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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3월 26일 17시 20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3월 26일 17시 22분 KST

'과잠'의 계절이 돌아왔다

[매거진 esc] 스타일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고려대 자유전공학부 3학년 박세훈(21)씨는 옷장 속 ‘과잠’을 꺼냈다. 티셔츠든 남방이든 아무 옷에나 걸쳐 입기 좋고, 변덕스런 봄 날씨에도 끄떡없을 만큼 따뜻한데다 소속감도 느낄 수 있어, 박씨는 이 옷을 자주 입는 편이다. 박씨와 같은 학부의 친구들도 대부분 과잠을 즐겨 입는다.

‘과잠’의 계절이 돌아왔다. ‘학과 잠바(점퍼)’의 줄임말인 과잠은, 등판에 대학과 소속 학과의 이름을 자수나 패치워크 등으로 새긴 야구점퍼를 이른다. 학과 대신 동아리 이름을 적기도 하고, 팔 윗부분에 학교 로고를 넣기도 한다. ‘학잠’이라고 부르는, 학교 이름만 새긴 야구점퍼도 있다. 박씨는 학과와 학생회 집행부에서 각각 단체주문한 것 하나씩, 모두 2개의 과잠을 갖고 있다. 박씨 친구들도 학과, 동아리 등에서 만든 과잠 두세벌씩은 갖고 있다. 지하철에서든, 동네 큰길에서든 이들처럼 과잠을 걸친 청춘을 발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교생의 교복으로 불린 ‘등골 브레이커’ 즉 고가의 패딩점퍼처럼, 대학생들에겐 과잠이 교복이 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후반만 해도 대학 이름이 새겨진 야구점퍼는 학교 내부의 기념품점에서나 볼 수 있었지만, 2000년대 초중반에 접어들면서는 입학 점수가 높은 학교·학과를 중심으로 ‘과티’ 대신 과잠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대학가에선 학벌 과시, 인정 욕구 등의 논란도 일었지만, 과잠의 인기는 점점 높아져 2010년께엔 명실공히 ‘대학생의 교복’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단체복을 주문받아 생산·판매하는 ㄷ업체 쪽은 “그전엔 ‘스카이’(서울대·고려대·연세대) 같은 데서만 주문이 왔는데, 서울의 다른 대학으로 늘어나다 4년 전부터는 지방의 대학에서도 많이 들어온다. 새 학기가 되면 하루에 적어도 5곳에서 주문을 한다”고 전했다.

과잠이 보편화되면서 대학 안에서만 제기되던 논란도 교문 밖으로 나왔다. 오찬호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은 저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과잠을 대학 서열화와 구별짓기의 상징으로 해석했고, 일부 언론에선 이런 풀이를 보도하기도 했다. 다른 대학생을 마주쳤을 때 자신이 상대보다 합격 점수가 높은 곳의 과잠을 입었다면 과시욕이 생기고, 낮은 곳의 과잠이라면 위축감이 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과잠을 입는 당사자들의 생각도 비슷하다. 하지만 제3자의 분석처럼 심각하진 않다. 또한 제3자가 고정관념 때문에 놓친 것이 있다고 지적한다. 박세훈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고2 때, 수능을 보는 3학년들을 응원하러 온 우리 학교의 한 졸업생이 서울대 과잠을 입고 온 걸 봤는데 무척 불편하게 느껴졌다. ‘서울대 기운을 주겠다’며 그 옷을 입고 왔다고 했지만 내 눈엔 그저 자기가 서울대생이라는 걸 과시하러 온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난 대학 가도 학교 밖에서는 절대 과잠을 입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지금도 학교 밖에서 볼 일이 있는 날은 안 입는다.

하지만 과잠이 무조건 서열주의라고 하는 건 현실과 다르다. 막 입기 좋고, 편하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박씨도 과잠을 둘러싼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고 있고, 등판에 새겨진 학교·학과가 상대와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게 하는 차별적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편하게 입는 옷’이라는 과잠의 특징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다. 올해 중앙대 건축공학과에 입학한 김한규(19)씨는 “곧 과에서 점퍼를 맞추기로 했는데 바로 신청할 거다. 대학생이 됐다는 뿌듯함을 느끼고 싶어서 빨리 맞추고 싶다”며 “학교 서열에 상관없이 과잠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고 했다. 김씨의 경우엔 소속감이 과잠을 입고 싶은 주요 동기다.

사실, 로고 박힌 모든 것이 ‘차별화’의 기호인데 과잠에만 그 죄를 묻는 것은 과도한 측면이 있다. 패션계에선 복고 트렌드가 대학가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또 스케이트보드·힙합 등 스트리트 문화의 확산이나 <런닝맨><1박2일>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 과잠의 보편화에 기여했다는 풀이도 나온다. 힙합 뮤지션인 개리와 데프콘이 ‘그들만의 모자’였던 스냅백(챙이 납작한 야구모자), 그것도 ‘대장’ ‘상남자’ 따위의 글을 수놓은 스냅백을 쓴 채 예능에 출연해 관심을 받고, 등짝에 써 붙인 이름표 떼기 놀이가 몇년째 일요일 저녁 안방을 사로잡으면서 이런 문화가 가장 값싸고 손쉽게 적용된 과잠이 유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과잠은 4만~6만원대로 구입할 수 있다.

이러저러한 논란이 진행되는 동안 과잠도 발전했다. 1990년대 <우리들의 천국><마지막 승부> 등의 청춘드라마에서 절대미남 장동건이 입어도 펑퍼짐함은 어쩔 수 없었던 야구점퍼처럼, 과잠도 원래는 오버사이즈핏이 주류였다. 하지만 최근 몇년 사이 기성복에서 몸에 딱 붙는 스타일이 유행하면서, 과잠 역시 슬림핏이 대세를 이루게 됐다. 똑같은 과잠인 것 같지만, 와이셔츠처럼 팔목 부분에 자신의 이름이나 이니셜, 별명 등을 수놓거나 독특한 무늬의 패치를 붙여 ‘내 옷’임을 강조하기도 한다.

과잠이 교복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백팩의 인기도 덩달아 치솟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중후반 대학가를 강타했다 자취를 감췄던 이스트팩, 잔스포츠 등의 약진이 눈에 띈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백팩’을 검색하면, 이들 브랜드가 별도의 카테고리로 묶여 나타날 정도다. 네이버 쪽은 “이용자의 검색량, 실제 판매량 등을 종합해 인기도가 높은 브랜드가 별도로 노출된다”고 말했다. 이스트팩의 경우엔 2013년 말부터 서서히 매출이 증가해 올해 봄학기엔 지난해 봄학기보다 41.7%나 늘어나기도 했다. 패션잡화 브랜드에서도 백팩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러브캣은 지난해 말부터 백팩 라인을 확대했고, 백팩으로 유명한 브라운 브레스도 지난해 하반기 백팩을 주력으로 한 별도의 가방 라인을 론칭했다. 씨제이(CJ)오쇼핑은 다음달부터 유돈초이EC2와 아메리칸 투어리스터의 백팩을 판매하는 등 유행에 민감한 홈쇼핑업체에서도 백팩에 공을 들이고 있다.

똑같은 과잠에, 제아무리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 해도 스타일을 살리는 비법은 있다. 패션 마케팅 전문가인 김민정씨에게 도움말을 구했다. “기본은 청바지와 스웨트셔츠, 운동화나 슬립온 슈즈다. 여학생이라면 부드러운 소재의 원피스에 웨지힐과 매치하면 귀여운 분위기를 낼 수 있다. 남학생이라면 얇은 바람막이 점퍼 위에 과잠을 겹쳐 입으면 세련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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