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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5월 02일 07시 50분 KST

옹달샘만 하차시키면 된다?

연합뉴스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장두석과 이봉원이 1987년 한국방송 <쇼 비디오 자키>에서 선보여 인기를 끈 코너 ‘시커먼스’는 1988년 돌연 폐지됐다. 흑인 비하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얼굴을 검게 칠하고 곱슬머리 가발을 쓴 남자들이 흑인 음악에 맞춰 랩을 하며 스스로 ‘시커먼스’라 칭하는 코너를, 인종주의적 개그가 아니라 말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흥미로운 건 코너가 폐지된 시점이다. 87년엔 정치적으로 공정했던 코너가 88년에 갑자기 불공정해진 걸까? 그럴 리가. 서울올림픽이 이유였다. 전세계 선수들이 모이는 자리, 혹시 해당 코너를 보고 불쾌함을 느끼는 선수가 있으면 안 되니 급하게 폐지한 것이다.

그건 ‘남들 다 보는 자리 말고 우리끼리라면 이 정도 농담은 괜찮다’는 시대적 분위기가 있었단 뜻이리라. 그런 게 아니라면 12년이 지난 1999년 ‘사바나의 아침’의 흥행을 설명할 수 없다. 가상의 부족 ‘사바나족’의 일상을 그린 이 코너는 아프리카 현지인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게으르게 반복한 코너였는데, 부족 내 우스꽝스러운 의사소통 방식이나 ‘추장’ 심현섭이 엉터리 아프리카어로 읊는 정체불명의 주문에 불쾌함을 호소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 외려 낯선 포맷이었던 한국방송 <개그콘서트>와 신인이던 심현섭을 단숨에 안착시킬 만큼 인기가 좋았다.

반면 2004년 한국방송 <폭소클럽>에서 정철규가 선보인 캐릭터 ‘스리랑카 출신 이주노동자 블랑카’는 다소 기구한 이유로 개그의 방향을 틀어야 했다. 산업특례요원 시절 이주노동자들의 애환을 지켜본 정철규는, 그들이 당하는 온갖 차별과 학대를 ‘블랑카’ 캐릭터의 입을 빌려 고발했다. 그러나 정철규는 방송 3주 만에 한국인 아내와 살면서 겪는 문화 차이를 호소하는 내용으로 코너를 바꿔야 했는데, 중소기업 사장들이 ‘자신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학대한 적이 없으며, 계속 같은 내용으로 방송을 했다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단체로 항의한 결과였다. ‘사바나의 아침’이 상시적으로 저지른 인종주의적 개그는 우리끼리 웃자고 한 거니 용인하고, ‘블랑카’의 한국 사회 비판은 사실과 다르니 중단하라고 윽박지르는 게, 우리가 20세기를 마무리하고 21세기를 시작하는 방식이었다.

아마 만만한 상대만 조롱하라는 암묵적인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문명국가이자 선진국의 일원인 우리는 남들을 깔볼 수 있는 농담의 주체이지, 그 대상이어선 안 된다는 이상한 우월감의 결과. 만시지탄이지만 그래도 세월이 지나며 인종주의적 개그는 제법 많이 줄었다. 2006년 한국방송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한 천명훈은 흑인 미국인 레슬리 앞에서 ‘시커먼스’ 춤을 췄다가 시청자들의 항의에 사과해야 했고, 야구선수 김태균 또한 2013년 당시 롯데 자이언츠 소속 쉐인 유먼 선수를 두고 “이가 유달리 하얀 탓에 공과 겹쳐 보여 구질 파악이 어렵다”고 말했다가 거센 비난에 직면했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게 일상이 되면서, 말하는 이든 듣는 이든 인종주의적 농담은 부적절하다는 걸 깨달은 거다.

인종주의적 농담은 줄어들었다 해도, ‘만만한 상대’만 놀리는 한국 코미디의 관습은 여전하다. 권력자를 놀리면 목이 달아나는 시절을 거치며, 알아서 만만한 상대만 소재로 삼는 게 습관이 된 탓이다. 한국 코미디는 ‘바보’라는 말랑한 어감 뒤에 숨어 지적장애인을 놀렸고, 비만인을 향한 비아냥도 멈춘 적이 없으며, 사회가 정한 미의 기준에 맞지 않는 여성들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방송에서 성 정체성을 소재로 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던 시절에 비하면 나아진 거라 볼 수도 있겠지만, 티브이 코미디 속 게이는 여전히 호들갑스러운 행동거지로 아무 남자에게나 추파를 던지는 존재로 묘사된다. 수적 다수라는 이유로 시선의 주체이길 자처한 ‘정상 시민’, 즉 정상 체중의 한국인 스트레이트 비장애인 남성이 아니라면, 누구든 무례한 농담의 소재로 소비당할 수 있다.

혹자는 한국엔 하회탈놀음의 이매탈과 같은 ‘바보’ 캐릭터의 전통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어눌한 몸놀림으로 상대를 방심시키고는 불시에 양반님네들과 권력자의 위선을 폭로하는 이매탈과 오늘날의 ‘바보’ 코미디를 등가 비교하는 것은 결례다. 미국에도 게이 코미디나 ‘뚱보’ 코미디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지만, 보통 그런 코미디들은 게이에 대한 스트레이트 남성들의 근거 없는 공포나 비만인을 조롱하는 세상 자체를 조롱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체중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세상을 비꼰 영화 <너티 프로페서>와, 게이 남성에 대한 보수주의자의 편견을 비웃는 영화 <버드케이지>가 미국에서 발표된 게 1996년, 벌써 19년 전 일이다.

무례한 농담이 허용되는 것 또한 그것이 가진 자와 권력자를 조롱하거나, 혹은 우리 스스로 위선을 고발할 때나 용인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미국의 스탠드업 코미디언 루이스 시케이는 노예제도를 소재로 관객들을 도발한 뒤 스마트폰을 흔들며 말한다.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놀라운 첨단기술을 가질 수 있었겠어? 이 스마트폰을 만드는 공장이 노동자들이 투신자살할 정도로 악몽 같은 곳이라서 가능한 거야. 우리에겐 선택지가 있어. 촛불 켜고 말 타고 다니며 서로에게 친절하게 굴거나, 아니면 먼 곳에 사는 누군가가 헤아릴 수 없이 고통받도록 내버려 두거나. 네가 이 폰으로 화장실에서 똥 싸면서 유튜브에 악플이나 달 수 있게 말야.” 얼얼할 정도로 무례한 어법이지만, 그것이 공격하는 건 착취를 묵인하는 우리 자신의 위선이지 이름 모를 약자가 아니다.

코미디의 소재에 성역이 있어선 안 된다. 그러나 그게 소재를 쉽고 게으른 방식으로 착취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코미디가 예의 바른 화법만 써야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 무례함이 약자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쓰여선 안 된다. 그렇게 까다롭게 허락된 소재와 화법의 자유를, 옹달샘 트리오(장동민, 유세윤, 유상무)는 약자들을 향해 휘둘렀다. 자신들끼리 진행하던 팟캐스트 방송 <옹달샘의 꿈꾸는 라디오>에서, 장동민은 성 경험을 고백하는 여자를 ‘멍청하다’고 말하며 처녀성에 대한 집착을 드러냈고, 삼풍 참사 생존자를 두고 ‘살기 위해 소변을 음용했다’며 ‘소변 먹는 동호회 창시자’라 조롱했다. 유세윤은 장애인의 신체적 특징을 잡아 과장되게 흉내내며 비웃었다. 많은 이들이 듣는 방송은 아니었던 탓에 널리 알려지진 않았던 이 내용들은, 다음해인 2015년 장동민이 문화방송 <무한도전>의 ‘식스맨’ 프로젝트의 후보로 급부상하면서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

“친구끼리 사석에서 농담하듯 편하게 말하는 콘셉트의 팟캐스트”라며 이들을 옹호하는 이도 있지만, 지금은 1987년이 아니다. “우리끼리” 있는 자리라고 차별적 개그를 선보여도 넘어가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 상황이 커지자 옹달샘 트리오는 뒤늦게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제대로 적시하지 않은 채 ‘드릴 말씀이 없다’고 슬쩍 넘어가는 사과문에 만족한 사람은 별로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들의 퇴출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러나 방송계가 이것을 ‘옹달샘만 하차시키면 된다’는 시그널로 받아들인다면 오산이다. 이들을 퇴출한다고 지금의 상황이 해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옹달샘이 아니더라도 방송계엔 여전히 부부싸움에서 이기겠다고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아이, 두번 다시 못 보게 하겠다”고 아내를 협박했다는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엠시도 있고, 게이가 아니냐는 질문에 “전 건강합니다”라고 답하며 졸지에 성소수자들을 건강하지 못한 존재로 매도하는 배우도 있다. 옹달샘만큼 자극적인 언어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전시해도 별문제가 안 되던 시절을 건너온 이들이 많지 않은가. 스스로를 시대에 맞춰 교정하지 않은 채, 그것을 ‘우리 세대의 특징’ 정도로 대충 눙치며 말이다. 진짜 중요한 건, 이번 일을 계기로 웃음을 핑계로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 혐오를 정당화하는 풍토를 바꾸고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것이다. 87년에 ‘시커먼스’를 보고 웃던 시청자들이 2006년엔 항의를 보낸 것처럼, 이제 더 이상 차별적인 농담을 용인해선 안 된다는 걸 확실히 하는 일. 어쩌면 2015년은 그 원년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