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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05일 13시 30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9월 05일 13시 31분 KST

만국의 프롤레타리아 동물이여 저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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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샌프란시스코 동물원의 호랑이 ‘타티아나’는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자신을 비웃은 관람객들을 쫓아가 공격했다. 탈출 능력이 있음에도 타티아나는 왜 그간 울타리를 뛰어넘지 않았던 걸까? 다른 사람을 놔두고 왜 굳이 그들만 골라 공격했을까? 맷 노스(Matt Knoth) 제공/위키미디어 코먼스

생태사학자 제이슨 라이벌 인터뷰

▶ 19세기 말 미국의 동물수집가이자 초대 뉴욕 브롱크스동물원장이었던 윌리엄 호너데이가 아일랜드를 여행할 때였다. 박물관에서 전시하려고 산 당나귀를 길가에서 죽인 뒤 해체하는데, 삽을 든 소작농들이 와서 주먹을 쳐들고 항의했다. “예수님도 나귀를 타지 않았습니까?” 작업은 중단됐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호너데이는 오두막으로 숨었다. 인간과 동물이 거친 밭에서 함께 일한 노동계급으로서 느낀 연대감 때문이었을까? 생태사학자 제이슨 라이벌은 그렇다고 주장한다.

‘동물은 노동계급이다’, ‘동물들도 저항한다’. 뚱딴지같은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두 명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역사책을 뒤지는 사람이 있다. 마르크스주의 생태사학자 제이슨 라이벌(45·Jason Hribal)이다.

스스로를 ‘동물의 왕국’ 역사학자라고 부르는 라이벌은 미국 털리도 대학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피터 라인보 교수 밑에서 박사학위를 마쳤다. ‘동물은 노동계급의 일부다’라는 제목의 그의 논문은 2003년 학술지 <레이버 히스토리>(노동사)에 실렸고, 2010년에는 동물이 인간에게 저항한다는 주장을 담은 책 <동물 행성의 공포: 동물들의 숨겨진 저항의 역사>를 펴냈다. ‘프롤레타리아 동물들’을 대변해 공산당선언을 꺼내든 것 같은 그의 급진적 선언은 이내 학계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이 처음 다루는 동물은 200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동물원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관람객을 습격해 죽인 시베리아호랑이 ‘타티아나’다. 호랑이 울타리가 미국동물원수족관협회(AZA) 기준(5m)보다 모자라는 3.8m인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지만, 이 사건이 제기하는 질문은 다른 데 있었다. 타티아나가 샌프란시스코 동물원에 온 건 2005년이다. 탈출 능력이 있었음에도 타티아나는 왜 2년 동안 울타리를 뛰어넘어 탈출하지 않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사유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제이슨 라이벌과 지난달 28일부터 여러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인터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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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의 저항을 연구하고 있는 생태사학자 제이슨 라이벌

-타티아나 사건을 설명해달라.

“2007년 크리스마스 때였다. 젊은 친구들이 물건을 던지고 큰 소리로 약을 올리면서 호랑이를 괴롭혔다. 타티아나는 갑자기 울타리를 뛰어넘어 그들을 뒤쫓았다. 한명을 죽이고 두명에게 부상을 입혔고, 타티아나는 출동한 경찰에 의해 살해됐다. 흥미로운 점은 다른 관람객들과 직원들도 있었는데, 타티아나는 굳이 자신을 괴롭힌 젊은 친구들만 쫓아가 복수했다는 것이다. 공원의 다른 지역을 돌아다닐 수도 있었지. 그런데 타티아나는 그러지 않았다. 특정 인물을 겨냥해 쫓았고 공격했다. 일종의 복수였다.”

-이게 왜 저항이라는 거지?

“우리는 동물과의 관계를 일방적으로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모든 관계는 상호적이다. 그리고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항상 ‘밀고 당기기’(negotiation)가 발생한다. 이를테면 수족관 돌고래는 돌고래쇼 동작을 배우기 위해 수년 동안 훈련과 재훈련을 거듭한다. 하지만 돌고래들이 항상 연습한 대로 쇼를 하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원래 주지 않을) 여분의 생선까지 먹기 위해 돌고래들은 의도적으로 돌고래쇼 진행을 늦춘다.(돌고래쇼에서는 한 동작을 완수할 때마다 보상용으로 생선을 준다.) 어떤 경우에는 쇼를 빨리 마치기 위해 계획된 순서 중 일부를 빠뜨리기도 한다. 그래야 좀 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행동을 이끄는 돌고래 리더가 있다. ‘저항’이라는 낱말의 정의는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지,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돌고래들은 잘 안다. 보상과 벌에 대해 알면서도 조련사 반대편에서 그런 행동을 벌이는 것이다. 이것이 저항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떻게 동물이 저항한다는 걸 인식할 수 있지?

“우리들은 그간 동물에게서 저항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나의 경우에는 1998~99년 대학원에서 지역 동물원을 조사하고 연구할 기회가 있었다. 동물원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시작됐고 동시에 도시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조사하는 매우 전형적인 연구였다. 그런데 나는 동물원에서 좀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거기 사는 동물들은 단순히 수동적인 물체들의 집합이 아니었다. 동물들은 탈출하고 있었다, 공격하고 있었다, 순응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매우 규칙적으로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 뒤 이 문제를 탐구하기로 했다.”

“과학이 동물 의도에 관심 가진 적 있나?”

저항의 사전적 의미는 “밖으로부터 가해지는 힘에 굴복하여 따르지 않고 거역하거나 버팀”이다. 우리는 왜 동물 따위는 저항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걸까? 저항은 고결하고 순수한 행위이기 때문에? 복잡한 사고와 의식을 지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라고 생각해서? 그러나 라이벌이 예로 든 돌고래들의 행동은 저항의 사전적 의미를 충족한다. 현대 동물지리학자들도 이 같은 동물들의 권력에 대해서 탐구해왔다. 이들은 푸코의 생명정치(biopolitics)나 라투르의 행위자 연결망 이론(ANT)을 이용해 동물들이 정치에 개입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논증한다. 핵심 개념은 ‘행위주체성’(agency)이다. 인간 및 비인간 행위자들이 네트워크를 이루고, 네트워크는 작동하고, 세상만사는 흘러간다. 행위의 의도를 따지기보다는 행위의 효과를 본다.(어차피 동물에게 의도를 물어볼 수 없으니까.) 따라서 동물에게도 행위주체성이 있다.

-어떻게 동물의 행위능력을 발견할 수 있나?

“범고래 ‘틸리쿰’이 미국 시월드 조련사를 공격해 숨지게 한 게 2010년이다. 수족관 전시·공연에 대한 항의가 폭발했고, 다큐멘터리 <블랙피시>를 비롯한 에세이와 책들이 출판되면서 선풍을 일으켰다. 시월드는 이미지와 수익 면에서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틸리쿰이 일으킨 반향은 5년이 지난 지금도 느껴질 정도다. 틸리쿰의 행동이 역사를 만들었다. ‘틸리쿰 효과’ 혹은 그의 행위주체성의 권력이 만든 효과다.”

-결국 ‘의도’의 문제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동물이 저항한다고 주장한다면, 의도가 있어야 하지 않나?

“아이러니는 ‘동물에게 의도가 없다’는 사실을 자연과학이 한번도 증명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동물의 의지와 지능, 언어, 감정 같은 것들을 자연과학은 탐구하지 않았다. 역사 속에서 과학자들이 실제로 무엇을 연구했는지 연구하지 않았는지를 보면 매우 흥미롭다. 과연 데카르트는 ‘동물은 기계다’라고 주장하면서, 불편부당한 위치에서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했나?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다. 수백년이 지났지만 데카르트의 근거 없는 주장은 ‘사실’이 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 이와 관련한 논쟁을 살펴보자. 한편의 진영에 피타고리안(피타고라스학파)들이 있다. 그들은 동물들도 의도와 감정,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많은 증거를 제시했다. 반대편 진영에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라고 주장한 스토아학파가 있다. 결국 경험 연구 없이 발전한 스토아학파의 ‘믿음’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느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이미지, 그리하여 동물을 인간과 같은 위치에 갖다놓은 것은 이런 믿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라는 등식이 성립했다.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되돌아가보자. 동물의 의도나 의지는 한번도 이슈가 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자유의지와 의도를 갖고 행동한다. 동물에게 의도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바로 우리 인간의 문제다. 우리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 있는 어떤 심리적 차원의 문제인 거지. 과연 우리가 특별한가? 아니면 또 어떤가?”

-인간중심적 시각이라며 당신의 이론을 비난하는 학자들도 있다. ‘동물판 마르크스주의 의인화’라고나 할까. 동물의 행동이 인간의 해석에 열려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의인화는 만화에나 나오는 것들이다. 스포츠카를 운전하는 고양이나 슈퍼맨처럼 날아다니는 강아지 같은 것 말이다. 난 동물 의인화를 한 적이 없다. 나는 역사학자다. 사건과 증거를 수집하고 단편적 조각들을 연결하여 분석하고 해석한다. 개개 사례들을 꿰맞추어 이론을 만드는 게 과학적 방법론이 아니면 무엇이 과학적 방법론이란 말인가? 역사 연구도 과학이다. 내가 하는 동물 연구는 분명 생소하고 처음 시도된 작업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과학적 방법론이 아니라고 할 순 없다.”

노동계급 말과 소유주 인간의 밀당

라이벌의 또 하나의 논증은 노동하는 동물들이다. 노동계급이 없었다면 자본주의는 발달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동물들이 없었다면 근대사회는 침체에 빠졌을 것이다. 북극해에서 잡힌 고래 기름은 야간 공장의 불을 밝혔다. 양은 근대 모직산업을 일으켰고, 소, 닭은 공장식 축산업을 축조한 노동자였다. 현대 테마파크의 수익원은 노동하는 돌고래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주요 도시에는 약 3500만마리의 말과 노새가 노동했다. 교통수단으로 노역한 말들은 신체적 착취로 잘해봐야 3~4년 일을 하고 퇴역했다. 말의 소유자들은 보살핌과 압제 그리고 이 둘을 섞은 ‘밀당’으로 노동계급 말을 부렸다. 말은 때로 요동을 치거나 움직이지 않으며 저항했다.

-전통적인 계급이론은 동물을 노동계급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당신 이론을 따르자면 노동계급을 재정의해야 한다. 계급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세가지 방식으로 동물과 관계를 맺는다. 가족, 커뮤니티 그리고 계급으로서다. 가족은 집에서 함께 사는 개와 고양이와 맺는 관계다. 커뮤니티는 우리 이웃이나 지역에서 사는 동물들과의 관계다. 커뮤니티에서 인간-동물 관계가 항상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계급은 노동관계에서 정의된다. 그간의 엄격한 이론을 따르자면 계급관계는 인간관계에서 비롯되지만, 나는 이것이 항상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말과 암소, 황소, 돼지, 닭들과 노동관계를 맺어왔다. 동물원이나 테마파크, 서커스의 조련사와 소유자들은 사자와 돌고래, 범고래 그리고 다른 동물들과 관계를 맺는다.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고 동물들도 행위능력을 가지고 저항한다. 동물들의 저항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시야를 확장해야 한다. 지구에 사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