죽으면 오빠가 그전에 보낸 회색천으로 지은 조선옷을 입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어서도 오빠를 잊을 수 없어 그 손길이 닿은 그 옷을 입고 가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형제산 구역 모로리라는 곳에 합장하였습니다. (줄임) 폐허 속에서 솟아난 우리의 평양이 얼마나 아름답게 단장되였는가에 아마도 송 선생님에게 들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동생 신옥 올림 1987. 6.7.”

1992년 11월 한진은 위암 진단을 받았다. 당시 소비에트 연방이 헤체되고 정부 지원까지 끊어지면서 극장도 어려움을 겪던 때였다. 허진이 한진을 모스크바 병원으로 불러 입원할 수 있도록 도왔다. 가장 가까웠던 리진은 한진의 소식을 받고 충격을 받고 쓰러져 오래도록 사경을 헤매다 깨어났다. 한진은 수술을 받은 후 친구들에게 편지를 했다.

“귀중한 친구들 잘 계시우 국인 정추 원식 종훈 두환씨 다 무고하시고 가정도 평안하리라 믿습니다 저의 병으로 인해 친구들에게 근심을 끼치고 걱정을 시키는 것이 미안하오. 하기야 사경을 헤매며 무슨 생각을 안 했겠오. 경진이(리진)도 중태라니 이것 또한 불행입니다. (허진의 아내인) 선옥이는 나에게서 경진에게로 경진에게서 나에게로 병원 출입에 골탕이오.”

1993년 3월 카자흐스탄 알마티 자택으로 돌아온 한진은 침대에 기대어 마지막 작품을 구상했다. 1990년 한국과 소련이 양국 수교를 맺으면서 한국에 대한 작품을 쓰고 싶었다. 한진은 타자기를 품에 안고 마지막 작품 <서울 손님>을 써내려갔다.

지나이다는 한진의 마지막을 이렇게 회상했다. “자꾸 춥다고 해서, 옷을 덮어줘도 안 되어서 몸으로 따뜻히 안곤 했습니다. 1993년 7월13일 갑자기 입을 벌리더니 숨이 끊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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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고려극장 로비에 지난달 17일 한국의 전통 북들이 쌓여 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단원들의 사진이 벽면에 걸려 있다.

시대는 개인의 신념과 국가의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했다. 한진은 국적을 버리고, 가족을 버렸다. 자신이 저버렸던 선택으로 평생을 결핍 가운데 살며 그리워했다. 결핍과 그리움, 정치적 경계인으로서의 외로움이 그를 끊임없이 글쓰게 했다.

역사는 이기적이어서 성공한 투쟁과 혁명, 승리한 헤게모니처럼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기록한다. 역사는 대중적이어서 모두가 공유한 좌절과 패배처럼 다수의 기억을 기록한다. 한진은 경계에 있었고 김일성 개인독재를 비판했지만 성공적 투쟁가가 되지는 못했다. 그의 인생 여정에는 많은 상징이 존재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봄과 북한의 혹독한 정치적 겨울 사이에서 고뇌했던 북한 지식인, 소비에트 연방 유학생으로서 첫 집단 망명자, 연해주에서 강제이주한 대다수의 고려인 사이에서 북한 망명자 1세대로서의 고려인, 한반도를 포함해 가장 오래된 공연장인 고려극장의 2세대 극작가, 남한과 북한 모두를 아울렀던 카레이스키 희곡 문학의 대표자. 한진의 인생은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역사다.

*자료사진 김병학 시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