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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4월 23일 11시 19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4월 23일 11시 26분 KST

아베의 미·중 향한 반성, 한국 고립 노림수다

AP/연합뉴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2일 반둥회의 60주년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서 연설하면서,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 대신 “지난 대전(大戰)에 대한 깊은 반성”만을 언급하면서, 이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앞으로 한국 외교의 새로운 고민거리로 떠오르게 됐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사학)는 이날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아베 총리가 ‘지난 일본 정부의 역사인식을 계승한다’고 언급하지 않고, 지난 전쟁에 대한 반성만을 말한 것은 역사 인식의 후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은 70년 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평화국가로 전환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인들의 인식에 전쟁이나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은 있었지만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은 들어 있지 않았다.

이런 인식이 처음 포함된 것이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한 통절한 사죄와 반성의 내용을 담은) 1995년 무라야마 담화였다”고 설명하면서, 아베 총리의 연설이 그에 견줘 불충분하다고 말했다.

한·일 양국은 관계 정상화 이후 지난 50년 동안 역사에 대한 공통의 이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에선 사죄의 대상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로 광범위하게 표현됐지만 1998년 10월 ‘한-일 파트너십 선언’에선 그 대상이 ‘한국’으로 특정됐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병합한 지 100년이 되던 2010년 발표된 ‘간 담화’엔 “한국인들이 의사에 반해 이뤄진 식민지 지배에 의해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는 표현이 담겼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번 아베 총리의 연설은 한·일 양국이 지금까지 쌓아온 역사 인식과 관련한 성과를 크게 훼손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무라야마 담화의 주인공인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도 21일 “아베 총리가 (식민지배와 침략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까 이를 건들려 하지 않는다”고 일침을 놓았다.

기무라 간 고베대학 교수는 “한국이 원하는 식민지배에 대한 언급을 제외함으로써 앞으로 일본은 한국과 중국을 분리하고 한국을 고립화시켜 나가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일본의 보수 정서를 대변하는 <요미우리신문>은 이날 사설에서 “적어도 (중국을 침공한)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옛 일본군의 행동은 침략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며 “침략이라는 용어를 언급하지 않으면 이 사실을 지우고 싶어 한다는 오해를 부를 수 있다”고 했다. 사설은 중국에 대한 배려를 요구하면서도 한국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번 연설로 오는 8월 2차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발표될 ‘아베 담화’의 틀이 드러나면서 한국 외교의 셈법은 복잡해지고 있다. 특히 오는 29일 아베 총리가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지난 대전에 대한 깊은 반성’만을 언급한다 해도, 미국은 일본이 전쟁에 대한 사과를 했으니 식민지배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명확히 사과하지 않는 것은 문제 삼지 않을 거란 전망이 나오고 있어, 아베 총리의 과거사 인식을 둘러싸고 한-미 사이의 골이 깊어지는 상황이 예상된다.

우리 정부 관계자는 “만약 아베 총리가 미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2차대전 당시 진주만 공습 같은 일을 거론하며 전쟁에 대한 반성의 뜻을 보인다면 아마도 미 의회는 박수를 보내줄 것”이라며 “그런 분위기에서 한국이 과거사에 대해 사과가 없다며 문제 제기를 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취급을 당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가 이번 연설처럼 국제무대에서 ‘사과 없는 반성’만으로 저변을 넓혀간다면, 정부 출범 이후 줄곧 강경일변도로 내달려온 박근혜 정부의 대일본 외교가 근본적인 한계에 맞닥뜨릴 위험도 있다. 정부는 “과거사 문제에서만큼은 일본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강조해왔지만, 아베 총리의 연설 등을 통해 ‘일본이 저렇게 사과하고 있지 않느냐’는 인식이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