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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4월 11일 07시 49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4월 11일 07시 57분 KST

베트남전 학살 생존자와 보낸 일주일: "저희는 심장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토요판] 르포

1975년 종전된 베트남전쟁에 연인원 32만명을 파견한 한국군은 9000명에 이르는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의혹과 논란에 휩싸여 있습니다. 이 학살에서 살아난 두 명이 광복 70년, 베트남전 종전 40년을 맞아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습니다. 방한 중 이들의 일정은 이들이 살아온 인생만큼이나 순탄치 않았습니다. 이들의 방한 일정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 생존자인 응우옌티탄(뒷줄 왼쪽)씨와 응우옌떤런(뒷줄 오른쪽 모자 쓴 이)씨가 8일 낮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수요집회’에 참석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왼쪽) 할머니와 길원옥 할머니를 위로하며 함께 서 있다. 사진 한겨레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견지동 사단법인 평화박물관의 갤러리 ‘스페이스99’. 광복 70년, 베트남전 종전 40년을 맞아 개막한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사진전에 초대된 응우옌떤런(64)씨와 응우옌티탄(55)씨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사진전 개막을 축하하기 위한 리셉션이 전날 뜻하지 않게 취소된데다, 자신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헤집어 놓은 전쟁이 한국에선 ‘기념’할 일로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사진전을 연 이재갑 작가가 이들을 전시장 한쪽 조그만 방으로 안내했다. 한국 이곳저곳의 전쟁 기념탑이 찍힌 사진들이 영사기를 통해 어두운 천장에 투사되고 있었다. 베트남 곳곳에 한국군을 ‘증오’하는 60여개의 증오비가 세워져 있는 것과 달리, 한국 땅 도처엔 100여개의 참전 기념비가 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한국에선 베트남 참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이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과, 베트남이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의 차이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지난 7년 동안 전쟁 비석에 관한 작업을 해왔다는 이 작가는 전시장에 대한 설명을 마친 뒤 이들에게 “응원이 됐으면 한다”며 웃었다. 런씨와 탄씨는 주먹을 쥐어 흔들어 보이며 이 작가를 따라 잠시 환한 표정을 지었다. 런씨는 앞서 한국-베트남 시민모임에서 선물한 둥근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자를 받을 때 런씨가 “귀한 자리에서 쓰겠다”고 했던 모자다.

이 두 사람과 함께 방한한 베트남 호찌민시 전쟁증적(증거와 흔적)박물관의 후인응옥번(53) 관장은 “우리 박물관에도 아픈 사진들이 걸려 있다. 전쟁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 했으니 작가도 아팠을 것이다. 우린 한국 군인들도 전쟁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사과할 때 그들의 마음도 편해질 것”이라고 했다. 전날 인근 조계사 일대를 에워싸고 평화박물관의 사진전 개막을 막아선 ‘대한민국 고엽제 전우회’ 등 300여명의 참전군인들을 염두에 둔 말이다. 일제히 군복과 선글라스를 쓰고 나온 참전군인들은 서너시간 동안 군가를 틀고 고함을 내지르며 자신들이 양민 학살범으로 매도당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개막 행사는 취소됐고 런씨와 탄씨는 조계사 인근에서 비공개로 열린 기자간담회를 통해 “진실을 알리고 싶었을 뿐인데, 그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게 너무 가슴 아프다”며 울먹였다.

전시장을 둘러보던 중 평화박물관의 석미화 사무처장이 자신에게 온 문자메시지를 보여줬다. 다음날 대구 경북대학교에서 예정된 간담회 장소가 변경될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학교 쪽에서 평화박물관을 이적단체라고 했대요.” 박물관 관계자들 사이로 근심어린 표정들이 지나갔다.

위안부 할머니들과의 만남

전시장은 베트남과 한국에 세워진 전쟁 관련 비석들, 민간인 학살 상황을 증언하는 베트남 사람들의 모습으로 채워졌다. 사람들의 사진 앞엔 뿌연 비닐이 차양처럼 설치돼 있었다. 이 작가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은 사체를 처리할 때 주로 비닐을 썼다. 이들에게 비닐은 미군의 비상식량 ‘시레이션’과 함께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라고 했다. 뿌연 비닐 너머의 한 사진 속엔 주름이 자글자글한, 퀭한 눈의 한 베트남 할머니가 설움이 북받치는 듯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어린 손자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전하고 싶지만, 전하지 못하는 어떤 말을 곱씹는 듯했다.

“아가야 너는 이 말을 기억하거라. 한국 군인들이 우리를 폭탄 구덩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자라서도 이 말을 기억하거라.”

런씨와 탄씨가 사진전 뒤 참석한 ‘수요집회’의 한 손팻말에 적힌 글이다. 할머니가 전하고 싶지만, 전하지 못한 말이 아니었을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매주 수요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를 연다. 이날은 150여명의 참석자들이 모였다. 런씨와 탄씨는 사진전 관람을 마친 뒤 집회장으로 걸어가 김복동 할머니와 길원옥 할머니의 뒤편에 섰다. 사진기자들이 몰려들었고 둘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가 이내 결연해졌다. 누군가 편한 표정을 주문하자 그제야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윤미향 정대협 대표가 마이크를 잡고 “다시는 어떤 전쟁에서도, 성폭력 피해자나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탄씨는 “할머니들과 한국 친구들에게 인사드린다. 제 이름은 응우옌티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생존자다. 학살 때 8살이었다”고 말했다. 탄씨의 발언마다 집회 참석자들은 안타까움의 탄식을 뱉어냈다. 탄씨는 집회가 끝난 뒤 승합차에 오르는 할머니들을 부축했다.

런씨와 탄씨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만난 건 이날이 처음이 아니었다. 방한 첫날 숙소에 여장을 풀자마자 찾은 곳이 바로 할머니들이 모인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이었다. 방한 첫날인 4일 오후 늦게 나눔의 집에 도착한 이들을 평화박물관의 공동대표이기도 한 이옥선(88) 할머니를 비롯해 7명의 할머니들이 맞았다.

런씨는 1966년 2~3월 모두 1004명이 숨진 빈딘성 떠이빈사(옛 빈안사) 학살의 생존자다. 학살 당일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고 고아로 자랐다. 탄씨는 1968년 2월12일 주민 74명이 희생된 퐁니·퐁넛마을 학살에서 살아남았다. 그날 어머니와 남동생·언니·이모·조카 등 5명의 가족을 잃었다. 이들의 사연을 들은 유희남(87) 할머니는 “전쟁 피해자의 괴로움과 슬픔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같은 피해자로 만나니 정말 반갑다”고 했다. 가해자가 한국군과 일본군이란 것만 다를 뿐인 두 피해자들은 쉽게 공감했고 기꺼이 아픔을 나눴다.

첫 기자회견과 인터뷰, 위로

방한 사흘째인 6일 런씨와 탄씨는 한국의 국회를 찾았다.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잔인한 학살과 고통스런 비명으로 기억되는 학살의 소리는 생생하게 제 머릿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날의 기억을 다시 되돌리고 나면 보름은 잠도 못 자고 몸이 아픕니다. 하지만 그날을 기억하고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제 생의 마지막 소임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국회의사당 정론관에서 런씨와 탄씨는 그간 수백번도 더 반복해 이야기해온 학살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베트남으로 자신들을 찾아온 이가 아닌 다른 한국인들에게, 그것도 한국 땅의 공개된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고통스런 증언에 대한 반응은 바로 다음날 전해졌다.

7일 오후 조계사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사진전 개막 행사는 취소됐다. 이들은 대신 머물던 인근 호텔의 조그만 방에서 비공개 기자회견을 열었다. 침대를 걷어내고, 다른 방에서 의자를 빌려와 겨우 10여명의 취재진과 두 명의 베트남인, 한 명의 통역이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기자들의 질문이 시작되기도 전 런씨는 “나가서 저분들에게 얘기하고 싶다. 기자들에게 얘기하면 전달이 되는 것이냐”며 조급해했다. 창밖에선 고엽제 전우회가 부르는 애국가가 들려왔다.

그는 “참전 용사들을 만나면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려 한다. 내가 여기 이 자리에 서 있을 것이라고 생각 못했을 것이다. 한국 국민들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고, 그들에게 한국 군인들이 베트남에 있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솔직한 제 심정을 토로하고 싶다”고 했다.

창밖에서 다시 ‘와아’ 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런씨는 “그들을 용서하겠다”고도 했다. “여러분들이 잘못을 저지른 건 과거 구 제도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여러분들을 용서할 마음을 충분히 갖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고 잘못을 바꿀 의향을 갖고 있다면 저희들은 여러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엽제 전우회의 고함과 함성은 계속됐다. 런씨와 탄씨의 인터뷰는 그들이 겪은 학살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증언들로 이어졌다.

“총소리가 더 가깝게 들렸고, 주민들의 비명과 외침, 고함이 함께 들려왔습니다. 그러다 소리가 멀어졌는데 동생과 나를 양옆에 낀 어머니가 우리에게 수건을 둘러주고 있었어요. 엄마 수건의 따뜻한 느낌 때문에 배가 고픈 줄도, 목이 마른 줄도 몰랐습니다.”

런씨의 어머니는 학살이 일어난 날 하루 종일 런씨와 여동생을 껴안고 방공호 안에 숨어 있다 오후 늦게 한국군에 의해 발견됐다. 이후 다른 마을사람들과 함께 끌려가 총과 수류탄으로 난사당했다. 어머니는 하반신이 거의 없는 상태로 발견됐고, 여동생은 머리가 심하게 깨져 있었다. 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 런씨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지켜보던 탄씨가 팔을 잡아주자 겨우 증언을 이어갔다. 증언이 구체화할수록 볼이 떨리고 눈물이 맺혔다. 창밖에선 마이크를 잡은 이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통역을 맡은 베트남 사회적기업 아맙의 구수정(49) 본부장은 “런 아저씨는 지금껏 이 이야기를 수백번 해왔지만, 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말을 잇지 못한다”고 했다.

탄씨도 증언을 이어갔다. 그의 왼손엔 나눔의 집에서 받은 노란색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얼룩덜룩한 옷을 입은 한국군들이 아이들이 들어가 있던 방공호에 수류탄을 넣는 시늉을 하면서 나오라고 했습니다. 나오지 않으면 던지겠다는 것이었어요. 너무 무서워서 나갔더니 한 명씩 나가는 대로 총을 쐈습니다.”

탄씨의 오빠는 그 자리에서 한쪽 엉덩이가 날아가고 같이 있던 이모는 한국군의 대검에 찔려 죽었다. 언니와 남동생, 조카도 모두 총에 맞아 죽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탄씨의 울먹임은 흐느낌으로 변해갔다. 그는 “그때는 8살이었지만, 지금도 그날 일을 생생히,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친 이날 저녁 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이들을 초청했거나 베트남으로 가 이들과 만났던 한국인들이 한데 모이는 환영 파티였다. 여행 대안학교 로드스꼴라,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 모임, 베트남 평화의료연대, 보건의료노조, 정대협,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 등에 속한 100여명이 초대됐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이도 있었다.

이재갑 작가는 이 자리에서 “두 분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이런 자리에서 할 수 있게 돼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한국인들 중 이렇게 양심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했고, 런씨는 “한국에 온 것은 다만 공감과 평화를 나누기 위함이었다”고 답했다. 구수정 본부장은 “런 아저씨는 다리의 수류탄 파편을 제거했지만 항상 발이 저리고 쑤셨는데 한국에 온 뒤로 아프지 않다고 하셨다. 탄 아주머니는 이제 한국 사람들이 무섭지 않다고 하신다”고 소개했다. 모인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여행 대안학교 로드스꼴라의 한 여학생이 ‘엄마가 꽃이 된 날’이란 시를 낭독했다. 낭독이 끝나자 탄씨가 무대로 가 학생을 꼭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9일 오후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대구광역시지부 회원들이 대구 경북대학교 교내에서 집회를 여는 모습. 정춘광(73·왼쪽 둘째) 고엽제 전우회 대구지부장은 “어느 나라 전쟁이든 소수 양민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진 박기용 기자

고엽제 전우회원들의 “돌격 앞으로”

런씨와 탄씨 일행은 8일 수요집회가 끝난 뒤 부산으로 향했다. 이날 저녁 부산 중구 민주공원에서, 다음날엔 대구 경북대에서 강연을 하기로 돼 있었다. 고엽제 전우회가 가는 곳마다 이들을 맞았다. 8일엔 간담회장인 부산 민주공원 들머리에서 고엽제 전우회 부산지부 회원 170여명이 반대 집회를 열었고, 9일엔 대구 경북대학교 캠퍼스 안에서 고엽제 전우회 대구지부 회원 40~50명이 시위를 했다.

“(통역을 맡은) 구수정을 그냥 둬도 되겠냐. 죽이자.”

“이런 행사 그대로 허가해준 총장 사퇴하라.”

늦은 오후 캠퍼스엔 거친 말들이 여과 없이 쏟아졌다. 구경하고 선 경북대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학교 안에서 이런 거 허가해도 되나”, “총학생회는 뭐하는 거야”는 등의 말이 들려왔다. 정춘광(73) 고엽제 전우회 대구지부장은 “어느 나라 전쟁이든 소수 양민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우린 그때 양민 철수하라고 삐라 뿌리고 방송도 했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다 베트콩들이다”라고 했다. 한 기자가 물었다. “갓난아기도 죽었어요. 그건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전우회 회원들이 술렁였다. “사정도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애들이 베트콩이 있는 방공호에 들어가 있었어.” 전우회 회원 김태봉씨는 “그냥 올라가자. 우리 못 들어가게 일부러 기자들이 막고 있는 것 아니냐”며 행사장으로 향했다. 정 지부장이 “일단 기다리라”며 막아섰다. 기자들을 둘러싸고 전우회 회원들은 우왕좌왕했다. 이따금 “돌격 앞으로”, “자유 대한의 품으로” 따위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행사장인 강당엔 200여명의 청중이 모여 있었다. 출입구 4개 중 3개는 안에서 걸어 잠근 상태였다. 예정된 시간에서 15분쯤 지나 런씨와 탄씨 일행이 들어왔다. 사회자는 “밖에서 고엽제 전우회원들이 자기들도 집에 가야 한다며 명분을 달라고 하더니 기자들이라도 빼라고 했다. 그래서 말씀드린다. 기자들 나가세요. 난 얘기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청중이 웃었다. 참석자들의 소개가 끝난 뒤 런씨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베트남에서 온 응우옌떤런입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먼저 한 말씀 드리려 합니다. 오늘 제가 말하려는 것은 제 눈으로 보고, 제 귀로 듣고, 제 몸으로 겪은 사실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런씨와 탄씨가 한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강연장 밖 고엽제 전우회 회원들은 어느새 가버리고 없었다. 런씨와 탄씨의, 벌써 수백번도 반복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저는 제 심장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들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원한이나 증오감을 부추기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생존자입니다.” 런씨는 이날도, 어머니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