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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4월 09일 14시 03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4월 09일 14시 24분 KST

성완종, 쓰러진 '1000원의 신화'

한겨레

이 기사는 검찰 조사를 받던 성완종 전 회장이 어떤 인물인지, 성 전 회장의 인생을 기록한 기사로 사망 9일 전인 3월 31일 한겨레 21에 최초 게재된 것임을 알려 드립니다.<편집자주>

초등학교 4학년 겨울. 아버지가 새엄마를 들이던 그해, 어린 완종의 평온이 얼음장 갈라지듯 깨진다. 완종은 다음해 초등학교 중퇴의 길을 택한다. 후처에 밀려 서울로 식모살이를 하러 간 엄마를 찾아나선 완종의 주머니에 든 돈은 100원. 신문 배달, 약국 심부름을 하며 7년간 모은 돈으로 집을 마련해 고향 땅 충청으로 돌아온 날, 엄마와 동생 셋과 떠먹은 저녁을 완종은 ‘가장 맛있는 식사’로 기억한다. ‘1천원’을 밑천 삼아 화물차 영업을 시작한 그는 200만원을 들여 26살에 건설업(서산토건)에 뛰어든다. 1982년 대아건설, 2003년 경남기업을 인수하며 한때 2조원대 매출을 찍는다. 언론은 ‘입지전적 인물’이란 말로 그의 삶을 압축적으로 표현해왔다.

1988~92년, 관급 공사 51건을 따다

‘1천원의 신화’가 쓰러지고 있다. 검찰은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 비리 의혹의 첫 수사 대상으로 새누리당 의원을 지낸 성완종(64) 회장의 경남기업을 겨눴다. 검찰은 경남기업이 해외 석유개발 사업 등의 명목으로 정부로부터 빌린 330여억원 중 수십억원이 성 회장 가족의 계좌로 흘러갔는지 살피고 있다. 검찰은 경남기업이 하청업체에 줄 대금과 공사비용을 부풀려 비자금을 추가 조성한 정황을 잡고 조사하고 있다. 그가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인수위원회 자문위원 출신이어서 수사의 파장이 전임 정부 인사에게 튈지도 관심사다. 성 회장은 부실에 빠진 경남기업의 경영권 포기를 최근 선언했다.

정권을 넘나들며 권력에 줄을 댔던 ‘자수성가 회장님’의 쇠락이기도 하다. 맨손으로 중견 건설사를 일군 성공 뒤엔 돈과 정치권력의 결탁도 어른거린다. 권력의 비호 아래 사업 확장을 꾀하다 회사가 휘청이는 수순에 이르렀다는 진단도 있다.

그를 ‘이명박계 인사’로 부르기도 하지만, 그의 이력 전체를 아우른 말이 되지 못한다. ‘민주자유당(민자당)→신한국당→자유민주연합(자민련)→새누리당→자유선진당→새누리당’을 오간 그의 정당 이력 때문이다.

충남 서산 태생인 그는 충남을 정치적 기반 삼은 김종필 전 총리와 가깝다. 그는 김 전 총리의 호를 딴 ‘운정회’의 창립(2013년) 부회장이다. 김 전 총리가 지난 2월 부인상을 당했을 때 장례식장을 오래 지킨 인사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그의 권력 풍향계가 김 전 총리에게만 쏠린 건 아니다. 전임 정부 실세였던 이상득 전 의원(이명박 전 대통령 친형)의 측근은 “성완종씨는 (인맥 관리가) 마당발”이라고 표현했다. ‘현재 권력’과 가깝게 지내면서 ‘미래 권력 창출자’에 대한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성 회장은 건설 사업이 잘 풀리면서 정치 쪽과 긴밀한 교분을 맺었다. 그는 2007년 한 인터뷰에서 “(20대 후반 젊은 나이에) 사업이 커져 당시 충남 서산의 자가용 4대 중 1대를 내가 타고 다녔다. 나를 지역 유지로 알아주면서 지역 국회의원과 친해졌고 이들이 편의를 봐줘 충청에서 대표 건설업체로 커갔다”고 말했다. 1992년 9월 국정감사에서 김충조 민주당 의원은 성 회장이 당시 대표로 있던 대아건설이 1988~92년 충남의 관급 공사 51건을 몰아서 땄다는 자료를 냈다. 정·관계의 도움으로 입찰 정보를 건네받은 대아건설이 입찰 예정가의 근사치를 써내 경쟁 업체들을 입찰에서 따돌린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16대 총선, 국회의원 욕망을 드러내다

그가 언론에 크게 거론된 것은 14대 총선이 있던 1992년이다. 그해 8월 한준수 연기군수는 ‘3·24 총선’에서 여당(민자당) 후보를 연기 지역 의원으로 당선시키려고 “정부, 여당, 안기부(현 국정원), 충남도지사, 지방 공무원이 동원돼 금품을 살포하는 등 관권 부정선거가 있었다”고 폭로했다. 그는 윗선의 지시를 받은 공문서와 충남도지사가 불법 선거지원금으로 내려보냈다는 자기앞수표를 증거물로 제시했다. 여당 대선 후보였던 김영삼 민자당 총재가 내각 개편을 통한 정국 전환을 노태우 정부에 주문할 만큼 큰 사건이었다.

성완종의 이름은 한 군수가 충남도지사로부터 받았다는 10만원권 수표 다발에서 등장한다. 문제의 수표가 그해 2월29일 대아건설 계좌에서 인출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당시 “10만원 수표 15억여원을 인출한 건 맞지만, 일부 수표가 (충남도지사를 거쳐) 한 군수에게 전달된 과정에 대해선 모른다”고 말한 성 대표는 처벌을 면한다. 그때 그는 민자당 재정위원이었다.

성 회장은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바뀐 뒤에도 재정위원 직함을 놓지 않았다. 기업 대표가 대거 포함된 재정위원은 정당에 정치자금을 대는 ‘꿀단지’로 불렸다. 1997년 당시 정동영 국민회의 대변인은 “합법을 가장한 정경 유착의 실상이 드러났다”며 성 회장을 포함한 신한국당 재정위원단의 해체를 요구하는 성명을 냈다.

그래도 흔들림 없었던 성 회장은 2000년 16대 총선부터 직접 국회의원이 되기 위한 욕망을 드러낸다. 충청권 전·현직 의원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짐작했다. “더 큰 꿈을 위해 정치권력도 쥐고 싶은 ‘성공 기업인’ 특유의 욕구였을 것이다.” “정치 인맥을 두텁게 쌓으면 금융·검찰 수사 관련 정보에 접근할 수 있고, 사업을 지키고 확대하는 데 정치권력을 방패막이로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충남 지역 계룡건설 회장이던 이인구씨가 13·15대 국회의원을 지낸 것을 본 뒤 충남 대표 기업가라고 자부하던 성 회장의 정치적 열망이 더 커졌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진작부터 성 회장의 지역 기반은 탄탄했다. 1991년부터 서산장학재단을 운영하며 2만 명이 넘는 학생을 도운 그에 대한 지역의 신망은 높은 편이었다. 그가 2000년부터 회장을 맡은 충청포럼은 인맥을 다지는 또 하나의 통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정운찬 전 총리도 충청 출신 정·관·언론계 인사로 구성된 충청포럼의 일원이다. 반기문 총장의 동생은 6년째 경남기업 고문을 맡고 있다. 결국 성 회장은 2000년 총선에선 당을 바꿔 김종필 총재의 자민련에 공천(서산·태안 지역구)을 신청했다. 충청 출신인 그가 한나라당 대신 충청을 기반으로 하는 자민련의 공천을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공천 과정에서 고배를 마셨고, 국회의원의 꿈은 미뤄졌다.

정당을 옮겨다닌 이력은 여야를 넘나드는 그의 사람 관리와도 맥이 닿는다. 2000년 총선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당선됐던 한 전직 의원은 “당시 의회로 진출해 깜짝 놀란 것은 김대중 정부의 청와대 일부 인사들과 민주당 의원들도 사석에서 성완종씨를 거론할 만큼 그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성완종씨의 인맥 관리가 정당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이었다는 걸 그때 느꼈다”고 떠올렸다.

김종필 입김? 후보 바꿔치기 뒤 당선

보수 정치 세력과 가까운 그이지만 노무현 대통령 시절 두 차례 특별사면 혜택도 받았다. 그는 2004년 17대 총선에서 자민련 비례대표 2번을 받았지만 정당 득표율이 저조해 낙선했다. 낙선 직후 그는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자민련에 16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줬다는 혐의로 구속 기소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정치와 결탁한 그의 ‘돈’이 처음으로 법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2005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인 강금원씨 등과 함께 특별사면 명단에 올랐다. 당시 참여연대는 “(기업인 사면은) 특혜”라며 비판했다. 이후 2007년엔 ‘행담도 개발 비리 사건’에 연루돼 징역 6개월과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지만, 한 달 뒤 다시 특별사면 대상자가 된다.

구속과 사면 이후에도 그는 활동을 이어갔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해외 순방에 동행하며 새 정권 인사들과 가깝게 지낸 그는 2012년 총선에선 새누리당 공천(서산·태안 지역구)을 두드렸다 고배를 마신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관계자는 “여야를 가리지 않는 그의 인맥 관리 때문인지 당시 성완종씨를 차라리 우리 당의 서산·태안 지역구 후보로 영입하자는 이도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무소속 출마를 강행한 그는 후보 등록 하루 전날 자유선진당 후보로 탈바꿈한다. 당시 이 지역 자유선진당 후보는 변웅전 전 의원이었지만, 당은 돌연 성 회장을 지역구 후보로 ‘바꿔치는’ 결정을 내렸고, 변 전 의원은 비례대표 후보 4번으로 돌렸다. 정당 지지율로 보아 변 전 의원의 국회 입성은 불가능했다.

이를 두고 정가에선 성 회장의 정치자금을 받았던 김종필 전 총리와 심대평 자유선진당 대표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말이 무성했다. 변웅전 전 의원은 당시 속사정에 대한 말을 아낀 채 “성완종씨는 훌륭한 사업가로 남았어야 했다”고만 말했다. 성 회장은 자유선진당 후보로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합당 과정을 통해 새누리당 소속으로 돌아온다.

정당과 정권을 오가며 손을 뻗은 성 회장의 수완 덕분인지 경남기업은 ‘사업 확장-경영 부실-워크아웃(기업구조 개선 작업)을 통한 채권단의 자금 지원’을 반복했고, 번번이 살아남았다. 특히 2009년 1월부터 2011년 5월까지 진행된 워크아웃을 졸업한 지 2년5개월 만인 2013년 10월 또다시 워크아웃을 요청했을 때, 주채권은행인 신한은행으로부터 다시 승인을 받았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 다른 부실 건설사의 대표들이 지위를 박탈당한 채 법정관리를 받은 것에 비춰, 성 회장은 대주주 자격을 유지하며 채권단의 추가 지원을 얻어냈다. 성 회장이 인수하기 전인 1999년 경남기업이 한 차례 워크아웃에 들어갔던 것을 더하면 한 기업에 세 차례나 채권단이 지원을 약속하며 회생의 기회를 준 것이다.

세 번째 기회 때 금감원 담당 위원회 소속

감사원은 최근 감사에서 금융감독원이 경남기업의 세 번째 워크아웃을 승인하도록 신한은행에 부당 압력을 행사한 정황을 잡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세 번째 워크아웃 승인 당시 성 회장은 금융감독원 등을 담당하는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의원이었다. 부실 기업의 회장이 자신의 기업 회생과 밀접한 국회 상임위에 배치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기업이 법정관리가 아닌 워크아웃 대상자로서 채권단 지원을 받도록 힘을 쓴 것 아니냐는 의혹도 커진다.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채권단의 자금 지원을 끌어내는 성 회장의 위기 탈출 해법이 회사의 체질 개선을 지체시켰다는 지적도 있다. 충청 지역에서 정치를 오래 해온 한 야권 인사는 “돈과 정치가 결합된 정경 유착의 오래된 폐해에 기댔던 자수성가 기업인의 쓸쓸한 말로”라고 촌평했다. 경남기업을 쓰러질 위기로 몰고 간 그는 지난해 6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마저 잃었다. 두 손에 움켜쥐려 했던 ‘기업과 정치’를 모두 놓아야 하는 궁박한 처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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