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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17일 06시 34분 KST

재벌 3세: 독일 VS 한국

한겨레

* 전편: '불안한 폭탄' 재벌 3세에 '한국'이 떤다

글로벌 경기불황 속에서도 비교적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독일의 경제를 지탱하는 주요 축인 ‘히든 챔피언’(강소기업)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가족경영에 바탕한 ‘리더십의 지속성’이 꼽힌다. 지난해 3월 독일 현지에서 <한겨레>와 만난 만하임응용과학대의 빈프리트 베버 교수는 “히든 챔피언의 가족경영이 성공한 바탕에는 ‘합리적 승계 프로그램’이 있다”고 강조했다.

11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프리미엄 가전업계 1위인 밀레는 대표 사례다. 밀레코리아의 안규문 대표는 밀레의 성공비결로 두 창업가문이 4대째 지켜오는 ‘합리적 승계 및 경영시스템’을 꼽는다. “창업가문에서 1명씩만 경영에 참여해 공동대표를 맡는다. 가문의 대표는 엄격한 후계자 선정 과정을 거쳐 능력을 검증한 뒤 최종 승인을 받는다. 이사회에서는 창업가문의 2명과 전문경영인 3명이 만장일치로 의사결정을 하는 ‘창업가문-전문경영인 간 파트너십 경영’을 한다.”

한때 한국 재벌의 벤치마킹 대상이었던 스웨덴의 발렌베리가 150년의 역사를 이어온 배경에도 자손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책임감, 검소함이 몸에 배도록 가르치고,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기른 뒤 세계적 금융회사에서 일하며 전문성과 국제적 네트워크를 확보하도록 하는 치밀한 승계 전략이 숨어 있다.

한국 경제의 주축을 이루는 재벌의 사정은 이와 매우 다르다. 재벌 3세들은 20대 중후반에 아버지 회사에 바로 입사한 뒤, 별다른 검증 없이 30대 초중반에 임원으로 승진하고, 40살 이전에 사장 등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른다. 롯데처럼 다른 회사에서 먼저 경영수업을 받는 경우는 예외적이다. 롯데의 한 임원은 “신동빈 회장(롯데 2세)은 젊은 시절 일본 노무라증권에서 8년간 경영수업을 받았고, 신 회장의 장남(롯데 3세)은 그 전통을 따라 2년 전 노무라증권에 입사했다”고 말했다.

아버지 회사에 들어와서도 실적 부진에 책임지지 않는 자리만 맡다가, 최고경영자로 승진하는 경우가 많다. 삼성 총수 가문의 3세인 이재용 부회장도 이런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부회장은 33살에 처음 임원 승진을 한 뒤 42살에 사장을 거쳐, 44살에 부회장에 올랐다. 그나마 이는 재벌가에서는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다.

조양호 한진 회장은 딸인 조현아 전 부사장의 잘못을 직접 사과하고,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추후 조 전 부사장의 복귀를 점치는 시각이 많다. 총수들이 배임·횡령·탈세 등으로 법적 처벌을 받아 경영에서 물러났다가도, 얼마 뒤 경영에 복귀하는 게 지금까지 이어져온 관행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경영세습을 하더라도 제대로 경영할 수 있는 사람을 엄선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하지만 재계 안에서 이를 정면으로 말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5대 그룹의 한 건설 계열사 임원은 “승계 문제는 그룹 안에서도 일종의 ‘성역’이다. 회장님 귀에 거슬리면 바로 잘리기 때문에 아무도 말을 않는다”고 털어놨다.

재벌이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큰 비중을 고려하면 재벌 3세에 얽힌 ‘리스크’를 더이상 방치해선 안 될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여러 재벌 기업에서 일한 바 있는 한 전문경영인은 “대다수 재벌 3세들이 어렸을 때부터 황태자 대접을 받고, 회사에 들어와서도 초고속 승진을 하다 보니 안하무인이 되기 쉽다”며 “3세들은 대중과의 소통이 거의 없고, 비슷비슷한 사람들끼리 ‘그들만의 리그’에서 생활해, 국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른다”고 지적한다.

효성의 3세 출신으로, 황태자 자리를 스스로 박차버린 조현문 전 효성 부사장은 “상당수 재벌 3세들은 창업자와 2세들에 비해 기업가 정신이 부족하고, 기업 돈과 내 돈을 구분하지 않고, 돈을 번다면 법을 어기는 것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이런 3세들이 걸러지지 않는 한 재벌의 미래는 없다”고 지적한다. 독일의 수많은 가족경영 기업들이 100년 이상 역사를 거쳐오면서, 변화된 경영환경에 맞춰 합리적인 승계 시스템 갖추지 못한 곳들은 대부분 도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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