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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2월 16일 12시 40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2월 26일 06시 39분 KST

난독증 환자를 위한 휠체어, 디슬렉시 서체

글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언어를 세상에 구현하는 매개체다. 비뚤거리는 손글씨로 시작한 서체가 인쇄술을 등에 업고 단정한 모습과 높은 가독성으로 우리 삶을 윤택케 한지 벌써 수백 년이 지났지만 난독증을 가진 사람에게 이런 혜택은 다른 세상 이야기일 뿐이었다.

네덜란드의 그래픽 디자이너, 크리스티안 부르(Christian Boer)는 난독증 환자를 위한 서체인 ‘디슬렉시(Dyslexie)’를 통해 그들이 ‘보던’ 세상을 ‘읽는’ 세상으로 조용히 바꾸고 있다.

‘난독증 환자를 위한 서체’는 듣기만 해도 매력적이다.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크리스티안 부르(이하 크리스티안) 미리 밝히자면, 나 또한 난독증을 겪고 있다. 난독증 때문에 항상 글 읽는 수업을 듣지 않아서 깊이 있는 교육을 포기할 때가 많았다. 난독증과 언어적 애로사항이 교육의 질을 낮춘 것이다.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지난 2008년 졸업 작품을 준비할 때가 되자 그동안 피해왔던 상황의 정 반대에 서보기로 했다. 난독증과 그래픽 레이아웃의 상관관계를 졸업 작품의 주제로 선택하게 된 이유다.

디슬렉시 서체의 기본 콘셉트에 관해 설명 부탁한다.

크리스티안 난독증이란 글자의 시각처리 과정에 단절을 일으켜 뇌가 문자를 판독하기 어렵게 만드는 신경질환이다. 보통 로만 알파벳 26자를 만들 때는 공통적인 수직선과 수평선, 사선, 곡선을 이용한다. 좋은 서체 디자인일수록 일정한 특징을 일관성 있게 공유한다. 예를 들어 디자이너가 선호하는 헬베티카(Helvetica)는 n과 u, b와 d, p와 q가 서로를 뒤집은 형태를 띤다. 그런데 난독증의 가장 큰 특징은 글을 읽을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비슷한 글자들을 회전시키거나 뒤집거나 반전시키는 것이다. 곧 서체가 어떤 일관성을 공유할수록 난독증 환자들은 글자를 분간하기가 어려워진다.

디슬렉시의 핵심은 글자 하나하나가 명확하게 다르게 보이는 디자인이다. 먼저 글자들은 중력의 영향을 받는 듯 아래로 갈수록 두껍고 무거워진다. 글자들이 위아래로 뒤집히는 걸 막는 거다. 그리고 평소 비슷해 보이는 글자들을 중심으로 수직선을 살짝 기울여 이탤릭 느낌을 냈고 필요한 경우 꼬리를 덧붙여 서로의 공통점을 최대한 제거했다. x, v, w, y처럼 중간이 파이는 글자들은 기준점을 서로 다르게 설정했다. 더불어 글자의 어센더(ascender)와 디센더(descender), 즉 수평 기준선을 넘어가는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기존보다 늘린 글자는 더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여기에 글자 간, 단어 간의 여백을 넉넉하게 두어 서로 글자가 달라붙지 않게 하고 구두점과 대문자는 더 굵고 크게 강조해 문장의 맺음과 시작을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서체의 전체적인 제작 과정이 궁금하다.

크리스티안 난독증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틀렸다는 지적을 받곤 하지만 막상 스스로 뭐가 틀렸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래서 난 책을 통해 지식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글자를 반전시키고, 뒤집고, 회전시키는 난독증의 특징을 배우는 것과는 별개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책을 읽는 경험은 또 다른 차원이었다. 예를 들어 글자가 모두 3D로 움직이는 환상을 떨쳐내기 위해 글자의 형태 대신 작은 영상을 머릿속에 재생시키곤 했고 글을 읽을 때마다 문장의 끝 부분과 새로운 문장의 시작을 제대로 찾기 힘들어서 헤매곤 했다. 게다가 긴 글을 읽을 때면 글자가 서로 뭉치는 터라 본능에 따라 더 넓은 자간과 단어 간의 공간이 충분히 확보돼야 한다는 걸 몸으로 느꼈다.

이처럼 글을 읽는 동안 생기는 많은 문제에 접근하면서 떠오른 아이디어를 참조로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일단 나는 글자마다 형태의 차이가 더 확연히 보이도록 표현하고, 한 바퀴 회전시키면서 모든 글자를 동시에 놓고 확인하면서 소문자를 먼저 만들어봤다. 새로운 서체로 배열한 문장을 읽어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하지만 스스로 만든 터라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학교 측에 각자 다른 배경, 연령, 증세를 가진 난독증 환자를 모집단으로 삼는 테스트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몇몇 사람들의 이름과 이메일 주소를 받은 후 그들에게 내가 만든 서체로 쓴 PDF 문서 파일을 보내면서 피드백을 부탁했다. 글자에 대한 코멘트는 제각각 달랐지만 반응은 동일했다. 모두 이 서체를 가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최소한의 검증을 통과했다는 생각에 이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몇 달의 시간을 더 들인 후 서체를 완성했다. 물론 졸업도 했다. (웃음)

난독증를 겪는 디자이너로서 난독증을 위한 서체를 만드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크리스티안 대학 은사님 중에 난독증을 가진 분이 있다. 그는 “작업을 계속 하라”고 독려했지만 다른 분들은 그렇지 않았다. 내 작업에 그다지 만족하지 않으며 “그냥 글자들이 춤을 추게 놔두지 그러니” 등의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 앞으로 남은 기간인 5개월 안에 만들 수 없다 선언하기도 했었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답안지에는 “일단 해보는 것(just do it)”밖에 없었다. 대학교에 가기 전까지 난독증은 내 가장 큰 약점이었다. 그러나 입체적으로 생각하고 아이디어가 곧장 이미지로 연결되는 게 디자이너로서 재능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서체를 만들 때도 다른 이달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텍스트가 내게는 의식적으로 느껴지는 터라 다른 사람과 다르게 접근할 수 있었다.

서체 이름이 너무 노골적인 건 아닌가? (웃음)

크리스티안 난독증 환자들이 어려움을 겪는 경우는 단지 글을 읽을 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만일 어떤 대상에 대한 이름을 듣고 머릿속에 그림으로 바로 떠올리지 못하면 금방 잊어버린다. 난독증이 있는 사람을 만날 일이 생기면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그다음에 이름을 말하는 것이 훨씬 좋다. 무언가 필요한 게 있을 때 이름 대신 설명을 자세하게 한다면 그들은 상상의 그림을 그려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서체 이름도 기능적인 측면의 산물이다.

일반적인 서체 중 난독증 환자들이 선호하는 조합이 있는가?

크리스티안 보통 버다나(Verdana), 코믹 산스(Comic Sans), 트레뷰셋(Trebuchet) 등을 좋아하는데 이런 서체들이 범용적인 건 절대 아니다. 난독증이 있는 사람들은 글을 읽을 때 저마다 겪는 어려움이 다양하다. N과 Z 같은 특정 글자를 유난히 더 읽기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고 b와 d, p와 q에서 큰 곤란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는 서체가 좀 더 선호될 수 있겠지만, 사람마다 증상이 달라 딱 잘라 말하기 힘들다. 핵심은 일단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거다.

디슬렉시 서체를 써본 사용자들의 반응은 어떤가?

크리스티안 디슬렉시는 기본적으로 나 자신과 난독증을 겪는 피드백 그룹을 위해 만든 것이다. 내가 직접 사용하고, 피드백 그룹에 나눠주는 것 이외 용도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 서체는 난독증을 치료해주는 약이 아니다. 눈앞에 마주한 어려움을 극복하게 도와주는 휠체어와 같은 역할이다. 당신은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내게 연락하는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각자 자신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디슬렉시 서체를 문의한다. 종교 서적을 읽기 위한 사람들도 있고 밴드 연주자도 있다. 50년 동안 난독증으로 책을 읽지 못하다가 디슬렉시 덕분에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알았다는 이메일이 온 적도 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서체가 제 할 일을 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큼 기분 좋은 경험도 드물다. 실제 지난 2012년에는 연구원 두 명의 도움을 받아 설문을 진행했다. 난독증 환자와 가족, 친지 등을 모집단으로 했는데 80%의 응답자가 읽는 속도와 정확도가 상승했다고 대답했다. 내가 기대했던 수준보다 꽤 보편적이다. 하지만 아랍어나 중국어처럼 라틴어 알파벳과 완전히 다른 언어에는 같은 규칙을 적용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언어권의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겪는지, 언어를 어떻게 습득하는지, 뇌에서는 이 신호 습득 과정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디슬렉시 서체 덕분에 스스로 생각하던 ‘좋은 서체’의 기준이 넓어졌다. 당신에게 좋은 서체란 무엇인가?

크리스티안 좋은 서체는 활용도에 달려있다. 디슬렉시 서체는 로고 보다는 본문에 적합한 서체다. 글을 문제없이 읽도록 도와주는 게 주된 역할이다. 활용도가 꽤 높은 편이다.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생각하는 좋은 서체는 이것과는 별개다. 개인적으로 몇 개 꼽아본다면 팔라티노 레귤러(Palatino Regular), 헬베티카 노이에 라이트(Helvetica Neue light), ICT 센추리(Century), 유로스타일(Eurostile) 등을 선호한다.

당신의 서체를 ‘박애주의적 디자인’의 범주에 넣는 관점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크리스티안 하하. 그런 단어는 네덜란드어로 어떻게 쓰는 건지도 모르겠다. (웃음) 철학을 만드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싶다. 디자인은 실용적으로 효과적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던 사람에게 “삶이 더 좋아졌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디자이너가 난독증 환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크리스티안 난독증 환자들은 시각적으로 민감하다. 서체뿐 아니라 본문 레이아웃을 친화적으로 바꾸고 기호 등의 표기법도 손본다면 글을 읽으며 정보를 습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글자를 그림이나, 영상으로 전환하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이다.

디슬렉시 서체의 개발자가 아니라, 크리스티안 부르 개인으로서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크리스티안 나는 디슬렉시 서체에 신경을 쓰느라 개인 시간이 거의 없었다. 출판사에 난독증 환자가 읽기 좋은 본문 레이아웃에 대해 조언해 주기도 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디슬렉시 서체에 대해 홍보도 한다. 내일도 2시간짜리 중요한 PT가 있다. 난독증, 그리고 난독증을 겪는 어린이들의 행동 방식에 관한 내용인데, 이를 위한 기능적 디자인을 설명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우주 공간과 극한 기술에 무척 관심이 많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내가 좋아하던 소소한 것에 시간을 할애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3D 프로그램도 다뤄보고 싶고… 요약건대 지금보다는 좀 더 잔잔한 삶이 아닐까 싶다.(웃음)

*월간 웹(w.e.b) 2월호와 홈페이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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