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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2월 05일 07시 22분 KST

흑자 낸 기업들도 구조조정, 내수침체 악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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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기업들이 연초부터 경영실적 악화와 불투명한 경영환경을 이유로 ‘비상경영’의 기치를 내걸고 앞다퉈 감원(인적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이 때문에 고용불안으로 인한 노사관계 악화는 물론 ‘비상경영→감원→내수 위축→생산 감소→실적 악화→감원’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우려되고 있다. 한국 경제의 공멸을 막기 위한 해법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많다.

<한겨레>가 4일 지난해 이후 최근까지 ‘명예퇴직’이나 ‘희망퇴직’ 등의 명분으로 감원을 했거나 현재 감원이 진행 중인 삼성그룹의 삼성생명·증권·전기·에스디아이, 현대중공업그룹의 현대중공업·하이투자증권, 두산그룹의 두산중공업·인프라코어, 에스케이씨, 지에스칼텍스, 케이티 등 11개 대기업의 지난해 1~3분기 경영실적을 분석한 결과, 매출과 이익이 모두 전년보다 줄어 인적 구조조정을 위한 최소한의 명분을 갖춘 곳은 삼성전기·현대중·두산중·지에스칼텍스 등 4개사에 그쳤다. 이 중 삼성전기·현대중·지에스칼텍스는 영업 적자를 기록했다.

반면 매출과 이익이 늘어났음에도 비용 절감을 내세워 감원을 단행한 기업도 삼성생명·삼성증권·하이투자증권·에스케이씨 등 4곳이었다. 나머지 3곳 중에서 삼성에스디아이와 두산인프라코어는 매출은 줄었지만 영업이익은 늘었고, 케이티는 매출은 늘었지만 영업 적자를 기록했다. 케이티의 영업 적자는 지난해 상반기 전체 인원의 25%가 넘는 8300여명을 명예퇴직으로 내보내며 1조2300억원의 특별명예퇴직금을 일시에 지급한 요인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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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면 동국대 교수(경영학)는 “적자가 수년간 이어진다면 몰라도 수조원, 수천억원씩 이익을 내면서도 단지 이익이 줄었다고 ‘위기경영’을 내세워 감원을 하는 기업들이 있다면 국민들이 얼마나 공감하겠느냐”고 지적했다. 실제로 삼성생명은 지난해 3분기까지 영업 흑자가 1조3000억원에 달했고, 두산중공업과 인프라코어도 각각 6791억원과 3447억원의 영업 흑자를 기록했다. 이에 대해 지난해 감원을 한 대기업의 간부는 “시장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향후 경영환경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당장의 생존은 물론 미래 경쟁력을 강화하고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선제적 구조조정을 하는 기업들을 비난할 수는 없지 않으냐”고 항변했다.

기업들의 대규모 감원은 고용불안을 초래해 노사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한 예로 현대중공업은 사무직 1500명(전체 직원의 5.33%)을 명예퇴직 방식으로 감원하려고 하자, 과장급 이상 사무직들이 지난 1월 말 생산직노조와 별개의 노조를 결성해 사실상의 ‘정리해고 중단’을 요구하며 반발하고 있다. 또 한꺼번에 수천명, 수만명이 일자리를 잃을 경우 내수 침체를 불러 기업의 생산 감소와 실적 둔화로 이어지고, 다시 감원 압박을 받는 악순환을 초래할 위험성이 높아진다.

지난해 박근혜 정부가 각종 경제 활성화 대책을 내놨음에도 내수경기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이유 중에는 은행·보험·증권 등 금융권 실직자만 2만명을 넘을 정도로 감원 열풍이 거셌던 게 큰 요인으로 꼽힌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2015년 투자환경 조사’에서도 30대 그룹의 다수가 ‘현 경제상황이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더 나쁘거나 비슷하다’(72.4%)며 ‘투자 확대를 위해 내수 활성화가 가장 시급하다’(37.9%)고 응답했다. 기업들 스스로 내수 활성화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감원으로 내수기반을 무너뜨리는 모순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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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노조·사용자·정부 등 3자가 머리를 맞대고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모두가 공멸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에스케이이노베이션은 지난해 유가 하락 등의 영향으로 수천억원의 적자가 예상되는데도, 에스케이에너지·종합화학·루브리컨츠 등 5개 자회사와 함께 노사가 고통분담을 통해 감원을 자제하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이 회사는 매달 월급에서 임원은 15%, 직원은 10%씩 먼저 공제하고, 최종 연말 실적이 경영목표를 달성하면 이자를 붙여서 돌려주기로 했다.

반면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3분기까지 영업손실이 3조2000억원을 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노사가 고통분담 대신 정면대결로 치닫고 있다. 회사 경영진과 노조 집행부는 7개월간의 임금 단체협상 끝에 지난해 말 극적으로 잠정합의안을 도출했으나, 1월 초 노조원 총회에서 기본금 인상폭이 미흡하다는 이유 등으로 거부됐다.

이영면 교수는 “회사는 무분별한 감원을 자제하고, 노조도 일자리를 지키는 대신 임금은 일정 부분 양보함으로써 ‘유연안정성 모델’처럼 노사가 모두 윈윈할 수 있는 타협안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노사정위원회에서도 나이를 먹으면 급여가 자동으로 늘어나는 현행 연공급제 대신에 직무나 성과에 따라 급여를 주는 방안을 포함한 임금체계 개편안을 논의 중이다.

최근 대기업 감원이 2016년부터 본격 도입되는 60살 정년 연장에 대비한 사전정리 성격도 있는 만큼 정년은 보장하되 임금의 일정 부분은 덜 받는 ‘임금피크제’ 등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의견도 많다. 이장원 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정년 연장의 취지가 실종되는 것을 막으려면 당장 올해부터 50대 후반의 고령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해야 한다”며 노사정위원회의 업종별 임금피크제 도입 선언 방안을 제안했다. 지난해 희망퇴직을 실시한 한 대기업의 간부는 “개별 기업이 전체 경제를 감안해 솔선수범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정부의 적극적 역할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