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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2월 06일 11시 00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2월 06일 11시 01분 KST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도시 유적 '풍납토성'

한강 남단 자전거도로를 따라 달리다 만나는 천호대교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흙으로 쌓은 언덕 같은 둑이 길게 이어져 있다. 언덕 옆으로 나있는 산책길로 들어서면 풍납토성비가 있다. 이 언덕 같은 둑의 정체는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풍납토성(사적 제11호)이다. 풍납동 동네를 품고 길게 이어진 토성은 오랜 세월 속에 언덕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강변 동네 풍납1동과 2동 일대에는 이렇게 띠를 두른 듯 예사롭지 않은 언덕 위에 긴긴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었다.

잃어버린 왕도를 찾아가는 토성 길에는 작은 시장통과 주택가가 있다

한강 남단 자전거도로를 따라 달리다 만나는 천호대교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흙으로 쌓은 언덕 같은 둑이 길게 이어져 있다. 언덕 옆으로 나있는 산책길로 들어서면 풍납토성비가 있다. 이 언덕 같은 둑의 정체는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풍납토성(사적 제11호)이다. 풍납동 동네를 품고 길게 이어진 토성은 오랜 세월 속에 언덕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강변 동네 풍납1동과 2동 일대에는 이렇게 띠를 두른 듯 예사롭지 않은 언덕 위에 긴긴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었다.

국내, 아시아 최대 규모의 판축성곽, 풍납토성의 흔적

오랫동안 알고 싶었지만 찾을 수 없었던 우리의 고대사. 초기 백제시대의 흔적으로 추정되고 있는 풍납토성. 조선시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풍납토성이 ‘고산성(古山城)’으로 표기되어 있다. 중세인들도 풍납토성을 백제의 오래된 성곽으로 추측한 것으로 보인다. 1900년대에 들어 풍납토성이 정식적으로 발견된 것은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 때이며, 지난 1997년 아파트 재건축 공사를 하던 중 다량의 백제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서울 한강가에 자리를 잡고 500년 간 전성기를 구가했던 초기 백제의 ‘한성 백제시대(기원전 18년∼기원후 475년, 온조왕~개로왕)’의 왕도(王都)인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 바로 풍납토성이라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3.5Km에 달했으나 지금은 일부 유실되어 2.7km 구간만 남아있다

풍납토성은 한강가 평지에 도성을 세우고 성을 보호하기 위해 외곽을 둘러쌓은 흙으로 쌓은 성곽으로, 성 내부 면적은 축구장 20개 크기의 26만평에 현재는 길이가 약 2.5㎞ 정도가 남아 있는 국내 최대, 아시아 최대 규모의 판축토성(흙을 다져 한층 한층 쌓아 올리는 방식)이다. 1925년 대홍수 당시 유실된 서벽을 포함한다면 최대 13m 높이(아파트 5층)에 전체 길이 3.5㎞에 달하는 거대 성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있는 풍납토성 성벽은 지상 5m, 지하 3m 높이의 규모다. 이처럼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 국가적 역량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왕도(王都)’를 찾아 가는 풍납동 토성 길

풍납토성 옆으로 한성백제길 산책로가 이어져 가까운 몽촌토성까지 연결된다

현재 토성 안쪽에는 수십 동의 아파트를 비롯해 각종 빌딩이 들어서 있고, 이곳에 거주하는 인구만도 1만 8000여 세대, 4만 8000명에 달한다. 안내판을 따라 풍납토성 옆에 마련된 산책로를 걷다보면, 도로와 지역개발로 성벽이 끊기면서 작지만 정겨운 풍납시장이 나타난다. 백제시대에도 성안에 이런 장터가 있었겠지 싶어 더 눈여겨보게 되는 시장이다. 잃어버린 ‘왕도(王都)’를 찾아 가는 기분이 들어 묘한 흥분이 일었다. 이름도 멋진 ‘바람드리(‘풍납(風納)’의 순 우리말)길’을 따라 시장통과 주택가 골목을 지나보았다. 각 골목길의 이름들도 ‘토성길’이다. 토성 편의점, 토성 노래방 등 주변 상점의 간판들에는 유독 ‘토성’이라는 말이 자주 눈에 띄었다. 풍납토성이 이곳 송파구 풍납동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것 같다.

시장통이 있는 평범한 풍납1동, 2동을 품고 있는 풍납토성

토성길과 바람드리길을 지나 다시 토성이 이어지는 경당역사공원(부여의 시조인 동명왕과 천지신에게 제를 올리던 신성한 제사터), 풍납초교, 풍남 2동까지 이어진 토성의 흔적을 따라가 보았다. 토성 길을 따라 한가로이 산책하는 주민들, 토성 터 위로 올라가 뛰어다니는 철없는 아이들의 모습… 처음 오는 곳, 처음 대하는 풍경, 처음 만나는 사람들인데 어디선가 이미 본 것 같은 느낌, 마치 고도(古都) 경주에 온 듯 했다. 길게 이어진 토성 터 아래로 천천히 오고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그림인 양 현실 같지가 않았다. 2천 년 전 백제인과 현대인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서울은 살면 살수록 알면 알수록 유서 깊은 도시요, 화수분(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 같은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동네 개구쟁이들이 성곽 위에 올라가 뛰어다니고 있다

풍납동은 오밀조밀한 시장통 골목과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찬 평범한 동네지만 2천 년 전에는 한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를 호령하던 백제 권력의 핵심이었던 터다. 풍납토성의 왕궁 유물발굴로 수도 서울의 역사는 조선왕조 600년 도시에서 무려 2천년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셈이다.

한국 고대사를 다시 쓰게 한 풍납토성

만주지역에 있던 고대국가 부여(夫餘)로부터 떨쳐 나온 왕비 소서노와 둘째 아들 온조(溫祖)왕이 백제 건국 초기 서울 한강가에 터를 잡은 이래로, 백제 전체 678년 역사 중 493년 동안은 한강을 중심으로 서울에 수도를 두었다. 백제는 고대 삼국 중 가장 먼저 한강을 차지하였고 가야, 중국, 일본 등과 활발한 교류를 하며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한성도읍기’ 혹은 ‘한성백제시대’(기원전 18년∼기원후 475년)라 불리는 시기다.

이 시기를 가장 확실하게 증명하는 유적이 바로 풍납토성이다. 백제는 초기고대국가의 틀이 갖추어지자 늘어나는 인구도 수용하고 방어체제도 강화하기 위해 도성을 건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삼국의 초기 도읍의 형태는 고구려가 그랬듯이 이성도읍체제(二城都邑體制)다. 한성백제도 그 방식을 따랐는데 풍납토성(風納土城)과 몽촌토성(夢村土城)을 두 개의 도성으로 삼고, 동서남북에 도성을 외호하는 산성을 두었다. 풍납토성은 평지토성으로 평상시에 주거하는 도성이고, 몽촌토성은 자연 구릉을 이용하여 만든 비상시에 대비한 산성적 성격을 지녔다. 북쪽의 산성으로는 한강 건너 아차산성, 서쪽으로는 수도산(修道山)에 삼성리토성(三成里土城), 동쪽으로는 광주에 이성산성(二姓山城), 남쪽으로는 병자호란으로 잘 알려진 남한산성을 구축하였다.

1997년 아파트 건설을 위한 터파기 공사 중 수없이 많은 백제왕궁유물이 출토되면서 이 토성의 역사적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풍납토성에서는 집단취락시설의 주위나 성곽 둘레에 도랑을 파고 물을 가두어두는 일종의 방어시설인 환호(環濠)가 3겹으로 둘러싸여진 모습으로 발굴되었다. 또 각종 토기류와 꺾쇠, 숫돌 등의 생활유물들도 원형을 유지한 채 모습을 드러냈고, 도로의 유구와 석축유구, 생활유구, 수혈 등도 함께 발견된 것으로 보아 왕궁 내에 많은 국가시설물들이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2011년 송파구 풍납토성 발굴현장

또한 성 안 전역에 걸쳐 기와, 전돌, 초석 등 그 당시로서는 고급의 건축자재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처럼 많은 유적과 유물이 쏟아진 경우는 국내에서 경주 말고는 달리 없다고 한다. 이제 풍납토성은 이제 북녘의 평양성과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유적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서울시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할 만하다. 잃어버렸던 우리 고대문화를 상징하는 유적이자, 찬란했던 한성백제시대를 고스란히 간직한 보물창고로 잘 보존되길 바란다.

○교통편 ; 5호선 전철 천호역 10번 출구로 나오면 풍납근린공원과 함께 풍납토성 언덕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