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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1월 26일 11시 04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1월 26일 11시 37분 KST

'박주영법'에 태클 걸린 프로골퍼 배상문

gettyimageskorea

“차범근이 비록 직업선수로 외국에 나가는 일이 개인의 영달이나 돈벌이로 간주된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상행위와는 구별되어야 하며…한국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민간외교 차원에서도 (병역 문제가) 검토될 수 있다.”(1979년 1월8일 <동아일보>)

세계적인 축구 스타였던 차범근(62)은 병역 문제로 고초를 겪었던 ‘1세대 국외파 스포츠 스타’다. 그는 1978년 12월 공군 현역 군인 신분으로 당시 서독 분데스리가 다름슈타트와 6개월 가계약을 맺었다. 공군이 애초 6개월짜리 기초 훈련 과정을 면제해 주기로 한 약속을 믿고, 제대일을 계산한 것이다.

차범근 전 국가대표 감독이 독일 레버쿠젠에서 활약 당시, UEFA 컵에서 에스파뇰을 꺽은 뒤 우승컵을 들어보이고 있다.

하지만 차범근이 국내 활동을 하지 않고 분데스리가에서 ‘차 붐붐붐’으로 불리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자, 군 당국이 일시 귀국한 그를 재입대시켜 남은 기간을 채우게 했다. 어처구니없는 군 당국의 행정으로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선수 등록이 취소됐고, 다름슈타트와의 계약도 파기됐다.

당시 언론은 “차범근의 사례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며 국외 진출 스포츠 선수들의 병역 문제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안 마련을 촉구했다. 30년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뚜렷한 대안은 나타나지 않았다. 병역과 스포츠 선수들의 질긴 악연도 계속되고 있다. 이번엔 프로골퍼 배상문(29·캘러웨이)이 ‘병역 딜레마’에 빠졌다.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배상문은 지난해 말 병역 문제를 묻는 국내 기자들에게 “방법이 없는지 거꾸로 기자들한테 묻고 싶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군 문제를 해결 못해서 너무 힘들고, 머리가 아픕니다. 최고의 시나리오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는 건데, 당장 운동을 더 해나갈 수 있을지….” 해법은 없었다. 2개월 사이 병역 문제는 더 깊은 늪에 빠져들었다.

병무청은 지난해 말 배상문에게 국외여행 기간 연장 불허 통보를 했다. 올해 29살이 된 그에게 이달 30일까지 국내로 들어와 병역 의무를 이행하라는 사실상 ‘최후통첩’이다. 배상문이 국내로 들어오면 곧바로 군 입대 절차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2009년 이후 미국프로골프(PGA)에서 7년째 뛰고 있는 배상문은 최근 기량이 급성장하고 있다. 올 시즌 피지에이 5개 대회에서 한차례 우승을 포함해 톱 10에 세차례나 올랐다.

스포츠 선수에게 기량과 신체 능력이 정점에 오르는 20대에 2년간 군 복무를 하는 것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배상문으로서도 양보가 불가능한 상황인 셈이다. 배상문은 “국외여행 연장을 위한 법적 절차를 밟아 미국에서 선수 생활을 계속하겠다”며 병무청을 상대로 행정 소송에 들어갔다.

배상문은 특히 국외파 스포츠 스타 가운데 이른바 ‘박주영법’이 적용된 첫 사례여서 주목받고 있다. 축구 국가대표 출신 박주영(30·알샤밥)은 2008년 당시 프랑스 축구 클럽 AS 모나코 선수로 10년 이상 장기 체류 자격을 얻은 뒤, ‘국외 이주 사유 국외여행 연장’ 허가를 받아 병역 회피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병역법이 영주권이나 5년 이상 국외 장기체류 자격자에게 병역 의무가 없어지는 38살까지 병역을 연기하도록 해 사실상 병역 면제 혜택을 줬던 점을 노렸다는 것이다.

축구 국가대표 출신 박주영 선수

박주영은 이후 2012 런던올림픽 동메달을 따내 합법적인 병역 특례 혜택을 받았지만, 당시 병무청에는 허술한 제도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다. 이후 병무청은 영주권 취득을 했더라도 최소 1년 이상 국외에 연속으로 머물면서 국외 이주 의사가 분명한 경우에 한해 여행 연장을 해주겠다고 규정을 강화했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배상문은 스포츠 스타로는 처음 바뀐 규정에 발목을 잡혔다.

배상문 앞에는 세가지 길이 놓여 있다. 첫째, 미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배상문은 2013년 미국에서 ‘그린 카드’(미국 영주권)를 취득했다. 피지에이 투어에서 우승한 외국 선수에게 영주권을 주는 관례를 따랐다. 당장이라도 미국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다. 선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 경우 병무청이 그를 병역 회피자로 취급해 향후 국내 입국이 거부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미 국적을 취득해 병역을 피했던 가수 유승준(미국이름 스티브 승준 유)이나 전 메이저리거 백차승은 각각 10년 안팎의 입국 불허 명단에 올라 있다. 가족을 비롯한 대부분의 연고를 한국에 둔 배상문으로서는 선택하기 어려운 방법이다. 국내 여론의 극심한 비난도 감수해야 한다. 배상문은 “미국 국적 취득은 고려한 적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둘째, 군에 입대해 2년 뒤 다시 선수로 복귀할 수 있다. 하지만 배상문 쪽은 “세계적 선수들과 겨루는 상황에서 2년 공백은 선수 생활을 접으라는 것”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배상문의 어머니 시옥희씨는 24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피눈물을 흘려가며 아들을 세계적인 선수로 키웠다. 군대를 안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전성기만 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골프채를 놓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단호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셋째, 행정 소송을 통해 국외여행 허가에 대한 타당성을 인정받는 방법이다. 배상문은 “절대 병역을 회피하려는 게 아니다. 이전에 국외 영주권자들에게 병역을 미뤄준 것처럼 합법적인 테두리에서 입대 시기를 조절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반면 병무청은 “영주권 취득 사유 국외여행 허가는 단순 입영 연기 제도가 아닌 국외 이주를 돕는 과정이다. 국내에 주소지, 학적 등을 두고 단기간에 영주권을 취득한 극히 이례적인 경우는 생활 근거지를 국외로 옮겼는지 등에 대한 심사가 더욱 엄격하게 이뤄져야 한다”며 절대 불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운동선수 대부분이 이런 ‘배상문 딜레마’를 안고 있다. 전업 선수들이 현업에서 뛸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15년 안팎이다. 그나마 기량과 신체 능력이 최고조에 오르는 20대 중후반의 짧은 기간이 군 입대 시기와 맞물린다. 일정한 흐름을 타고 기량이 정상까지 올라가는 운동선수들 입장에서 2년 공백은 사망 선고나 마찬가지다. 대안은 없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보편적인 국민 정서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당장 시도할 만한 대안으로 ‘포인트 제도를 통한 입대 기한 연장’이 있다. 이대택 스포츠문화연구소장(국민대 체육학과 교수)은 “올림픽·아시안게임뿐만이 아니라 일정 규모 이상의 국제 대회에서 성적을 점수로 평가하고, 조건을 충족한 선수들에게 병역 이행 기간을 30대 중반 정도로 늦춰주는 것을 고려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전성기를 피해서 군 복무를 하도록 허용하는 대신 ‘군 복무 기간 재능기부 의무화’ 제도를 도입하자는 방안도 나오고 있다.

이 소장은 “국내 선수들의 국외 진출이 갈수록 많아지는 상황에서 이런 사태가 계속 불거지게 될 것이다. 병역 특례가 산업체, 무역, 문화·예술계 등에도 있는 제도인 만큼 스포츠 선수들한테도 기회를 확대해 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