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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7월 06일 17시 10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7월 06일 17시 18분 KST

5시간19분 국회 최장 연설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김대중평화센터/한겨레

이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다. 이 일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과 미국 유학,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만난 뒤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를 예정이다. 그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다. 이 일대기는 매주 한번씩 진행하는 육성 인터뷰를 바탕으로 삼아 김대중평화센터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 관련 책과 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집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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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박정희 정권이 재개한 한일회담 소용돌이 속에서 야당 의원 김대중은 ‘나홀로 온건’ 소신으로 ‘사쿠라’ 오해도 받았지만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도 했다. 그해 4월20일 야당 의원 김준연 구속동의안을 5시간19분 동안의 의사진행발언(필리버스터)으로 무산시키며 ‘명연설가 김대중’을 각인시켰다. 이희호 역시 안팎의 비난을 함께 감내하며 남편의 소신을 지지했다. 사진은 1967년 7대 의원 시절 재경위원으로서 국회 본회의장에서 질의하는 김대중.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는 1964년 첫 국정과제로 한-일 국교 정상화를 들고나왔다. 한일회담은 박정희 정권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희호의 남편 김대중에게도 한일회담은 정치인으로서 첫번째 시험대가 되었다.

김대중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둘러싼 추진세력과 반대세력 사이에서 제3의 의견을 내놓았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되 민족의 이익을 최대화하자는 현실주의 노선이었다. 그러나 한일회담 반대투쟁의 성난 파도는 중간에 있던 김대중까지 덮쳤고, 이희호도 그 여파를 피해가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1년 5·16 쿠데타 직후부터 사실상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을 시작했다. 국교 정상화는 미국의 뜻이자 쿠데타 세력이 원하는 일이었다. 미국은 동아시아 반공 진지를 튼튼히 하려면 한-일 국교 정상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다. 박정희에게는 미국의 인정과 지지가 절실했다. 박정희는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하러 가는 길에 일본에 들러 총리 이케다 하야토와 만났다. 이 만남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 일정이 합의됐다. 박정희는 이 합의를 한-미 정상회담의 선물로 들고 갔다.

1964년 초 미국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서두르라고 박정희 정권을 압박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발전 공약을 이행하는 데 자금이 필요했다. 돈이 궁한데다 미국의 압박이 거세지자 박정희는 1964년 3월에 회담을 재개하면서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 의사를 밝혔다. 박정희가 한일회담 타결에 속도를 내자 학생과 야당이 거세게 반발했다. 3월6일 ‘대일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발족했다.

반대투쟁이 마른 들판의 불길처럼 번졌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박정희는 비밀외교의 주역으로 일본에 머물고 있던 공화당 의장 김종필을 불러들였다. 또 김종필과 일본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 사이에 1962년 11월12일 작성된 비밀문서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공개했다.

이 메모의 내용은 성난 군중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일본이 한일회담 타결 조건으로 무상공여 3억달러, 정부차관 2억달러, 상업차관 1억달러를 제공하며, 그 대신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하고, 어업 문제에서도 이승만 평화선을 철폐한다는 것이었다. 평화선은 일본 어선의 조업을 막으려고 한반도 주변 50~100해리 지점에 이승만이 그은 방위선이었다. 학생들은 이 합의 내용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반발의 강도를 한층 더 높였다.

1964년 6월3일 전국에서 10만여명의 학생과 시민이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청와대 앞 저지선까지 나아갔다. 궁지에 몰린 박정희는 한때 대통령에서 물러날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때 박정희를 구해낸 것이 미국이었다. 미국 대사 새뮤얼 버거와 주한미군 사령관 해밀턴 하우즈가 이날 오후 헬리콥터를 타고 청와대에 들어가 박정희와 2시간 동안 밀담했다. 그 직후 박정희는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55일 동안 계속된 비상계엄 아래서 수백명의 학생과 시민이 구속됐다.

한일회담 반대투쟁의 파장은 야당에도 미쳤다. 김대중이 대변인으로 있던 민주당은 온건파를 대표했다. “그때 남편은 야당도 무조건 반대만 하지 말고 대안을 내자고 주장했어요. 내가 보기에도 그게 합당한 제안이었지요.” 그러나 제1야당인 민정당 당수 윤보선은 한일회담 반대투쟁에 모든 것을 걸었다. 야당 연합 회의에서 김대중이 “대안을 내야 한다”고 하자, 윤보선은 “한-일 국교 정상화는 매국이며 매국에는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 대안이다”라고 반박했다.

김대중이 야당 강경파와 다른 목소리를 내자 여기저기서 ‘사쿠라’라는 비난이 날아들었다. 사쿠라, 곧 여당과 야합하는 야당 정치인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정치생명이 끝날 수도 있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에는 여러 조건이 있잖아요. 그 조건들을 세밀하게 살펴서 우리에게 유리한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물리쳐가면서 국교 정상화를 이루면 좋은 일이지요. 남편의 뜻은 그렇게 하자는 것이었는데, 사람들이 오해를 했어요. 진심을 알아주지 않으니 참 속상했어요.”

김대중의 아버지까지 오해의 대열에 끼어들었다. 어느 날 하의도에서 동교동으로 편지가 왔다. “전도가 바닷길처럼 양양해야 할 사람이 어쩌자고 일본에 나라 팔아먹는 여당의 앞잡이가 돼서 세상 사람들한테 손가락질을 받는가?” 아버지는 아들을 나무랐다. “시아버지께서 편지를 보내온 적이 거의 없었는데, 그때 얼마나 걱정이 됐던지 그런 편지를 보내오셨어요.” 이희호도 남편과 함께 비난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때 이화여대에 출강하고 있었는데, 거기서도 비난의 소리가 들렸어요. 김대중이 매국한다고요. 그런 말들이 견디기 힘들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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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김대중이 1964년 6대 국회에 진출하자마자 맹활약을 펼치면서 이희호의 삶은 한층 분주해졌다. 출산·육아·가사·강의·여성단체 활동 그리고 의원 부인으로서 내조까지 1인다역을 해내야 했다. 사진은 결혼 직후인 1962년 8월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 총무 시절, 대홍수로 심각한 재해를 입은 전남 순천지역을 방문해 수재민들을 위로하던 때로 맨 가운데가 이희호.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는 남편의 소신을 지지했다. “그 무렵 남편은 케네디 대통령이 상원의원 시절에 쓴 <용기 있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이 힘이 됐어요.” 책의 메시지는 민중의 예지를 진정으로 믿는 정치인은 유권자의 일시적인 충동과 기분에 속박당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위대한 정치인들은 그런 용기를 보여주었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지역구 목포에 내려가 의정보고대회를 열기도 했어요.” 1만여명이 참석한 의정보고대회에서 김대중은 한-일 국교 정상화에 원칙적으로 찬성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에서 저지른 잘못을 고발했다.

한일회담 반대투쟁의 열기가 한창 고조되던 중 국회에 ‘김준연 구속동의안’이 상정됐다. 야당인 자유민주당 의원 김준연이 한일협정 비밀회담 때 박정희 정권이 “일본 정부로부터 1억3000만달러를 미리 정치자금으로 받았다”고 폭로한 것이 문제가 됐다. 박정희의 지시를 받은 공화당은 1964년 4월21일 김준연 구속동의안을 올렸다. 김대중은 의사진행발언을 신청했다. 구속동의안이 폐기될 때까지 발언을 할 작정이었다. “국회 발언을 앞두고 남편은 밤늦도록 자료를 준비했어요.”

김대중은 김준연 구속동의안의 부당함을 하나하나 지적했다. 여당과 의장은 의사진행의 취지에서 벗어나면 발언을 막고 표결에 들어가려고 노렸지만 틈을 찾지 못했다.

김대중은 국회의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구속동의안을 낸 것은 앞뒤가 바뀐 것이며, 도주하거나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없는데도 구속하려 드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김대중은 국회의 권위를 여당 의원들이 나서서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가 구속 동의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 무덤을 파는 것이고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형무소에 가두는 것과 같다.”

결국 저녁 8시가 다 되어 국회의장 이효상은 구속동의안 표결을 포기하고 폐회를 선언했다. 김대중의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방해)로 김준연은 국회에서 체포되는 것을 면했다. 검찰은 김준연을 국회 회기가 끝난 뒤 구속했다. 김대중의 발언은 <동아방송>에서 생중계한 덕에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다. 마이크를 신문지에 싸서 발언대 근처에 숨겨놓고 그대로 현장에서 내보냈다. 원고 없이 5시간 19분 동안 계속한 이날 발언은 훗날 기네스북에 국회 최장 발언으로 기록됐다. “이 일로 남편은 주목받는 국회의원으로 떠올랐어요. 그만큼 견제도 심해졌지요.”

야당과 시민의 반대투쟁으로 일시 후퇴했던 한일회담은 1964년 가을 다시 열려 이듬해 6월22일 매듭을 지었다. 한일협정 국회비준동의안은 여야의 몸싸움 끝에 1965년 8월14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한일협정의 최종 내용은 김종필-오히라 메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굴욕외교’라는 말을 들어도 싼 협정이었다. 무상공여 3억달러와 차관 3억달러로 36년의 지배·수탈에 대한 모든 청구권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승만 정권이 제시한 20억달러, 장면 정권이 요구한 28억5000만달러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액수였다. 박정희 정권은 어업협정에서도 이승만 평화선을 포기하고 12해리 전관수역으로 후퇴했다. 일본이 불법 강탈한 문화재도 일본 소유물로 인정했고, 한국인 원폭피해자, 강제 징용, 군대위안부, 사할린 동포 귀환 같은 문제도 묻혀버렸다. 한일협정은 두고두고 한국 정부의 발목을 잡았다.

한일협정의 정식 조인을 앞두고 야당은 반대투쟁전선을 단일화했다. 민정당과 민주당이 통합해 민중당을 결성하고 박순천 민주당 당수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제1야당 민정당이 제2야당 민주당에 흡수된 꼴이었다. 김대중은 국회비준특별위원회에서 한일협정의 내용을 낱낱이 비판했다. 김대중의 비판이 집중된 곳은 ‘3억달러 무상공여’였다. 3억달러라고 해도 매년 3천만달러씩 10년에 걸쳐 제공하며 또 매번 청산계정으로 450만달러를 빼고 2550만달러씩 주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이런 푼돈을 받을 바에는 아예 한 푼도 받지 말자고 제안했다. “우리가 36년 동안 받은 그 피해를 어떻게 3억달러로 보상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위해서 거절해버리는 것이 낫다.”

김대중은 대신 막대한 무역역조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일본에 대한 무역역조는 매년 7천만달러에서 1억달러에 달한다. 7천만달러로만 친다고 해도, 한일협정으로 1년에 2550만달러를 무상공여로 받아봐야 실제로는 4450만달러씩 밑지는 것이다. 이런 돈을 받을 것이 아니라, ‘무역을 일대일로 공평하게 하자, 우리가 사준 만큼 너희도 사 달라’ 하면 우리도 떳떳하고 실리도 훨씬 더 크지 않겠는가.”

이희호도 한일회담 결과를 수긍할 수 없었다. “우리 정부가 터무니없이 적은 보상으로 너무나 많은 양보를 하고 말았어요. 만약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하지 않고 야당과 공조해서 협상을 진행했더라면 그런 굴욕적인 협정을 맺지는 않았을 거예요.” 애초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미국의 환심을 사려고 서둘러 회담을 진행한 탓에 국익이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는 것이 이희호의 판단이었다.

한일회담으로 정국이 들끓던 때 또 하나의 문제가 이슈로 떠올랐다. 베트남 파병 문제였다. 1964년 8월의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삼아 미국이 북베트남을 폭격함으로써 남베트남 정부와 반군 사이 내전이 북베트남과 미국의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 9월 의무요원을 비롯한 비전투요원 100여명을 베트남으로 파견했다. 또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의 추가파병 요청을 받고 이듬해 2월 2000여명의 비전투부대를 보냈다.

박정희가 베트남 파병을 미국에 처음 제안한 것은 1961년 11월 미국 방문 때였다. 한-일 국교 정상화 안건과 마찬가지로 쿠데타 정권에 대한 지지를 얻으려고 한 제안이었다. 처음에 미국은 박정희의 제안을 거절했으나, 3년 뒤 전쟁이 전면전으로 번지자 태도를 확 바꾸었다. 박정희는 1965년 10월 전투부대를 베트남으로 파견했다.

이후 1973년까지 한국은 30만명이 넘는 전투 병력을 베트남 전장에 보냈다. 베트남 파병으로 5000명이 넘는 사망자와 1만1000여명의 부상자가 났지만, 언론은 이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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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미국의 지지를 얻고자 베트남전 파병 요청을 받아들여 전투부대까지 파견했다. 김대중은 전투병 대신 퇴역 군인 의용군을 보내라며 반대했지만 정치인으로서 현지 장병 위문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은 1966년 9월 베트남 전선을 방문한 민중당 총재 박순천(맨 오른쪽)과 대변인 김대중(왼쪽 둘째)이 유병현 파월 맹호사단장(오른쪽 둘째) 등과 환담하는 모습. 사진 <한미연합사 창설의 주역-유병현 회고록> 중에서

김대중은 전투부대 파견에 반대했다. 1965년 1월25일 정부의 추가파병 동의안에 대한 국회 질의에서 김대중은 미국의 요구를 통째로 거부하기 힘들다면 퇴역 군인으로 의용군을 모아 대신 보내라고 제안했다. 박정희 정권은 전투병 파견을 강행했다. 김대중은 민중당 대표 박순천과 함께 1966년 9월 베트남 현지를 방문했다. “파병이 이루어진 이상 야당 국회의원이라 하더라도 현지의 장병들을 찾아 위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남편의 생각이었어요.”

한국은 베트남 파병으로 10억달러가 넘는 외화를 벌어 제2차 경제개발계획(1967~1971)을 가동할 연료로 썼다. 한국이 베트남 특수를 본 것은 사실이지만, 베트남 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한국이 베트남 전쟁 전 기간에 벌어들인 달러보다 훨씬 더 많은 달러를 해마다 벌어들였다. 일본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20여명을 파견한 대만도 한국과 비슷한 액수의 달러를 벌었다. 한국의 베트남 특수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바치고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라는 과오를 저지르며 얻은 것이었다.

뒷날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취임 첫해에 이희호와 함께 베트남을 방문했다. 현직 대통령으로는 첫 방문이었다.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베트남이 미국을 패배시킬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베트남은 중국 왕조에 동화되지 않은 민족이고 프랑스를 혼자 힘으로 몰아낸 민족이며 미국과 싸워 승리한 유일한 민족이었다. 김대중은 베트남 국가주석과 한 회담에서 “두 나라 사이에 한때 불행한 시기가 있었다”고 베트남 파병에 대해 사과했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베트남 국민이 국부로 추앙하는 호찌민의 묘소를 참배하고 묘소 앞에 꽃을 바쳤다.

인터뷰 녹취정리/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