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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3월 27일 07시 43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3월 27일 07시 44분 KST

대법, 박정희 유신체제 결국 면죄부줬다

연합뉴스

대법원이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동을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통치행위)”로 규정하는 판결을 내놓으면서 과거사 배상의 길을 또다시 막았다.

특히 이번 소송에서는 수사기관뿐 아니라 박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동 자체를 국가배상법이 규정한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로 볼지가 쟁점이었다. 원고 승소가 대법원에서 확정된다면 박 전 대통령에게 과거사 책임을 직접 묻는 첫 사건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판결은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가 이끈 유신체제에 대한 면죄부의 결정판이라고 할 만하다.

검찰은 애초 1995년 전두환 전 대통령 등 신군부 인사들의 내란 등 혐의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불기소 처분해 비난받았는데, 대법원의 논리는 이와 비견된다. 검찰도 당시 “전형적인 통치행위의 영역”이라는 표현을 쓰며 신군부에 면죄부를 주려 했다.

이번 판결은 과거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취지를 사실상 전면 부인한다는 문제점도 있다. 긴급조치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려다 보니 대법원 스스로 과거 입장을 번복하며 무리한 논리를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2010년과 2013년 “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이자 유신헌법과 현행 헌법이 규정한 표현의 자유, 영장주의와 신체의 자유, 주거의 자유, 청원권, 학문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며 긴급조치 1·9호, 4호가 위헌·무효라고 판결했다.

그러면서 긴급조치가 사법적 심사 대상이 된다고 밝혔다. 당시 대법원은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는 이른바 통치행위라 하여 사법심사를 억제할 수 있으나, 기본권을 보장하고 법치주의 이념을 구현하여야 할 법원의 책무를 태만히 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조영선 변호사는 “대법원의 긴급조치 위헌 판결 취지는 대통령의 통치행위라도 헌법과 법률에 근거해야 하고, 이를 위반하는 것은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판결은 통치행위이므로 배상 책임이 없다는 얘기여서 모순된 것”이라고 말했다.

헌법재판소는 1995년 검찰의 신군부 인사들 불기소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이날 성명을 내어 “소부에서 과거 전원합의체 판결 및 헌법재판소 결정, 형사 재심 판결의 취지를 뒤집은 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라며 “대법원이 유신의 품에 안겼다”고 비판했다.

대법원의 이런 태도에는 기본적으로 유신헌법은 합당하며 그에 근거한 통치행위도 불법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시각이 깔려 있다. 대법원은 여기에 시효 등 각종 민법상의 논리를 동원해 배상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

대법원의 잇단 ‘과거사 퇴행 판결’로 피해자들은 긴급조치로 인한 수사·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고문이나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손해배상을 받는 게 불가능해졌다. 피해자들은 수십년이 지난 상황에서 고문·가혹행위 증거를 찾아내 입증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원이 긴급조치처럼 피해자가 많은 사건을 개별 소송으로 배상해주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과거사 청산 흐름에 맞춰 판결을 해오던 기존 태도를 바꾸려고 하니 이런 논리가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