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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5월 04일 12시 50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6월 01일 14시 00분 KST

허영만·이두호·장태산...환갑 넘은 거장들의 생존 비법

“만화가치고 환갑 넘기는 사람 없어. 각오해야 해.” 만화가 장태산(62)이 처음 만화를 그리기 시작할 때 선배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야기다. “마흔만 넘겨도 한 세대에 1~2명 남는다. 나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직업이다.” 만화가 윤태호(46)가 했던 말이다. 노동강도는 높지만 성인 만화시장은 좁은 탓에 현역 만화가로 나이 들긴 어려웠다.

그런데 만화가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지난달 29일 만화가 허영만(67)은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허영만 창작의 비밀’이라는 전시를 시작했다. 이두호(73)는 2013년부터 시작했던 <이두호의 머털이 한국사>를 지난달 10권을 내면서 완간했다. 1992년 냈던 <만화 객주>도 다듬어서 재출간했다. 장태산은 환갑을 넘긴 나이에 네이버에서 웹툰 연재를 시작했다. 80년대 한국 만화 중흥기를 대표했으며 2015년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는 3명의 작가를 만나 보았다.


40년 그린 원화 15만장 전시회 여는 허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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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다, 이건 너무 많다….” 한국 만화가 최초로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전시를 준비하며 허영만 작가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이번 전시를 하면서 내가 그렸던 만화들을 헤아려봤더니 타이틀만 215가지더라. 한달에 3권씩은 그려내야 했던 만화계의 부끄러운 역사도 그 속에 있다. 내가 몇권을 했는지조차 모르면서 계속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길을 밟으며 창작생활을 해왔다”고 말했다.

전시에 걸린 작품만 원화 15만장, 드로잉 500점으로 방대한 분량이다. <각시탈>(1974)에서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2013)까지, 허영만표 만화는 한국인의 삶에 밀착한 만화를 뜻하는 브랜드가 됐다. 작가 자신은 “원래 나는 항상 2등이었다. 지금은 나를 한국 만화 브랜드처럼 말하지만 내 실력으로 1등 한 게 아니라 그때 같이 어깨를 겨뤘던 동료들이 지금은 안 보여서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한다. 1974년 소년한국일보 신인만화 공모전에 <집을 찾아서>가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올해로 41년째 그의 펜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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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타짜, 식객

쉬지 않고 작품을 계속할 수 있는 이유를 묻자 허 작가는 “자신을 가만히 놔두지 않고 못살게 구는 덕분”이라고 했다. 예술의전당 전시실에 걸린 그의 하루 일과표를 보면 그는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 화실로 간다. 하루 11시간 작업하고 잠은 5시간만 자면서 부지런을 떤다. 화실 벽에 좌우명을 써 붙이는 게 취미다. 듣고 보는 모든 이야기를 메모하고 스케치로 남긴 게 몇 상자는 된다. 게다가 올 1월부터는 한 일간지에 만화 <커피 한잔 할까요?>(글 이호준) 연재를 시작했다. 작가 자신은 커피를 한 모금도 못 마시지만 군침 도는 향기를 그려내기 위해 또 수많은 취재노트를 쌓고 있다.

“나는 진화한다. 진화할 것이다.” 허영만 작가는 이번 전시는 결코 은퇴를 위한 정리도 회고도 아니라는 점을 여러 번 강조했다. “앞으로 나가기에도 바쁜데 뒤를 챙길 시간이 없다”는 작가는 “여러 해 전부터 노인들 이야기를 그린 노인만화를 그리고 싶었다. 누가 볼까 싶어 손을 못 댔다. 돈 때문에 벌어지는 숨막히는 사건들을 다룬 만화도 그리고 싶다. 내일을 기다려달라”는 당부를 남겼다.


70대에 ‘머털이 한국사’ 10권 완간한 이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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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이두호의 작업실에는 펜촉만 모아둔 통이 있다. 하루에 2개씩 펜촉이 닳았던 <만화 임꺽정>을 그리고 나니 닳아버린 펜촉만 커다란 유리병으로 6통이다. 조선시대 역사와 민중들에 대한 만화를 그려 ‘바지저고리 만화가’라는 별명이 있는 이두호의 만화는 그야말로 공력의 소산이다. 임금이 앉아 있는 한 장면, 조선시대 궁궐의 모습 한 장을 그려도 같은 페이지를 채색과 펜화의 두 가지로 그린다. “이전에도 지금도 컴퓨터 채색, 아크릴, 화선지 등 모든 도구를 활용해서 즐기는 마음으로 그린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대본소 만화 시절, 같은 세대 작가들이 단행본을 우선할 때도 그는 일간지와 만화잡지 연재를 고집해왔다. “연재 압박은 굉장하다. 일간지는 4페이지, 주간지는 7~8페이지를 그려야 하는데 조선시대를 그리다 보니 자료도 많이 찾아야 하고, 손으로 하는 채색은 대부분 직접 한다. 내가 무식하고도 미련해서 그렇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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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털이 한국사

이두호 작가는 박기정 화백 문하생으로 배우다가 1969년 <소년중앙> 창간 때 본격적인 만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희작, 윤승원, 신문수 등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으니 지금 활동하는 만화가 중 최고참인 셈이다. 동료 작가들의 펜이 뜸해졌지만 이두호 작가는 “4년 취재하고 3년 걸려 그린 <머털이 한국사>”를 놓자마자 올해 다시 새 만화 연재를 시작할지를 두고 고심중이다.

화가의 마음으로 민초들의 바지저고리를 그려온 그가 갈수록 그림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웹툰 시대에 대처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만화가가 좋은 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독자 눈치 살피고는 못 산다. 나는 앞으로도 내 마음대로 그린다. 거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그도 “생계 때문에”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 그리는 만화가의 운명에선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작품 중 “정말 그리고 싶어서 그렸던” <덩더꿍>을 가장 아낀다고 했다. 조선시대 이야기에 빗대어 지금 시대를 풍자하고 때론 백성들의 속을 후련하게 풀어주고 싶은 것이 만화가로서의 꿈이다. 그가 작업하는 책상에는 몇번을 고쳐쓴 ‘세월호’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공원에 나가서 3시간 동안은 돌아다니며 소나무든 의자든 닥치는 대로 스케치하고 그려야 직성이 풀린다”는 이두호 작가는 “평생 그린다. 무엇을 어떻게 그리느냐가 중요하다”고 잘라 말한다.


환갑이 넘어 ‘웹툰작가’로 변신한 장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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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재, 이현세 작가 등과 함께 1980년대 대본소를 지배했던 장태산 작가는 올해 1월 네이버 웹툰에서 <몽홀>이라는 작품 연재를 시작했다. 많은 용기와 준비가 필요했다. 6년 전 부천만화영상원에 작업실을 차린 장 작가는 종이와 붓을 과감히 치우고 석정현, 최규석, 하일권 등 후배 작가들에게 컴퓨터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묵직한 선, 배경이 되는 몽고에 대한 방대한 자료조사 등은 ‘옛날 작가 스타일’ 그대로다.

젊은 작가들은 작품의 밀도를 높이는 데 힘과 훈련이 필요하지만 40년 동안 손으로만 그려온 장태산 작가는 그림의 밀도를 낮추는 게 과제다. 매주 한번씩 만화를 올리면 댓글을 일일이 살핀다는 그는 스마트폰으로 만화를 보는 젊은 독자들이 “선이 복잡해서 알아보기 힘들다”고 토로하자 지금 1회부터 일일이 고쳐 그리고 있다고 한다. 디지털 만화에선 사진에서 선만 따내서 만화 배경을 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장태산 작가는 그런 작업은 할 줄도 모르고 할 생각이 없다. 종이 대신 태블릿을 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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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홀

“고민이 많았다. 내가 20~30대라면 색다른 공부가 필요없겠지. 하지만 지금 젊은 세대들의 만화나 그림을 보면 저 자식이 우주인이냐, 내가 우주인이냐 싶다. 댓글을 열심히 읽어보는 이유는 내가 40년 동안 만들어온 방향도 포기할 수는 없지만 이들이 어떤 놈들인지는 알아야겠다 싶어서다”라고 말하는 작가도 가끔 댓글을 보면서 ‘버럭’할 때가 있다. “답답한 댓글을 보면 혼자서 컴퓨터에다 대고 소리지른다. 이 자식, 너, 너, 난독증이지? 하면서. 하하.”

주인공 이름부터가 테무친인 웹툰 <몽홀>은 칭기즈칸의 일대기를 연상시키지만 작가는 실제 역사와는 상관없다고 강조해왔다. “칭기즈칸이라는 인물의 삶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 시대의 야만을 묘사하는 데 주력한다. 더 나아가선 과연 그 시대와 지금은 무엇이 다른가 이입해보려고 한다. 칼로 쳐서 사람 죽이는 게 잔인하냐 이상한 법으로 피말리는 게 잔인하냐 하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인기없을 게 뻔하지만 이건 내 인생의 마지막 장편이 될지 모른다. 책으로 치면 적어도 20권 분량, 앞으로 5~6년은 하려고 한다”는 게 작가의 뚝심이다. “내가 시대가 변했다는 사실을 우습게 봤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원래 만화는 이렇게 가는 거야. 이놈들아.” 환갑을 넘겨 웹툰작가를 시작하면서 하루종일 끙끙거리고 징징거린다는 장태산 작가의 혼잣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