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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4월 04일 07시 02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6월 01일 14시 01분 KST

'아침 이슬'의 그 사람, 김민기를 만나다(인터뷰)

한겨레

1970~80년대 청년 문화의 원형을 만든 인물이자 노래와 연극, 문학을 아우르며 한국 문화의 새 지평을 연 르네상스적 인간. 나이 만 스물에 지은 ‘아침이슬’이 평생 꼬리표가 된 사내. 김민기 극단 학전 대표를 수식하는 말은 그가 지나온 험한 세월만큼이나 많다. 1991년 개관한 소극장 학전은 황정민, 조승우, 설경구, 방은진 같은 이를 배출한 한국 문화계의 산실이자 가수 김광석이 숨지기 전 1000회 공연을 한 곳이다. 김 대표가 직접 연출한 <지하철1호선>은 2008년 종연 때까지 15년간 71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으며 4000회나 공연된 국내 최장수 뮤지컬이 됐다. 지난 10여년간 고집스레 청소년극과 아동극에 공을 들이고 있는 김 대표는 공연 홍보 등을 제외하곤 속내를 털어놓는 긴 인터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한겨레> 토요판 인터뷰 코너 ‘이진순의 열림’의 초대에 응한 그는 네 차례에 걸쳐 무려 15시간 동안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가 인터뷰 내내 가장 강조한 말은 ‘돈 안 되는 일’이었다. 사진은 지난달 24일 첫 인터뷰 때의 모습이며, 다음주에는 제2회가 실린다.

“문 닫을 때까지 그 짓을 하는 거다, 돈 안 되는 일!”

후줄근한 점퍼 차림에, 고개를 푹 수그린 사내가 벌서러 교무실 끌려오는 소년처럼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하고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손에는 막걸리 세 통이 든 비닐봉지가 덜렁덜렁 들려 있었다.

“내가 맨정신으론 도저히 얘길 못할 것 같아서….”

겸연쩍은 표정을 하고 그가 씩 웃었다. 공연물의 홍보를 위해 기자들을 만난 적은 있지만 자신의 “옛날 얘기”를 듣겠다고 청해 오는 인터뷰는 번번이 사양을 해왔는데, 어쩌다 술김에 하겠다고 했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며 그가 막걸리 한 잔을 따랐다. 20년 넘게 극단 학전을 이끌어온 대표이자, 15년 롱런의 경이적 기록을 세운 <지하철1호선>의 연출가. 그러나 그는 상업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대중적으로 나서는 일을 여전히 병적으로 혐오하는 듯했다.

1970년대 청년문화의 원형질을 제공한 국내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콘서트 한번 안 했는데 한국사의 주요 변곡점마다 그의 노래가 불린 사람, 공장 노동자로 농사꾼으로 막장 탄부로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그 스스로 ‘아침이슬’과 ‘상록수’가 되었던 사람, 미술에서 시작해서 노래와 연극과 문학을 아우르며 한국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사람. 김민기(64), 그는 동시대 그 누구보다도 밀도 높은 삶을 살아왔다.

‘아침이슬’이 담긴 데뷔앨범을 낸 게 그의 나이 만 스무 살 때이니, 이제 환갑을 훌쩍 넘긴 그가 지나온 삶의 아픔과 갈등, 회한과 소망을 담담히 들려줄 때도 되지 않았을까. 그 험한 시대를 가장 뜨겁게 겪어냈으면서도, 가시 돋친 공격성이라곤 없이 유순하고 담담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은 뭔지, 어떻게 이 남자는 괴물과 싸우면서도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얘기를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까. 나도 그가 건네는 막걸리 한 잔을 받았다.

지난달 24일 오후 첫번째 인터뷰 장소인 서울 대학로 학전 소극장 인근 한 카페에서 만난 김민기는 “맨정신으론 도저히 얘길 못하겠다”며 연신 막걸리를 들이켰다. 불콰한 얼굴의 그는 특유의 낮고 굵은 저음으로 느리게 말을 이어나갔다.

음반 팔아 마련한 배우들의 못자리, 학전

그가 가장 덜 부담스러워할 질문, 학전에서 최근 준비 중인 인문학 강좌에 대한 얘기부터 꺼냈다.

-그리스신화에 대한 강좌가 곧 시작될 거라던데.

“학전 문예 강좌를 시작한 게 94년인데, 유홍준, 이태호, 윤용이 교수 같은 분들 모시고 한국학 관련된 걸 주로 하다가 이번에 11번째로 잡은 주제가 그리스신화다. 서양에서 인문학의 원조라면 그리스신화인데, 유재원 교수(한국외대 그리스학)가 내가 알기론 이 분야에서 어마어마한 보물이다. 3년 동안 총 30강 계획으로 학문적인 총정리를 해보려 한다.”

-인문학 강좌를 그렇게 오래 해왔는데 정작 당신은 왜 강의를 한번도 안 했나?

“난 ‘쟁이’지, 평론가나 정치가가 아니거든. 내가 추상화를 걸었는데 누가 와서 이게 뭘 의미하냐고 물으면 난 할 말이 없어. 작품을 말로 설명하는 사람이 있고, 나처럼 (그리는 시늉 하며) 직접 만드는 팔자가 있는 거니깐. 그걸 설명할 재주가 있었다면 그림을 안 그리지.”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제야 그와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내친김에 나도 조심스럽게 그에게 당부하고 싶은 얘기를 꺼냈다.

-그간 하신 인터뷰를 찾아 읽어봤는데 좀 아쉬운 점이 느껴졌다. 김민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형화된 선입관을 깨겠다는 마음에서 그랬을 테지만, 어떤 대답은 너무 무성의하고 위악적이다. 예를 들어, 옛날에 공장 가고 탄광 간 것 물어볼 때마다 ‘아무 뜻 없고, 그냥 먹고살려고 간 거다’라고 답한다든지, 정치적인 질문에 대해서 ‘난 그런 데 신경 쓸 여유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말한다든지. 정말 그게 다인가? 대한민국 평균 시민도 그렇게 말하진 않을 거다.

“그렇다. 쭉 그렇게 답해왔다. 그동안은 내가 하는 작품에 대해서 얘기하자고 만났는데 사람들이 그건 들을 생각 안 하고 다른 얘기, ‘너 어떤 사람이야?’ 자꾸 이런 걸 물으니까… 난 그저 ‘몰라. 그거 얘기할 준비도 안 돼 있어’라고 말하려던 건데. 나중에 그게 인용이 되면 또 다르게 비치기도 하고… 나도 이번엔 에잇, ‘발가벗으라면 벗자’ 하는 심정으로 나왔다.”

-감사드린다.(웃음) 젊은 시절의 김민기를 우상화하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지나치게 자신을 폄하하지도 마시고, 균형 잡힌 회고를 해주셨으면 한다. 오늘은 ‘그간 무엇을 하셨는가?’보다는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여쭙겠다.

“완전 보안사 취조실이네. ‘너 왜 그랬어?’ 하는….(웃음)”

-학전 얘기부터. 학전은 어떻게 오픈하게 된 건가? 돈도 별로 없으셨을 것 같은데.

“연우무대라는 극단이 있었다. 내 친구, 선후배들이 하는 극단이어서 내가 도울 게 있으면 돕고 그랬는데, 내 지인이던 지금의 건물주가 ‘연우무대가 온다면 소극장을 지어주겠다’ 한 거야. 난 연극인도 아니고 중간다리였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떠맡게 됐지. 근데 돈이 있나? 그래서 대형 음반사를 찾아갔다. 선불금을 5천만원 해줄 수 있냐고 하니까 당장 해주겠다고 그러데. 그래서 할 수 없이 떨이로 음반 넉 장을 낸 거지. 노래할 생각이 조금치도 없었는데.”

그때 나온 음반이 <김민기 전집>(1993)이다. 71년 그의 첫 음반이 압수된 이후 처음으로 정식 녹음한 음반이었다. 그 돈으로 91년 학전이 개관했다.

-학전은 유명 배우들을 배출해낸 연기사관학교로 불린다. 황정민, 조승우, 김윤석, 설경구, 방은진 같은 이들이 모두 학전 출신이니.

“학전(學田)이 한자로 배울 학에 밭 전 자다. 학전 처음 열 때 내가 한 말이 있다. 여기는 조그만 곳이기 때문에 논바닥 농사가 아니다, 못자리 농사다. 못자리 농사는 애들을 촘촘하게 키우지만 추수는 큰 바닥으로 가서 거두게 될 거라고.”

-그 말대로 되었다. 학전에서 자란 연기자들이 한국 문화계 주역이 되었으니.

“뭐 더러 잘되는 놈도 있지만 아직도 잘 풀리지 못해 자괴감에 빠져 있는 놈들이 90퍼센트가 넘으니 걔네들이 더 밟히지.”

-배우를 캐스팅할 때 뭘 제일 중요하게 보시나?

“학전 오픈할 때, 내가 연극이나 뮤지컬에 대해서 미리 배워놓은 게 없으니까 뭘 가르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내가 백지(白紙)니까 배우를 캐스팅할 때도 백지인 애들을 뽑은 것 같다. 이미 어디서 뭘 배워 온 사람들, 나쁘게 말하면 ‘쿠세’(굳어진 습관)랄까, ‘쪼’가 있는 사람들은 내가 컨트롤할 능력도 없고. 나처럼 백지 입장에서 같이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았다.”

2011년 학전 20주년. 1991년 3월 서울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을 개관하면서 설립된 극단 학전이 20주년을 맞이했다. 이날 함께해준 이들만으로도 200석 극장을 꽉 채우고도 넘쳤다.

김광석과 유재하를 먼저 보내고…

-학전 입구에 김광석 노래비가 있던데, 김광석에 대한 남다른 애틋함이 있는가 보다.

“학전에서 광석이가 1000회 공연을 했는데, 처음 만난 게 84년도던가? 광석이가 가수를 하고 싶다고 찾아왔는데 노래를 들어보니까 너무 못하는 거다. 그래서 ‘너 가수 하지 마라’ 그랬는데….”

-김광석이 노래를 못한다고?

“비틀스가 그렇게 유명하지만 비틀스도 노래는 잘 못하지. 테크니컬한 측면에서는.”

-(갸우뚱) 일단, 그렇다 치고….

“학전 오픈하고 몇 개월 만에 빚이 한없이 늘었다. 100퍼센트 대관이 된다고 해도 계속 적자…. 마침 그때가 대중문화의 판도가 바뀌는 시점이었다. 그해에 서태지가 나왔으니까. 통기타고 뭐고, 아날로그 음악 하던 놈들이 하루아침에 된서리를 맞았지. 어디 갈 데가 없는 거야. 어차피 극장 빚은 쌓여가고 그건 내가 지고 가는 거니까, ‘니들 와서 노래하고 싶음 해라!’ 그랬지. 그래서 광석이가 온 거다.”

김광석 콘서트가 예상 밖의 큰 호응을 거두면서 땡볕 아래 대로변까지 관객들이 줄을 섰다. 김광석은 “나는 벽에 붙어서 노래해도 좋으니” 최대한 많이 들이자고 고집해서 복도 문짝까지 떼어내고 관객을 받을 정도였다.

-노래를 못하는 애라고 하셨는데.(웃음)

“그래도 광석이의 미덕이 하나 있다. 젊은애들이 딴따라를 하게 되면 대개 싱어송라이터를 하고 싶어 한다.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 이거지. 근데 싱어송라이터들은 자기 곡만 줄기차게 부르려고 해. 광석이는 지가 만든 곡이 여럿 있지만 다른 좋은 노래를 계속 찾아다니면서 부른 거야. 그러기 쉽지 않은데 큰 미덕이지.”

‘이등병의 편지’(원곡 전인권)와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원곡 김목경)도 그렇게 리메이크된 곡들이다. 그러던 김광석이 96년 갑자기 세상을 떴다.

-그런 인연으로 김광석 추모사업회장을 맡으셨나?

“내 팔자에 어쩌다가 먼저 죽은 후배들 뒤치다꺼리를 하게 되었는지… 유재하도 비슷한 케이슨데, 걔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재하가 죽기 일주일 전 날 찾아왔어. 내가 그때 그 녀석한테 준 선물이 있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나온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박봉술 선생의 흥보가였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박봉술 선생의 창법은 당시까지는 ‘썩은 목’이라고 불리던 건데, ‘한국말을 어떻게 하면 이렇게 텁텁하게 할 수 있는지’ 공부하라고 준 거지. 재하 창법이 판소리에서 말하는 ‘노랑목’이어서. 근데 아마 그 녀석, 안 들었을 거야.(피식 웃음) 재하 사십구재 공연도 내가 연출해서 했고, 작년부터 재하네 그룹이 학전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어. 어쩌다 보니 광석이, 재하 요 두 라인이 학전 팔자에 이상하게 끼어 들어와 있네.”

-김광석이나 유재하는 시장에서 말하는 소위 ‘블루칩’ 같은 존잰데, 그걸로 돈을 만들어서 ‘뭔가 더 의미있는 작품을 만드는 데 쓰겠다’ 이런 식으로 가는 게 경영자 마인드 아닌가?

“그렇게 나온 대형 뮤지컬도 몇 편 있다. <그날들>이라든가 <디셈버>…. 근데 난 그걸 못하겠다.”

-왜?

“인터뷰 못하는 거랑 똑같다. 그냥 체질에 안 맞는 것.”

-돈이 싫은가?

“아우, 돈이 얼마나 필요한데. 학전에 지금 빚이 몇 억인지. 요새 계산도 안 돼.”

-<김광석 다시 부르기> 콘서트도 관객이 몰리니까 학전에서 하던 걸 바깥의 대형극장으로 내보내고. 오는 돈도 마다하시는 판국이다.

“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지, 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야.”

-정 그러면 대본이나 연출 이외의 업무들, 기획이나 제작 같은 비즈니스는 누구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하는 순간 그게 고용이 되거든. 그러면 그쪽에서도 돈의 논리 때문에 나한테 (상업성 있는) 작품 내용을 요구하게 된다고. 근데 나는 그 돈 벌겠다고 내용을 그렇게 바꾸고 싶지가 않은 거지.”

1991년 <겨레의 노래> 총감독. 한겨레신문사가 한민족의 노래를 발굴해 보급하자는 취지로 제작한 음반 <겨레의 노래> 총감독을 맡아 엔딩곡으로 ‘아침이슬’을 불렀다. 그해를 넘긴 뒤, 과로로 폐결핵에걸렸다.

‘쟁이’가 뭐냐고? 병이지, 결벽증 같은…

91년 이래 적자 누적으로 폐관 위기에 놓였던 학전에 극적 회생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94년 초연된 뮤지컬 <지하철1호선>이었다. 독일 그립스극단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지만, 김민기의 거듭된 수정 번안을 통해 완전히 한국의 뮤지컬로 재창조된 작품이다. <지하철1호선>은 당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전부이던 한국 공연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원작자인 폴커 루트비히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깊이로 재해석된 작품”이라고 칭송했다. 소극장 뮤지컬에서 라이브 연주를 도입한 것도, 원작자에게 저작권료를 제대로 지급하고 무대에 올린 것도, 출연진과의 ‘서면계약’이나 ‘러닝개런티’ 제도를 도입한 것도, 학전이 처음이었다. 전국순회공연과 해외공연까지 성황리에 마친 <지하철1호선>은 그러나 2008년 4천회 공연을 끝으로 돌연 중단을 선언했다.

-15년간 관객 71만명을 끌어들인 작품인데 왜 공연을 중단했나?

“그게 아마 매표수입이 100억원을 넘겼을 건데.”

-저런! 계속했으면 ‘창조경제’의 모범이 되었겠다.(웃음)

“중단한 이유? 돈만 벌다 보면 돈 안 되는 일을 못할 거 같아서.”

망치로 머리를 맞은 느낌이 이런 걸까. 더 뭐를 물어봐야 할지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면… 어, 저, 관객수가 줄어서 그런 게 아니고….

“아니고, 그냥 ‘끊은’ 거다. 장기공연으로 가다 보니까 배우들의 체력이나 감성을 고려해서 1년에 2팀이 돌아가며 했는데, 그러다 보니 사람이 완전히 부속품이 되더라고. 나 이러자고 세상 사는 거 아닌데, 내 나이도 낼모레 환갑이고 이 짓 하다가 죽을 거냐 싶더라. 그래서 딱 끊었다.”

-‘끊었다’고 표현하신다!

“어차피 난 돈 되는 거 할 줄 모르는 놈이니까, 내가 해야 할 일, 내 나이에 맞는 걸 해야지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직원들이 지금 고생하고 있지만. (옆에 있는 직원을 보며) 대번에 고개 끄덕거리는 것 좀 봐.(웃음)”

돈 되는 <지하철1호선> 대신, 자신이 할 일이라고 여기며 김민기가 10여년째 공을 들이는 건 청소년, 아동극이다. ‘학전 청소년무대’ 시리즈로 <굿모닝 학교><복서와 소년>을, ‘학전 어린이무대’ 시리즈로 <우리는 친구다><고추장 떡볶이><슈퍼맨처럼><무적의 삼총사> 등을 잇따라 선보였다. 어린이물은 방학 중에만 올리고 평상시엔 성인물을 올리는 게 연극계의 상례인데, 학기 중에도 어린이, 청소년극에 전력투구하고 있으니 공연을 할수록 적자만 느는 게 당연하다. 작년부터 어린이정가를 1만8000원에서 1만2000원으로 바꾸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소득수준이 낮은 가정의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자는 김민기의 고집을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언제부턴가?

“아주… 오래전부터. 71, 72년에 양희은이랑 판 낼 때도 애들 노래는 꼭 들어갔다. 그냥 왠지 애들에 대해서 늘 관심이 가더라고. 동학에서 최시형이 ‘애 때리지 말라’고 한 것도 자꾸 마음에 맴돌고. 쟁이라는 게 ‘어떻게 계산하면 돈이 될지’는 따지지 않으면서, 자기가 딱 꽂히면 거기서 피할 수가 없다. 그게 쟁이의 속성이다.”

-‘쟁이’의 정의가 뭔가?

“어이쿠, 뭐 그런 어려운 질문을… 병이지, 뭐 결벽증 같은.”

-그래도 계속 적자를 보면서 할 수는 없지 않나?

“(언성 높이며) 내 목표는 더 이상 빚낼 수 없어서 문 닫을 때까지 그 짓을 하는 거다. 돈 안 되는 일만 골라서 하는 거지. 이건 피할 수 없는 내 팔자야. 그래도 이런 것 정도는 우리한테 있어야 된다고! 논리를 떠나서! 낫살 먹은 놈이 해야 될 일을 하는 것뿐이지.”

따박따박 돈 얘기만 물고 늘어지는 데 그는 부아가 난 모양이었다. 최소 경상지출만 한달에 4천~5천만원인데 그는 어떻게든 빚을 내서 직원들 월급을 밀린 적은 없다고 했다. 아이엠에프(IMF) 때 딱 한번 빼고는. 작곡·작사가로서 그간 만든 노래의 저작권료가 재정적 도움이 되나 궁금해 물으니 “월 백만원대”란다. 100여곡에 달하는 노래를 만든 사람의 저작권료로는 믿어지지 않는 액수다. 그래서 이번에 저작권 신탁관리를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서 새로 생긴 ‘함께하는 음악저작인협회’로 옮긴다고 했지만, 돈의 액수 때문이라기보다는 투명성에 대한 불신 때문인 듯했다.

1955년 어머니와 함께. 고향인 전북 이리(현 익산시)에서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문둥이 아이를 받아내던 산파 어머니

김민기는 1951년 전쟁통에 전북 이리(현 익산)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인민군에 학살당해 돌아가시고 과부가 된 어머니가 유복자인 민기를 낳았다. 원산이 고향인 어머니는 숙명여고를 나오고 연희전문 1기로 입학한 인텔리 여성이었다. 연희전문 시절, 조선학생에 대한 차별에 항의하며 들고일어났다가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산원(산파) 자격증을 따서 돌아와, 아이 받는 일을 하며 10남매를 키웠다.

-출생부터 파란만장하시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게 기적이지. 어머니는 늘 바쁘시고 형제들은 학교 가고 혼자 놀면서 컸는데, 어려서 제일 무서운 게 뭐였는지 알아? 아이고, 근데 내가 취했다. 자꾸 반말을….”

-편하게 말씀하셔도 된다.(웃음) 제일 무서운 게…?

“제일 무서운 게 문둥이하고 팔다리 잘린 상이군인들이었다. 근데 방학이면 서울에 있는 형, 누나들이 온다고 해서 역에 마중 나가는데, 역에서 그 무시무시한 문둥이들이 우릴 보고 막 다가오는 거야. 굉장히 무서웠다. 근데 그놈들이 어머니한테 인사를 굽실하고… 알고 보니 어머니가 일정 때부터 받아준 놈들이야. 어머니가 그 사람들한테 돈을 받았겠어? 내 말은 세상에 돈 되는 일만 다가 아니다 이거지. 그 전쟁통에 그 아이들 안 받으면 어떻게 할 거야? 돈이 안 돼도 사람이 해야 되는 일은 해야 된다. 내가 아동극을 하려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서울 재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을 거쳐 66년 경기고에 입학한다. 경기중·고 시절 미술반 활동은 그의 “청소년기의 모든 것”이었다. “난 경기중·고를 다닌 게 아니라 경기중·고 미술반을 다녔다”고 말할 만큼.

-그림 그리는 게 그렇게 좋았나?

“경기고 미술반이 프라이드가 무지하게 셌는데, 그때 우리 모토가 ‘정물화는 안 그린다’였다. 미술실에서 앉아서 그리면 안 된다!”

-그럼 뭘 그리나?

“무조건 화판 들고 나가는 거지. 중학교 1학년 때 미술반 선배가 ‘어디서 사과나 꽃병을 그리고 자빠졌어? 나가!’ 해가지고 남대문 시장 좌판에 가서 그리던 기억이 난다. 그거 때문인지, 내가 만든 노래들은 내가 살면서 어딘가 (현장에) 따라가서 이렇게 그린 거야. (그리는 시늉) 단지 붓이 아니고….”

-음악으로 그렸다?

“노래로 그린 거지. <지하철1호선>도 사실은 풍속화야.”

김민기는 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했지만 그에게 정형화된 미대 수업은 따분할 뿐이었다. 1학년 1학기에 낙제를 한 그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아르바이트 삼아 듀엣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듀엣의 이름은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 재동국민학교 1년 후배인 양희은을 만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이전의 인터뷰 보니, ‘아침이슬’이나 ‘상록수’ 얘기만 나오면 굉장히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이시던데 왜 그러나?

“그 노래들이 내 몸에서 나간 거긴 한데, 나간 것의 백배가 되어서 돌아오면 내 몸이 버거울 수밖에….”

-87년 시청앞 광장에서 이한열 노제가 벌어질 때 어디 계셨나?

“나, 거기 있었다.”

-어떠셨나?

“앗, 뜨! 뭐 그런 느낌… 백만명이 부르는데, 그 백만명이 다 각자의 마음으로 간절하게 부르는데 내가 그걸 뭐라고 감히 말하겠나? 그때 생각했다. 아, 이건 이제 내 노래가 아니구나.”

71년 발표된 ‘아침이슬’은 그의 험난한 인생의 출발점이었지만, 처음엔 누구도 그 노래의 장대한 후폭풍을 예감하지 못했다. 김민기 1집에 실린 곡 중 제일 먼저 방송금지된 것은 ‘꽃 피우는 아이’. “무궁화꽃을 피우는 아이, 이른 아침 꽃밭에 물도 주었네. 날이 갈수록 꽃은 시들어 꽃밭에 울먹인 아이 있었네”로 시작하는 가사가 화근이었다. 72년 서울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김민기가 이 노래를 부른 것 때문에 그의 레코드는 전량 압수되고 그는 동대문서로 연행되었다. 그는 불온한 사상범이 되고, 수시로 체포, 고문, 취조받는 일상이 이어졌다. ‘아침이슬’은 그 와중에도 은밀한 바람처럼, 소리 없는 잉걸불처럼 퍼져나갔다. 결국 75년엔 구체적 사유도 명시되지 않은 채 금지곡이 되었다.

나를 죽이던 사람들, 나 때문에 죄를 짓는구나

-몇 번이나 잡혀갔나?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그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던가?

“서소문에 범진사라고 있었어. 보안사 취조실. 들어가니까 하사관들이 딱 들고 오는 게 사각형 각목이었는데 걔네는 베테랑들이지. (패는 시늉) 다다다닥… 그때 아, 내가 죽는구나. 그런 느낌을 처음 받았어. 한참 맞다 보니까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패는 놈들 모습이 슬로비디오로 보이는 거야. 나 죽는 거, 아픈 거는 감각이 멀어지고. 근데 걔네들한테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구.”

-미안했다고?

“한없이 미안해지는 게, ‘나 때문에 이들이 죄를 짓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어.”

-그게, 몇 살 때인가?

“스물서너살? 그러고 풀려났는데 그때 한참 해방신학이 뜰 때였지. 누가 그러데.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는 총으로 쏴서 죽여야 된다’고 했다고. 근데 나는, 죽어가면서 나를 고문한 놈들한테 미안하고 죄송했다고 했다. 그래서 본회퍼 식의 해방신학은 아닌 것 같다 그랬지. 나중에 운동권 애들한테도 그랬어. ‘너무 미워하지 마라. 미워하게 되면 걔 닮아간다.’ 나중에 보니까 박정희 무지하게 미워하던 놈들이 박정희 비슷하게 되더라고. 내 참, 별 얘기까지 다 하네.(웃음)”

그거였을까? 괴물과 싸우면서도 괴물을 닮지 않고, 유순한 소년의 마음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문득 가슴에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올라 얼른 막걸리 잔을 비웠다.

-71년 얘기로 돌아가자. 김지하를 그 무렵 처음 만났다고 하던데, 당시로선 하늘 같은 선배였겠다.

“아니, 그러진 않았고… 미대 선배가 소개를 해줬는데, 혜화동 명륜다방에서 처음 만났지. 그때가 지하 형이 <오적>을 쓰고 도피할 때였는데 만나는 순간 느낌이 별로였다.”

-왜?

“수배 중이었는데 굉장히 럭셔리한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었거든.(웃음) 그 이후로 일을 참 많이 같이 했지. 친동생 이상이었어.”

그는 “지하 형”과의 관계를 과거형으로 말했다. 오랜 기간 김지하와 나눈 인간적 우애에도 불구하고, 지난 대선기간에 김지하가 보인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일’ 이후로 다시 만나지도,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고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셨으니 그분이 왜 그랬는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지 않나?

“예전에도 문화운동 쪽에서는 김지하 옆에 내 이름이 늘 따라붙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꼭 하는 말이 있었다. 내가 김지하한테 무한한 고마움을 가지는 건, 내게 우리말의 생동성을 처음 깨우쳐준 선배라는 점. 문자에 갇혀 있지 않고 살아 있는 말의 생동성. 그게 판소리하고도 통하는 건데… 그래서 내가 학전 배우들한테도 유난히 강조했던 게, 배우는 ‘모국어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점이었다. 그 점에 있어선 여전히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난 그 양반의 사상적인, 정치적인 입장에는 전혀… 그건 나와 무관한 일이고 영향을 준 바도 없어. 최근 몇 년 동안 그 양반이 취한 행동에 대해서도 난 뭐 코멘트 할 게 없지. 그건 그 양반 생각이고.”

-화제를 좀 바꿔보겠다. 그렇게 많은 노래를 지었으면서 왜 변변한 연애 노래는 없나? 연애 안 해 보셨나?(웃음)

“하고 싶었지. 왜 그 나이에. 20대 초반에 연애를 안 하고 싶었겠어?”

-게다가 기타 잘 치는 남자는 인기도 많은데.

“내가 지금은 얼굴이 시커멓지만 그때는 아이돌이었어.(웃음)”

-그런데 왜 연애 노래가 없으시냐고?

“(답답하다는 듯) 내 뒤에 항상 기관원들이 따라붙고 있는데 어떻게 연애를 하나? 친한 친구를 길거리에서 만나도 모른 척하고 다니던 땐데.”

-남들은 도망 다니면서 연애만 잘하던데.(웃음)

“연애는 숨어서 할 수 있는지 몰라도 노래를 만들기까지는 숙성이 돼야 해.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숙성을 시킬 여유가 없었어.”

-안타까운 일이네.

“내 가사 중에 사랑이란 낱말이 뭐냐고 물어보는 노래가 하나 있어. ‘두리번거린다’에서….”

그의 얘길 듣고 노랫말을 나직이 읊조려 보았다.

“헐벗은 내 몸이 뒤안에서 떠는 것은/ 사랑과 미움과 배움의 참(眞)을/ 너로부터 가르쳐 받지 못한 탓이나/ 하여 나는 바람 부는 처음을 알고 파서 두리번거린다/ 말없이 찾아온 친구 곁에서/ 교정 뒤안의 황무지에서.”(‘두리번거린다’ 1972년 작)

외로운 스물한살 청년의 프로필이 머리 희끗한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밤은 깊어가고 우리는 아직 할 얘기가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비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