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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7월 06일 07시 56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7월 06일 07시 56분 KST

하청업체 울리는 '악마의 대출'

한겨레

“쿵쾅 쿵쾅 쿵쾅….” 지난달 5일, 경기 안산 반월공단에 자리잡은 영진몰드테크. 사장실이라야, 변변한 명패조차 없다. 밖에선 기계음이 끊이질 않는다.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데, 기업은행 반월서지점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내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돈 없어요. 당장 어떻게 갚으라고 그래요, 정말….” 지난달 말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걸려오는 전화에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기업은행 브이아이피(VIP) 고객에서 졸지에 연체자로 전락했다. 은행은 3억원을 갚으라고 독촉했다. 그가 지난해 원청업체인 그린테크놀로지에 납품하고 나서 은행으로부터 받은 돈이다. 그는 이 돈을 자신이 갚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김성진 사장은 휴대전화 부품 제조 분야에서 20년 넘게 일했다. 2년 전 독립해서 제 사업을 시작했다. 회로기판의 바탕이 되는 쇠틀(금형)을 만드는 일이다. 지난해 18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삼성전자 로고가 찍혀 전세계에 팔리고 있는 갤럭시 에스(S)와 노트 시리즈엔 김 사장의 공장에서 만든 부품이 들어가 있다.

이 ‘연성 인쇄회로기판’(FPCB)은 전선 없이, 기판에 인쇄된 회로로 전기를 전달한다. 휴대전화의 소형화를 가능하게 한 핵심 부품이다. 김 사장은 이를 삼성에 곧바로 납품하는 게 아니라, 삼성의 2차 협력업체인 그린테크놀로지에 납품해왔다. 영진몰드는 삼성의 3차 협력업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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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5월 말 그린테크가 갑자기 부도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지난해 11월 그린테크로부터 외상매출채권(어음)을 받은 것이 발단이었다.

당시 원청업체인 그린테크는 그해 9월에 납품받은 물건값을 두달 만에 주면서, 현금 대신 사실상 어음인 외상매출채권으로 결제했다. 만기 6개월짜리였다. 김 사장은 외상매출채권을 은행에 담보로 맡기고 대출을 받는 식으로 물건값을 회수했다. 이른바 외상매출채권 담보 대출(외담대)이다.

사고가 터진 것은 6개월이 흐른 지난 5월26일이다. 이날 그린테크가 외상매출채권 결제를 못 하면서 부도가 났다. 은행은 그날 바로 김 사장에게 상환청구권을 행사했다. 물건을 판 그가, 물건값을 못 낸 원청업체를 대신해 은행에 대출금을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 사장은 이 일로 불면증을 겪고 있다. 5월 말부터 거의 하루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사흘 동안 밥을 거르기도 했다. 기업은행 반월서지점은 대출금을 갚지 않으면 집 등을 가압류할 수 있다고 했다. 못 갚는 대출을 새로운 대출로 바꿔주겠다며 대환대출을 권했다. 금리 9.4%짜리다.

김 사장처럼 은행으로부터 대출 상환 연락을 받은 그린테크 하청업체는 모두 71곳에 이른다. 금액으로는 89억원이다. 그린테크에 물건을 납품했다는 이유로, 본인들이 은행에 물건값을 물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그린테크가 지난해 11월 발행한 어음을 결제하지 못하면서 일시에 빚어진 사태다.

은행들은 납품업체 사장들을 압박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쥐고 있다. 이들이 쓴 대출약정서다. 은행은 “상품 특성을 다 설명했고 업체가 직접 서명했다”고 주장한다. 김 사장도 기업은행과 대출약정서인 ‘비투비(B2B)팩토링 계약서’를 체결했다.

하지만 김 사장은 “사인을 하라는 데 하고, 도장도 찍으라는 데 찍었을 뿐이다. 문제가 생기면 그린테크가 아니라 내가 갚아야 한다는 설명은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지난해에도 다른 업체에 물건을 납품했다가 1억2400만원을 떼였다. 그는 “그때는 외담대가 아니었다. 지금만큼 분통이 터지지는 않았다. 외담대는 어음보다 나쁘다.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어음은 원청기업(구매자)과 하청기업(판매자) 사이의 문제이지만, 외담대는 그 중간에 은행이 끼어 있다. 원청기업이 발행한 어음(외상매출채권)을, 하청기업이 은행을 통해 할인받아 물품대금 결제를 받는 구조다.

하청업체 입장에서는 은행에서 받은 터라 안심하게 된다. 하지만 원청기업이 어음을 결제하지 못하게 될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어음은 물건값을 떼이고 말지만, 외담대는 은행으로부터 거래가 막히는 등 금융상 여러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은행 입장에서는 ‘땅 짚고 헤엄치는 장사’다. 구매 기업이 외담대 결제를 못 하면, 판매 기업에 상환을 요구한다. 이중으로 담보가 돼 있기 때문이다. 전액 일시 상환이 어렵더라도, 10% 안팎의 높은 금리의 대환대출로 유도할 수 있다.

대환대출 금리는 기존 대출 금리의 3배가량이다. 기업체 사장들은 은행에 연체나 가압류 기록이 남을 경우 제 이름으로 사업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고금리의 대환대출을 받아들인다. 갚지 않으면 해당 은행뿐 아니라 다른 은행을 통한 결제도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피해 기업들이 은행으로부터 상환청구권의 존재를 제대로 설명 듣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겨레>가 피해 업체 93곳 중 조사에 응한 45곳을 분석해봤더니, 외담대를 쓴 업체는 33곳이었다.

이 가운데 은행으로부터 “하청업체가 대출금을 상환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듣지 못한 업체가 28곳(85%)이었다. 설명을 들은 업체는 1곳에 불과했고, 이마저도 본인이 은행에 물어봐서 들은 것이었다. 나머지 4곳은 확인되지 않는 경우 등이었다. 이에 기업은행 반월서지점과 우리은행 과천지점은 “상환청구권에 대해 설명했다”고 밝혔다.

설령 피해 기업들이 상환청구권의 존재를 알았더라도 이를 거부하기란 매우 어렵다. 원청업체와 거래가 끊기는 것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11월 그린테크의 외담대 방식 결제를 거부한 업체 중 일부는 거래가 끊겼다. 불공정한 갑을관계가 불완전 상품의 수요를 계속 낳고 있는 것이다.

외담대 제도는 2001년 도입됐다. 어음제도를 보완한다는 취지였으나, 어음보다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왔다. 지난해 신발회사 에스콰이어의 부도 당시 하청업체 100여곳이 300억원 가까운 외담대 피해를 봤고, 쌍용건설도 이를 활용해 하청업체의 피해를 키웠다. 하청업체를 옥죄는 ‘악마적 대출’로 불리기도 한다. 지난 2월 금융감독원은 은행의 설명 의무를 강화하고, 외담대 대출 관련 보험을 확대하는 내용의 보완책을 내놨다.

하지만 상환청구권 유지 등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보험료도 하청업체들이 내야 한다. 이 제도로 이득을 보는 이용자는 원청업체인데도 하청업체가 비용을 떠안는 셈이다. 보험도 가입률이 낮아서 실효성이 거의 없다. <한겨레>가 신용보증기금에 확인해 봤더니, 외담대를 포함한 어음 관련 보험에 가입한 경우는 0.8%(액수 기준)에 불과했다.

외담대 제도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현금결제 확대다. 지난 몇년 사이 삼성 등 대기업은 1차 하청업체에 현금결제를 하고, 1차에서 2차 하청업체로 내려갈 때도 대부분 현금결제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3차로 내려갈 때부터는 외담대 등 변칙적인 어음결제 비중이 여전히 크다. 5일 이학영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한겨레>에 제공한 자료를 보면, 지난 3월 기준 외담대를 쓰는 중소기업은 4만7000여곳이고 금액으로는 7조2500억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원청이 어음결제를 못해 문제가 생겼을 때, 하청업체가 물어야 하는 상환청구권이 있는 대출금은 4조7300억원이다.

김 사장은 피해 업체들과 함께 대출을 상환할 의무가 없다는 내용의 채무부존재 소송을 은행을 상대로 걸 예정이다. 은행이 핵심 내용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채 상품을 팔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 사장은 “이길 수 없을지 모르지만, 피해가 재발하는 것을 막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